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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May 16. 2020

75. 장모님표 겉절이

(Week 47) 닮고 싶은 마음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들이 있다. 가령 마트에서 깐 메추리알을 집어 든 사람을 보면 속으로 '직접 삶아서 까면 될 것을 굳이 비싸게...'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동그랗고 매끈한 모양으로 메추리알을 까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뿐더러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리는 일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막상 해보면 깐 메추리알이 비싼 이유를 금세 납득할 수 있을뿐더러 가끔은 직접 삶아서 까는 것보다 깐 것을 사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삶이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메추리알과 옥신각신하느라 지쳐버릴 염려가 있다면 말이다.


직접 해보지 못해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엄마가 되는 일이 내겐 그렇다. 의사 선생님께서 흔히 물어보시듯 아픈 정도를 숫자 1에서 10 사이 어디쯤인지 표현해달라 했을 때 최소한 11은 넘는 것 같다 말하는 출산의 고통을 남자인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일 것이라는 짐작 정도만이 가능할 뿐이다.


아내가 아이를 낳던 날도 그랬다. 옆에 앉아 비슷한 표정으로 찡그리고 있었다고는 해도 나는 내가 모르는 고통을 온전히 느끼진 못했다. 그보다는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지나간 뒤 세상에 나온 아이를 얼른 보고픈 마음이 오히려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와는 달리 장모님의 표정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아마도 당신께서 겪어보신 그 극심한 고통을 지금 당신의 딸이 겪고 있다는 사실에 속이 타들어갔던 게 아니었을지, 그 속을 100% 헤아릴 수 없어 짐작해볼 뿐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모님께 처음 인사를 드린 건 대학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이었다. 입사 연수를 앞두고 시간이 날 때 미리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다. 당시 처가는 서울 사람에겐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기에 충분한 해운대에 위치해 있었는데 부산에 올 기회가 흔치 않았던 나는 무려 5일씩이나 머무르는 일정을 잡아두었다. 혼담이 오가기 전 교제 중인 사람의 신분으로 5일씩이나 머물렀다는 게 다소 무리스러운 일정이었지만 기왕이면 오래 머무르며 미래의 처가 식구분들께 두루두루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장모님께서도 그런 마음을 느끼셨는지 내가 머무른 5일 내내 마치 미래의 사윗감을 대하시듯 정성껏 식사를 차려주셨다.


장모님께선 그 나잇대의 어머님들께서 대개 그러하시듯 손맛이 무척이나 좋으셨다. 어떤 음식이든 뚝딱 만들어주셨는데, 입에 맞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서울 토박이인 내 입맛에도 딱딱 들어맞아 매 끼니 어떤 음식을 차려 주실지 기대될 정도였다. 고기, 생선, 나물, 찌개 할 것 없이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기에 충실한 깊은 맛의 향연이 5일 내내 이어졌다.


다만 딱 한 가지,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김치만은 아쉽게도 내 입에 맞지 않았다. 처가에서 처음 맛본 김치는 전라도 출신인 장인어른과 경상도 출신인 장모님의 입맛에 맞게끔 간이 된, 젓갈이 잔뜩 들어간 짭조름한 김치인 데다가 푹 익은 탓에 마치 묵은지를 먹는 듯했다. 담백하고 시원한 맛의 덜 익은 김치에 익숙했던 터라 장모님의 김치가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젓가락이 잘 가진 않았다.


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장모님께서는 아직까지 "이서방"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셨는지 끝내 "자네"라 부르시고는 지내는 동안 불편하진 않았는지, 음식은 입에 좀 맞았는지 물으셨다. 그냥 "네" 하면 될 것은, 하필이면 그때 지나치게 솔직해진 나는 김치 얘기를 꺼내버렸다. 차려주신 음식이 하나 같이 너무 맛있었고, 김치도 먹던 것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었다는 사족을 붙여버린 것이다. 장모님께선,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저 웃으시며 "그랬나?" 하셨던 것 같다.



이후 결혼을 하고 처가에 갈 때면 밥상에 늘 새 김치가 올라와 있었다. 겉모양은 전과 비슷해 보였지만 분명 처음 먹어본 것과는 다른 종류의 김치였다. 한 점 집어 입에 넣으니 젓갈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정갈하게 그릇에 담긴 모양새가 한눈에 봐도 새 김치였다.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꿀떡 삼키고는 "장모님, 김치 새로 담그셨나 봐요? 아주 맛있는데요?" 하자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맛이 괜찮은가? 이서방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하셨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장모님께서는 평생을 보낸 경상도에서의 삶을 정리하시고는 서울로 올라와 주셨다.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아이를 봐주기로 하신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장모님 손에서 자란 아이는 몇 해가 지나자 어느새 김치를 먹을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나를 닮은 아이는 입맛마저도 나를 닮아가고 있었는데 김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 역시 간이 세지 않은 김치를 좋아하는 데다가 겉절이를 가장 좋아하는 취향마저 나를 쏙 빼닮아 버린 것이다.


온종일 아이 뒷바라지하시느라 힘드실 만도 했지만 장모님께서는 금요일이면 반찬을 잔뜩 해놓은 뒤 댁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냉장고 안 반찬통의 가장 앞 열에는 늘 우리 식구를 위한 새 김치가 놓여 있었다. 매주, 못해도 격주 단위로는 김치를 담가 주셨는데 딱 아이가 좋아하는 맛의 겉절이였다. 아이는 지금도 맛있는 겉절이를 먹을 때면 외할머니가 해주신 것만큼 맛있다고 한다. 그것은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기도 하다.






언젠가 장모님께서 딸이 그렇게 일찍 결혼을 하려는 데 무척이나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곤 해도 당시 아내는 스물여섯, 나는 스물여덟이었으니 꽤나 일찍 결혼한 편에 속했기에 충분히 그러실만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장모님은 딸의 결혼식장에서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던 분이셨다. 찔끔 눈물을 보이신 장인어른과는 달리 장모님은 늘 초연한 모습을 보이셨다. 늘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강인한 어머니의 표상과도 같았던 장모님이지만 우리 가족이 그 품을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오르던 날에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해방감을 압도하는 상실감을 이해하는 날이 언젠가는 내게도 오겠지, 생각하면 나 또한 마음이 아련해진다.




휴직과 함께 미국에서 1년간 주부라는 직업을 갖게 된 나는 그 단조로움에 지쳐갈 때가 많았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똑같은 일상이 지겹다가도 당신의 딸이 낳은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한 평생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낯선 서울 땅을 밟으셨을 때의 기분이 어떠셨을지 생각하면 몸이 움직여진다. 내 어설픈 요리 실력에 삼시세끼 차려내는 일이 벅차 값싼 패스트푸드로 한 끼 때우고 싶다가도 당신의 딸과 사위, 손녀를 위해 매주 김치를 담가주시고 한 평생 흰쌀밥에 곁들여온 김치의 레시피마저 바꾸시던 그 정성을 생각하면 몸이 또 움직여진다.


그리고 어느샌가 김치를 담그는 일도 월례 행사가 되어 버렸다. 한인 마트 김치가 아이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해보니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추를 절이는 일부터 양념을 만들어 묻히기까지 꼬박 몇 시간은 주방에 갇혀 있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때문에 가능하면 한 번에 많이 담그고 싶었지만 김치 냉장고가 없어 서너 포기가 고작인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반면 여전히 겉절이를 좋아하는 아이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새 김치를 담근 날 푹 삶은 돼지고기 수육에 곁들여 먹을 때면 아이는 겉절이가 맛있다며, 외할머니가 해주신 것만큼 맛있다며, 이 맛있는 걸 매일 먹고 싶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난 김치를 담그는 번거로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문득 장모님 얼굴을 떠올려 본다.


'혹시 장모님이었다면?' 하다가도

'에이, 설마...' 라며 피식 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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