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있는 탁자에는 시집이 한 권 놓여있습니다. 베란다에 앉아 있을 때 핸드폰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기보다 시집을 보는 게 낫겠다 싶어 놔둔 것입니다. 의도대로 가끔 시집을 들여다봅니다. 지금 베란다에 있는 시집은 ‘싱고,라고 불렀다’라는 시집입니다. 오래 전에 사두었는데 강릉에 오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오래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시집은 오래 조금씩 읽게 됩니다. 그 리듬이 마구마구 섭취할 수 없는 것이라서요.
시는 목적 없는 산책 같고 삶 속에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한 순간의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을 그려냅니다. 이것을 뭐라 해야 할까요. 예전에 교과서에 있던 시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오오’나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 같은 초승달에도 그 느낌은 있습니다. 어느 순간 불어닥친 어떤 마음이 그 순간 모두를 지배해버린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요새 시들은 그 느낌이 훨씬 더 빠른 것도 같고, 이미지의 충돌도 심하고, 현대사회의 시답게 현란하기도 하지요. 그게 좀 어렵다는 사람들도 많고요.
베란다에서 시집을 보다 보니 아 이 리듬의 세계로부터 내가 멀리 왔네, 그동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었네, 싶어졌습니다. 이 정도의 걸음이나 보폭으로 현실을 살아가기는 어렵고, 이게 핑계일 수 있으나 일타이피가 안 되는 캐릭터인 관계로, 그만 그 걸음이나 보폭 대신 현실의 어떤 삶 속을 걷느라 분주하였구나 싶어졌습니다.
시는 사실 실리나 경제현실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벤야민이나 프로이트, 뉴턴, 아인슈타인, 슬라보예 지젝, 공부할 때 열심히 들여다보던 그 이름들이 내 현실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실은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세계 속에서 그 이름들이 희미해져가고 있을 때, 과연 그때 그 이름, 그러니까 그 이름으로 된 그 글들에 열광하던 내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어느 세계에서 그들은 스타이나 다른 세계, 현실의 세계라고 해야 할까, 자본의 세계라고 해야 할까, 그 세계에서 그들은 그런 자들이 있건 말건 지구는 돌고 내일도 출근해 눈치껏 살아나가야 하는 곳에서 그들이 내 월급을 올려주지도 않고 맛있는 것을 사주지도 않는,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는 이들입니다. 이 양극 사이에서 괴리감 같은 것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감동했던 것은 ‘나는 무용한 것을 사랑하오’ 하던 그 김희성이라는 변요한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였습니다. 드라마도 재미있었지만, 구한말 시기 무용한 것을 사랑하던 예술가 김희성이 그 드라마에서 내내 의미있는 역할을 해나가는 것을 보며, 와 정말 대단한 작가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위기의 시대를 살던 각각의 캐릭터들의 생생함이 있었고, 그 안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마저 담아내고 있다고 보아서요. 결국 좋은 작품은 주어진 상황 안에서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며 각자의 캐릭터에 따라 삶을 살아내고 그것이 씨줄과 날줄을 엮으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빛날 때가 아닐까, 그런 이유로 그 드라마가 사랑 받았고, 저 역시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보기에 그 드라마에서 김희성은 결국 서재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요. 그것이 어떤 역사적 현실이나 감동을 제거하고 지금 시대에 보자면 콘텐츠나 플랫폼 산업 같은 것일까 싶기도 하고, ... 그러다 보면 막막해지기도 하고요.
그리고 어제 시집을 들여다보다, 이 무용한 것, 때로 이게 너무 무용해서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런 것을 좋아하게 된 걸까 싶던 내 인생도 그래 나는 이런 캐릭터인 것이지 싶었고, 오늘 오후에 도서관에 갔다 오며 이곳에서의 삶을 내가 왜 선택했는지 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바우길 구간 중 일부로, 바닷가를 걸어가면 됩니다. 도서관이 문 닫기 전 도착하기 위해 4시 반에 나가니 아직 뙤약볕이 내리쫴 시종일관 땀이 흘러내렸으나, 그래도 바다는 아름답습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바다가 펼쳐져있다니, 이 삶을 선택한 이유라는 것은 나의 캐릭터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인가 싶어, 더위는 더위대로 감탄은 감탄대로 길을 걸었습니다.
여전히 ‘코스모스’를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인류란 얼마나 왜소하며 또한 놀라운가 하며 삼엽충 시대의 지구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회사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돌아이가 될 뿐이지요. 그래서? 어쩌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그런 이야기들, 아마 과학도 시도 어느 부분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 지금의 현실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것도 같은, 그러나 실은 밀접한 한 지점 같은 긴밀히 추적하지요. 문제는 그 거리가 너무 멀어 근시안인 하루하루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인가 이런 생각들이 쌓여가던 때 오규원 시인의 '용산에서'를 보고 조금 갈증이 해소된 것도 같았으나 또 시간이 지나 그 갈래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면 아마 나의 이 갈증은 영원하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 시에서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시에는 아무것도없다. 시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생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생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라고 합니다. 근사하지 않은 이삶의 괴리를 조금은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도 같으나 이 서성임이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나 고양이나 음악 같은 것들은 다 당장 경제적, 현실적 도움은 안 되는데, 저는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수산업이나 해양 관련 직업을 갖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점에서 어쩌면 바다도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그게 좋은 것이지요.
이 현실과 바다 사이, 물속에 거의 매일 들어가긴 하지만 수영은 못하고 그냥 물과 친해지는 내 인생과 아주 유사하구나 싶기도 하고요. 또 정말 시는 바다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 같기도 합니다. 천천히 보며 아주 조금 변하고 아름답고 그런 채로 뭐 어쩔 수도 없는 것이죠. 그리고 가끔 나만 이래도 되나 합니다. 답도 없이, 그런 물음들이 쌓여갈 때가 있지요. 그 양극의 괴리가 쌓여가는 것도 같습니다.
인스타그램을 보다 맛있는 음식에 좋아요를 표시하는 것도 실은 내일 메뉴 선택 이외에 별 도움이 안 되지, 그저 내 욕망의 게임이지 하면,(이 욕망의 게임이 요새 콘텐츠 산업의 한 축이기도 하지요) 이 시나 음악이나 고양이나 바다 같은 이 리듬을 좋아하는 것도 또한 내 욕망의 한 축일 테지요. 이 리듬 속에서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누구나 행복은 다르고 이게 내 행복이라면요.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삶에
시나 고양이, 음악, 바다를 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강릉은 이런 리듬에 적합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삶을 받아들이는 일은 중요하므로, 강릉으로 온 것은 아주 잘한 선택이었던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