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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Jul 31. 2021

나무와 물결의 자세로 자라네

강릉에 온 지 거의 1년이 되어 갑니다. 1년 동안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무와 물결의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하겠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 많이 본 것들이지요.  


 


수영을 여전히 잘 하지는 못하지만 며칠의 특훈으로 이제 구명조끼를 입는 대신 구명조끼에 손을 얹고 바다에서 엎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부력으로 뜨는 법은 아직 어렵지만요. 내가 떠있다는 놀라움도 있지만, 바다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물결이 엄청나게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되기 전 물결은 같은 양으로 너울됩니다. 많거나 적지도 않게 시야 속에서 공평하게 물결이 너울대는 것을 보고 있으면,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파도란 무섭습니다. 어느 날 해일이 되기도 할 수 있는, 그 힘을 안고서 저렇게 평화롭게 일렁이는 물결을 보고 있다 보면 아, 저 자세로 모든 것을 넘어가면 좋겠다, 싶어집니다. 바위를 넘고 멀리서 아무것 아니라는 듯 밀려오는 물결, 아름답고 평화롭고 강한 그 힘을 안고 살아야겠다, 싶어집니다.  예전에는 파도가 정말 신기했습니다. 어디서 와서 저렇게 물가인지 어디인지 모를 곳을 치고 다시 가는 걸까, 해서요. 그런데 여기서 매일 물을 보다 보니, 파도도 신기하지만, 늘 일렁이는 물결, 그 균등하고 균일하며 지속적인, 쉴 새 없는, 물결이야말로 놀라운 것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시작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다음 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관성을 물리칠 만한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나지 않아 서성이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물결처럼 그렇게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다음으로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 세상의 이해할 수 없거나 자잘한 부족도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예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면 어떤 어려움들은 좀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졌습니다. 물결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며 하게 된 생각입니다.  

 


나무가 곧게 뻗어나가는 힘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빛과 물, 토양의 양분을 얻어 제 몸을 키우고 가지를 뻗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소리 없이 자기 자리에서 단단해지고 있는 그 힘이 세상천지에 가득합니다. 아래로는 뿌리를, 위로는 잎과 가지를 단단히 하는 나무가 여기저기 너무 흔해 잘 보지 않게 되지만, 정말 천지삐까리지요.  



소나무는 가지 하나가 한 살이라고 합니다. 솔숲에 가면 여기저기 아주 작은 소나무들이 보이는데요, 그런 어린 나무들은 가지를 보면 나이를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내 키만큼 자라지 않은 소나무는 두세 살의 어린 나무들이지요. 이 가느다랗고 여린 나무가 자라서 저렇게 키를 키우는 동안의 그 힘과 인내와 생명력을 생각해보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제 자리에서 꿋꿋하게 자기 생명을 틔우기까지의 그 추동력,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나무는 매일 자라고 매년 자라고 어느날 보면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한 숲이 되어있는, 그 놀라운 힘을 안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가 커보이면 그제야 내가 작아보이게 되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내게 뚜렷한 존재가 되고 그럴수록 상대가 커보이며 오히려 내가 더 작아지는, 이 사랑의 원근법이란 참 신기하지요. 각자 지구의 한 지점을 겨우 점유한,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는 작은 인간인데도 어느 순간 그는 거인 같고 나는 아주 작은 난쟁이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름은 밀과 보리이고요, 그러므로 집에서는 밀과 보리가 매일 자라는 중입니다. 세상에 아주 많은 고양이가 있고, 그 아이들도 모두 귀엽고 귀하지만, 나는 밀과 보리의 표정에 대해서는 아주 능통합니다. 이 아이들의 표정이나 목소리를 들으면 어느 정도 기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 이 아이들의 이렇게나 많은 표정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겠구나 싶어집니다. 이웃주민들도 고양이들을 키우고 있어, 이웃주민들의 고양이도 꽤 되는데요, 물론 걔네들과도 다 친하게 지내지만 그래도 그 아이들의 표정이 어떤지는 많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과 보리의 천만 가지 표정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우리집 밀과 보리는 둘 다 눈이 왕방울만한데 왜 다른 고양이들은 눈이 왕방울만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인데요. 알고 보면 그 집 고양이들도 다 자기가 왕방울만한 눈으로 눈을 맞추고 싶을 때는 눈이 왕방울만해지는데 나랑은 아직 그렇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고양이 눈 속에 들어있는 나를 볼 때 기분이 참 묘합니다. 눈이란 참 신기해서, 그 눈 속에 들어있는 내가 보이지요. 거울이 없었다면 아마 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은 상대의 눈이었을 겁니다. 가끔 그렇게 고양이 눈을 들여다보다보면, 아 이렇게 상대의 눈 속에 들어있는 나를 볼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사랑인가 싶어집니다. 그 거리에 다다르면 더는 상대가 커보이고 내가 작아보이지 않는, 동등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나는 그동안 얼마나 누군가의 눈 속에 들어있는 나를 볼 정도로 거리를 좁혀보았던가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거리를 좁혀 질문하고 싶어지고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게 시작이 아닐까, 그리고 생텍쥐뻬리의 어린왕자와 꽃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역시 명작이군 싶어지지요. 어린왕자의 별에 있는 한 송이 장미, 그 장미와의 관계는 때로 삐툴어지기도 하나, 그 장미는 모든 장미와 같아 보이지만 유일한 장미라는, 그래서 어린왕자는 장미를 돌보러 자기 별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니요.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며 그런 오만 가지 감정을 다 느끼고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종종 참 대단한 이야기구나 싶어집니다.   



중력이라는 것, 실은 모든 물체는 힘이 있다고 하지요. 자기 체적만큼 끌어당기는 힘을 중력이라 하고, 태양계는 그 힘의 균형으로 움직이고 매일 해가 뜨고 달이 뜹니다. 우리도 실은 각자의 중력을 가진 것일 텐데, 그 힘이란 무얼까,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힘, 그 힘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그 힘을 더는 내고 싶지 않을 때, 멀어지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어린왕자와 장미는 왜 서로를 끌어당기게 된 걸까, 우리 밀과 보리와 나는 어쩌다 서로를 이렇게 끌어당기게 된 건가, 이것을 인연이라 해야 하나, 우연이라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오늘 ‘코스모스’를 보아서이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이 책은 꼭 읽어봐야지 했는데, 시간의 이유였는지 핑계였는지 읽지 않다가,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려와 오늘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꽂이에는 책이 많고, 왠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영어로 읽으면 영어 공부도 하고 과학도 알고 이런 기분으로 영어 원서를 사다 놨으나, 엄청난 욕심임을 깨닫고 원서에 먼지가 쌓여가던 중, 이 기간 동안 꼭 해야 할 독서라면 ‘코스모스’겠구나 싶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주가 왜 생겼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 이 한 점을 점유한 우리는 누구인지, 그런 질문들이 가득한 책이지요. 이 우주의 원리와 인간사의 원리가 전혀 달라보이지만, 실은 결국 우주를 이룬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달을 보러 주문진 방파제에 다녀왔습니다. 오늘 달이 뜨는 시간은 저녁 11시 14분이라기에 10시에 나가서 10시 반 조금 넘어 주문진 방파제에 도착해 달 뜨기를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책을 가져가도 어두워서 볼 수 없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해 책을 가져올 걸 하다가 이북을 잠시 보다보니 11시 14분이 되었습니다. 달 뜨는 게 멋지게 보일 것 같아 주문진 방파제로 1만보를 걸을 겸 갔으나, 11시 14분이 되어도 달은 뜨지 않았습니다. 실은 달은 떠오르고 있으나 구름이 껴서 달이 보이지 않는 것일 테지요. 점점 시간이 가고 그래도 달이 보이지 않아 그냥 걸어 돌아왔는데요. 꼭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아, 물결처럼, 그래, 하며 물결을 보며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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