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호혼을 혜령에게 선물 받은 것은 10년전 즈음이다. 연희동이었나 싶었는데 석관동에서도 노호혼이 있었지 싶기도 하다. 석관동 옥탑방. 살았던 모든 집은 대부분 잊을 수 없지만 석관동 옥탑방은… 그때 나는 막 이십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그 보증금 400인지 300인지에 월세 10인지 12만원인지 하는 옥탑방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학교 바로 앞이라는 게 장점이었고 그보다 더한 장점은 월세가 싸다는 거였다. 거의 처음으로 혼자 산 집이었다.
그 전에는 친구들과 살고 매일 누군가가 놀러와서 내가 누구랑 사는 지도 모르는 집에 살았거나 적어도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서 혼자 먹는 음식은 삼각김밥밖에 없었다, 술안주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더라도 누군가랑 함께 식사를 했고 그 이후에는 음식을 전공하는 친구와 살며 와 사람은 이렇게 점심에 콩나물밥을 해먹고 저녁에는 또 다른 음식을 해먹고 사는 구나 감탄도 하다, 처음으로 혼자 살았던 집은 월세 12만원짜리 옥탑방이었다. 심지어 그 건물 세대마다 주인도 다 달라 내 주인은 마음 좋은 아저씨였는데, 그가 꾸던 재개발의 꿈은 내가 집을 떠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고, 그는 계약하던 날인가 한번 딱한 눈으로 나를 보았던 것도 같고, 내가 그를 마음 좋은 사람이라 기억하는 것은 어느 추운 날 배수관이 터져(수업 도중 전화가 왔었다ㅠ) 연락을 하니 미안해하였던가 알아서 수리를 부담하겠다는 그 느낌이다. 다음 집에 살 때는 보일러가 고장나자 반반씩 부담하자는 주인을 만났었다.
그러니까 그 석관동 옥탑방, 여름이나 겨울에는 덥거나 추워서 도서관이나 찜질방에서 잘 수밖에 없던 그 옥탑방에서 나는 처음으로 와 하늘이 이렇게 하루에도 달라지는구나 알았고 어떤 날은 부근에 살던 나랑 비슷한 처지였을 전통예술원에 다닐 친구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앉아있거나 또 어떤 날은 조금은 정신이 나간 여자의 연설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국제정세를 동원한 탄식을 듣거나 또 그도 아니면 반투명유리에 비치는 어떤 아마 그 역시 나랑 비슷한 처지일 청년이 알몸으로 목욕하는 것을 보며 우리집 반투명유리 화장실 혹은 목욕탕에 구름 무늬 물에 젖지 않는 벽지를 발라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저 사람은 자기가 목욕하는 것을 누군가 대충 보게 된다는 것을 알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고는 했다. 어떤 날은 새벽에 조립식 책장을 조립했고, 또 어떤 날은 가만히 앉아 별이 지나가는 거나 구름이 지나가는 거나 보기도 했는데, 하늘이 너무 변화무쌍해서 늘 놀랐던 그 석관동 옥탑방. 어떤 날 새벽에 일어나니, 어느 노부부가 불경 같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 아 이걸 시로 써야는데 하기도 했었는데…
어떤 날은 거기 아이들이 버려진 쓰레기더미에서 주운 립스틱을 바르고 보자기를 둘러메고 있던, 그러나 아이들보다 노인들이 더 많던 석관동 옥탑방, 거기서 나는 야금야금 자라났는데, 혜령이가 준 노호혼은 그때 거기서도 낮에는 집에 있을 일이 별로 없던 때 볕을 받으면 고개를 끄덕댔었나. 기억나는 건, 노호혼에 밭도 있어 씨앗 같은 것을 심었고 거기 씨앗이 잎을 틔우고 나는 그게 참 신기했었지. 무싹인가는 맛도 있었는데 하는 기억은 석관동일까, 연희동일까. 그때 나는 아직 서른이 되지 못했는데, 그때도 딱히 영악하지는 못해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지 혼자 뭘 해보겠다고 학교 도서관 집 그 1km 사이를 오가고, 그마저 지루하면 때로 그 앞에 석계천인가로 자전거를 타고 망우리까지 갔다오고 거기 코스모스며 벚꽃을 신기해하고 또 어떤 날은 돈을 벌겠다고 지하철을 타고 강남에 가서는 매일 버스, 지하철을 타고 졸다 내릴 데를 놓치며 살았지. 늘 졸리고 불행했던 것도 같고 행복했던 것도 같던 20대, 지금이라면 차라리, 그냥 대충 돈 버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 것을 꿈꿔 보는 것은 어떠니, 여름 겨울에 덥거나 추워서 못 자는 집에는 살지 않게 해줄 만한 누군가를 만나서 가족을 이루지는 않을래, 말하면 그때의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영화의 이해라는 영상이론과 수업이 있었다. 라깡학파의 교수님 수업이었는데 좋아해서 청강이었는지 겨우 들은 건지 그 수업을 들었을 때, 9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이었는데, 어쨌든 꽤 재밌게 들었다.(심지어 그 과 애들은 아침 수업이라 나올지 않는 애들도 많았는데) 라깡학파 선생님답게 교재는 대부분 영어복사본 논문으로 했다. 영어시험을 보고 들어왔으나 다른 데 비해 평균이 50점이 낮다던 원 소속인 나는 자주 도서관에서 그 논문을 보다 머리가 터져라 했는데,(그 덕인지 지금도 영어시험보면 리딩이 그나마 낫다) 그때 내가 쓴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리포트를 다시 보며(무려 10포인트 6페이지 정도다) 거의 이해할 수 없군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지금은 1-2장으로 그보다 더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때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하며 그 리포트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간단히 말하자면, 직업의 세계에서도 너의 이름을 잃지 말기를 바란다는 노년의 작가가 아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이제는 보인다. 그 시절 지금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리포트 6장을 써내던 내게 이봐, 너는 말이야 나이 마흔이 다 돼서 이러이러할 거야 그러니 지금 이 동네 유행 패션이지만 실은 20대 여자가 입기는 별로인 추리닝 대신 좀 더 예쁜 치마를 입고 좀 더 화려한 데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노력을 해볼래 라고 하면 20대 후반의 나는 귀를 기울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이건 노호혼 얘기였는데, 오랜만에 집안 물청소를 하며 이 노호혼은 내가 없을 때도 매일 이렇게 고개를 끄덕였겠지, 벌써 몇 집째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며 앞으로 또 몇몇 새로운 집에서 고개를 끄덕일까 하는, 아주 가끔 주말에 청소할 때 들여다보게 되는 노호혼 이야기.
돈 안 벌고 지내던 무렵 더는 이래선 안되겠다며 자주 가던 홍대 만화카페 가서 알바 구하지 않냐며 호기당당 묻던 그때 20대 후반인가의 나. 호기당당함이 좋아서였는지 그 카페는 나를 딱히 ‘알바구함’도 붙여놓은 적 없음에도 알바로 채용했으나 손님이 거의 없는 날은 알바비를 받을 수가 없어 일당이던 알바비를 내미는 손에 웃으며 됐다며 그냥 돌아오곤 했었다. 지금이라도 나는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