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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부부 Oct 12. 2021

임신, 어디까지 가봤니? 삼신할아버지를 만나다

아내, B 이야기 - 난임한의원


    난생처음 배 주사라는 것을 맞아가면서 시도했던 인공수정 3차. 원래 스케줄대로 라면 배란일 14일째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고 결과를 확인해야겠지만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난임 부부에게 14일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나는 이번에도 배란 10일째부터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얼리 테스트기에 손을 대고야 말았고 일찍부터 ‘이번에도 역시 실패구나’ 하는 절망의 늪에 빠져 지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엄마와 카톡으로 대화를 하다가 우리 부부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담그게 된다.    

 

‘딸~ 점심 먹었어? 엄마는 오늘 피자 시켜 먹었지’
‘응~ 근데 그냥 대충 먹었어요. 요즘 속이 좀 별로예요.’
‘전에도 그러더니 계속 그래? 혹시 임신 아니니?’
‘아니. 아니에요. 엄마, 나 사실 M병원 다니고 있어요. 임신할려고. 근데 계속 안 되네. 나도 임신이 너무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 왜 그럴까.’    


    대학 입학 후 집을 떠나 지낸 지도 10년째. 멀리 살아서 주로 전화와 메시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우리 가족에게는 ‘좋은 소식만 전하기’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물론 시시콜콜하게 ‘오늘은 사이코 같은 사람이랑 통화해서 힘들었어요’라거나 ‘오늘 점심은 너무 맛이 없었어요.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단 잘 만들겠다.’ 같은 자잘한 불만들이 오르내리는 일은 흔했다. 하지만 이런 대형 폭탄이 우리의 대화방에 오를 일은 없었다. 부모님에게 나는 적어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딸’이어야 했다.

    엄마는 우리 부부가 임신에 이렇게 열심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 ‘요즘 세대답게 신혼을 즐기고 최대한 늦게 아이를 낳을 건가 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점심 메뉴로 시작한 우리의 평범한 대화는 나의 폭탄 투척으로 한동안 침묵으로 뒤덮였다. 잠시 뒤 엄마는 어떤 시술 중이었는지, 어디까지 시도했는지 구체적으로 묻지도 않고 마치 가까이서 나의 모든 걸 지켜본 사람처럼 내게 하나의 제안을 던졌다.




“안 되겠다. 경주에 임신 잘 되게 하는 용한 한의원이 있다던데 엄마랑 한번 가볼래? 엄마 친구 딸도 2년간 애가 안 생겨서 거길 갔는데 딱 생겼대잖아.”     


    학창시절에도 없는 엄친딸과 비교를 당한 데다 ‘한약은 자궁근종을 키운다.’라는 소문을 익히 들은 터라 처음에는 ‘한약은 괜찮아요. 그리고 그런 데는 서울에도 많을 거예요’라는 말로 엄마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나는 몇 시간 뒤 마음을 바꿔 경주로 가는 기차표, 한의원 근처에 묵을 숙소를 예약했다. 마음을 바꾼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인공수정이 이번에도 실패로 끝난다면 분명 또 한 달에서 두 달은 쉬어야 할 텐데 그 기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임신을 위해 더 해볼 수 있는 게 남았다면 그게 무엇이든 해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둘째, 이걸 핑계 삼아서라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엄마의 위로가 받고 싶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M병원도 D한의원도 아닌 엄마의 품속이었다.

엄마에게 경주 D한의원을 가겠다는 결심을 전하자 예상대로 엄마는 일요일 아침 일찍 나를 보러 경주로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와 신랑, 엄마와 아빠는 계획에도 없던 경주에서 가족 회동을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나와 남편은 인공수정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M병원에서 피검사를 한 뒤 바로 경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경주에 KTX 기차역이 생긴 건 천만다행이었다. 2시간 30분도 되지 않아 우리 부부는 경주에 도착했다. 경주역에서 D한의원까지는 차로 25분, 버스로는 약 40분이 걸린다. 우리는 먼저 D한의원 인근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놀러 온 것도 아닌데 근처 국밥집에서 대충 때우고 들어가서 쉴까 했었지만, 마음을 바꿔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난 유명맛집과 황리단길 길거리 간식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밥은 그냥 대충 먹자는 나를 맛집으로 이끈 남편. 줄까지 서서 들어간 맛집에서 식사를 하니 걱정없이 그저 즐겁기위해 여행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늦여름 경주의 저녁은 선선했다. 저녁 데이트를 즐기며 웃고 있는 연인들 사이를 걸으니, 우리의 연애 시절이 떠올랐고 그동안 너무 임신에만 목매서 우리의 추억을 쌓는 일은 소홀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상’을 위해 의무적으로 걷는 게 아닌 목적 없는 산책이 기분을 환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 D한의원 앞을 힐끗 바라보니 아직 밤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대기자로 보이는 분들이 보였다. D한의원은 이쪽 세계에서는 TV에도 여러 번 나올 정도로 전국구로 유명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하다는 할아버지 원장님은 주말 오전에만 진료를 보기 때문에 금요일 밤, 토요일 밤에는 진료를 위한 대기 줄이 늘어선다. 토요일 저녁에 쪽잠을 잔 뒤 새벽에 나가볼까 했던 우리는 다급한 마음에 교대로 한의원 앞에서 밤샘을 하기로 했다. 먼저 스타트를 끊은 사람은 나였다.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는데 이미 앞에 대기 중인 분들이 9팀이나 있었다. 처음에는 서먹하게 각자의 위치를 지키던 분들이 몇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앞뒤로 마주 보며 각자의 상황을 얘기하고, 서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나는 평창에서 왔는데, 시험관만 벌써 5번째에요. 내가 나이가 올해 마흔인데 이번에도 안되면 큰일이다 싶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여기까지 왔지 뭐에요.’
‘나는 둘째를 보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첫째 때는 멀쩡하더니 둘째가 너무 힘드네요. 벌써 유산만 2번째인데, 형님이 여기서 약 지어 먹고 애를 가졌다길래 나도 왔죠.’


     임신 얘기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직장 얘기, 시댁 얘기 등 절친한 사이에서나 나올법한 주제로 몇 시간 째 이어졌다. 임신으로 전전긍긍하는 시간 동안 혹시나 예민하게 반응하게 될까 봐, 혹시나 상처를 받게 될까 봐 친구도 만나지 않고 외출을 꺼려왔던 나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아마 저분들도 그간 숱한 이야기들을 마음에만 담아 두었으리라…….


D한의원 앞에서 지샌 밤. 그날 밤하늘은 별조차 없었지만, 각자 들고나온 휴대폰과 랜턴 불빛 등으로 어두울 틈이 없었다.


    이 밤의 끝에서 D한의원 앞은 그렇게 각자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대화가 쌓여갔다. 어쩌면 이 대화들이 D한의원 유명세의 근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수정 3회, 나이 서른인 나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힘든 상황을 견디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나는 내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새벽 3시쯤 잠깐 숙소에서 쪽잠을 잔 남편이 나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교대로 한의원 앞을 지킨 덕분에 우리 부부는 다음 날 아침 10번째 순서로 그 유명한 삼신 할아버지 ‘D한의원 원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난임 치료로 유명한 병원들은 양방, 한방을 가리지 않고 ‘기다림은 길고, 진료는 짧다.’라는 불변의 운영법칙을 따르기라도 하는 걸까. 밤샘 기다림은 우리에게 10분 진료로 돌아왔다.

    한의원 앞에서 나는 엄마, 아빠와 진한 포옹을 나누고 잠시 대기한 뒤 진료실로 안내받았다. D한의원의 진료실은 일반 병원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청진기가 놓여있어야 할 책상에 작은 쿠션이 놓여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나와 남편은 차례로 그 쿠션 앞 의자에 앉아 할아버지 원장님께 손목을 내밀었다. 조선 시대 어의처럼 맥을 짚고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의사 선생님을 보니 진료를 받고 있다기보다는 정말 삼신 할아버지를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도 들었다.

      

“ 그간 냉이 많지 않았습니까? 자궁 내 염증이 많고, 자궁이 차서 그런 것 같으니 약 한재 지어 드시면 괜찮아 지실 겁니다. 남편분은 허리가 자주 아프진 않았습니까? 남편분이 허리가 많이 안 좋은 편이라 같이 약을 써야 할 것 같네요. 남편분은 드셔보시고 괜찮으면 한재 더 지어 드셔도 좋습니다. 약은 진맥 본 걸 토대로 잘 써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어찌 들으면 손바닥을 '탁' 칠 듯 명쾌한 해답, 어찌 들으면 아무에게나 통할법한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이 대답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접수처 간호사 선생님께 복약 지도를 받고 결제를 마치고 나오자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있었다. 엄마는 도망치듯 올라가려는 우리 부부의 손을 잡고 한의원 근처 밥집으로, 밥을 먹고 난 뒤에는 동궁과 월지의 연꽃밭으로 이끌었다. 어색해하는 나를 배려해서일까. 엄마와 아빠는 ‘임신’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그저 양옆에서 내 손을 꼬옥 잡고 함께 걸어주셨다. 손끝으로 엄마 아빠의 온기가 전해졌다. 너무 차서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내 자궁으로 기어코 따뜻함을 보내주기라도 할 듯 엄마는 오래도록 내 손을 잡고 계셨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걷는 나.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엄마아빠 앞에서 나는 어린이가 된다.


    오랜만에 느끼는 엄마 아빠의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족히 두 달은 버틸 수 있을 따뜻함을 안고 나는 다시 서울행 기차로 몸을 실었다. 어쩌면 엄마가 된다는 건 딸에게 나눠줄 수 있는 따뜻함을 지닐 때나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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