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스포츠=구민승기자 ] 누군가 나를 전적으로 믿어준다면 없던 힘도 생기기 마련이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스포츠 세계와 연예계에서는 ‘믿음’은 돈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인을 가장 잘 알고, 믿어주는 소속사 또는 소속팀을 만나면 그 사람은 날개를 펴고 날아간다.
연예인의 경우 자신과 잘 맞지 않았던 소속사와 결별한 이후 자신과 생각이 같고 뜻이 같은 소속사를 만나면 좋은 시너지를 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스포츠 선수들은 연예인들과는 달리 소속팀을 옮기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우연히 찾아온 기회들을 잡아 스타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믿음’을 얻어 성장한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에는 누가 있을까. 스포츠 스타 2명과 연예인 2명을 통해 알아보자.
1) ‘나 홈런 치는 4번이야’ - 박병호
박병호는 성남고등학교 시절 최초로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많은 관심 속에 계약금 3억 3천만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1차 지명으로 LG트윈스에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았던 탓일까. 박병호는 2005년 2006년 2년 동안 1군 127경기에 나와 8홈런(타율 0.177)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그때 당시 LG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기대를 받고 팀에 기용됐지만, 어린 나이라 기대감이 부담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여기에 박병호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때 격려가 아닌 차가운 1군의 무대를 느끼면서 위축됐다.
2006년 11월 박병호는 빠르게 상무에 입단했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상무에 있으면서 중심타자로 활약했지만, 다시 LG로 돌아왔을 때는 그에게 주어진 1군의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제대 이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2군을 전전했고, 2011년 심수창과 함께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 됐다.
박병호는 이장석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라인업에 매번 라인업에 올려 자신감과 함께 숨어 있던 포텐이 터지길 기다려줬다. 2011년 후반기에만 12개의 홈런과 함께 타율 0.265로 기대만큼의 성적을 보여주길 시작했다.
2011년 후반기를 기준으로 박병호는 전폭적인 믿음과 체계적인 관리를 받은 끝에 넥센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타자로 성장했다. 올 시즌이 끝나면 메이저리그를 진출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박병호는 ‘믿음’을 얻으며 날개를 활짝 폈다.
박병호는 이제부터 더 높은 꿈을 향해 달려 나갈 예정이다. 과연 메이저리그에서도 넥센처럼 ‘믿음’ 아래 성공적인 시즌을 보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2) ‘아시아 최고의 롤모델’ - 박지성
21세기 아시아에서 최고의 운동선수를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 박지성이 아닐까 싶다. 박지성은 왜소한 신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독들의 플랜에 매번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빈 결과 1명이 아닌 3명의 조력자를 만날 수 있었다.
박지성은 명지대학교를 휴학한 뒤 본인에게 스카웃 제의를 보낸 교토 퍼플 상가에게 연봉 5000만엔과 함께 주전급 대우를 받았다. 박지성은 팀이 2부로 강등이 돼도 잔류하며 팀이 다시 1부로 올라갈 수 있게끔 맹활약을 펼쳤고, FA컵 결승전에서 2-1 역전에 큰 기여를 하는 등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때 거스 히딩크 감독은 당시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박지성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시켰다.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박지성 선발에 대해서 왈가왈부가 많았지만, 박지성은 경기력으로 많았던 우려를 한 번에 씻어냈다.
대한민국을 4강으로 이끈 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고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했다. 비록 시즌 초반 극심한 슬럼프를 겪으며 홈팬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지만,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의 믿음 아래 페이스를 올리는데 성공했다.
04-05시즌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8강, 4강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눈에 들었다. 2006년 6월 22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입단 후 퍼거슨 감독의 믿음 아래 박지성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나가며 호날두와 긱스와 번갈아가면서 출전을 했다. 06-07시즌 리그 경기의 1/4를 출전하면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을 받는 등 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수가 됐다.
이후 박지성은 ‘수비형 윙어’라는 새로운 포지션을 만들어내는 등 맨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됐다. 특히 UEFA 등 중요한 경기에서 상대팀 핵심 플레이어를 맡은 중요한 역할을 맡아 팀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박지성은 수많은 맨유의 역사적인 경기를 함께 하는 등 핵심선수가 됐고, 이후 QPR에서 주장을 맡았고, PSV 에인트호번에 1년 임대가 되는 등 마지막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박지성은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감독을 만나 그라운드를 마음껏 누볐다. 그 결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축구선수가 됐고, 올해부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엠버서더로 활약하고 있다.
3) ‘싱어송라이터에서 배우까지’ - 아이유
학창시절 아이유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아이유는 가수가 되기 위해 20여 차례 소속사에서 오디션을 봤지만, 그녀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깐 굿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을 거쳐 최갑원 프로듀서의 도움으로 로엔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때 당시 1년도 지나지 않은 15살의 나이에 정식 데뷔를 했다. 하동균과 거미의 지지와 함께 로엔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의 믿음 아래 그녀는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싱어송라이터로 가능성을 보여준 아이유는 2008년 <미아>라는 곡을 냈지만, 대중들의 귀를 사로 잡는데는 실패했다. 그 이후 <Boo>라는 곡을 냈지만, 정작 그녀가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은 ‘동영상’이 발단이 됐다.
‘MR제거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아이유는 가창력을 인정받았고, 인상적인 기타실력으로 매력을 어필하는데 성공하며 대중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 이름을 알린 뒤 2010년 <잔소리>라는 노래로 1위를 수상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지금의 아이유를 있게 만든 <좋은 날>의 3단 고음이 나오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연기와 함께 좋은 노래들을 내면서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5살의 아이유를 알아보고 ‘믿음’을 준 회사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무한도전에서 <레옹>을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4) ‘예승아~’ - 류승룡
류승룡은 2011년 프레인TPC와 만나기 전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였지만, 유명한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1년 프레인TPC를 만난 이후 <최종병기 활>, <내 아내의 모든 것>으로 대중들에게 본인의 연기실력을 입증해내며 영화계에 필요한 배우가 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류승룡은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으로 4연속 남우 주조연상을 받는데 성공하는 등 탄탄한 입지를 가지게 됐다. 이렇게 매번 하는 작품마다 잘되면서 류승룡은 영화계에서 흥행보증수표로 불리며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다.
비록 그 이후 개봉한 <표적>, <손님>은 흥행은 되지 못했지만, 류승룡이라는 배우는 살아남았을 정도로 그의 연기력은 매 영화마다 인상적이었다. 그러던 중 류승룡은 작년 최고의 화제작 <명량>에도 출연하면서 천만 영화를 여러 작품을 하는 배우가 됐다.
이처럼 류승룡은 자신의 연기관을 믿어주고, 자신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권한들을 주면서 성장시켰다. 여기에 여준영 대표는 프레인의 주식을 주는 등 ‘소속감’을 주면서 배우에게 동기부여를 확실하게 넣어줬다.
이처럼 류승룡은 프레인의 대표 여준영 대표를 만나 ‘믿음’ 아래 최고의 한국 영화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과연 류승룡의 연기로 한국 영화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사진> 홍성호기자, 오뚜기, 로엔엔터테인먼트, 프레인TP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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