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아주 미련한 기질이 하나 있다. 말 그대로 너무 미련해서 숨기는 것이 인생사 더 나을진대 글로 표현하는 이유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아니면 말고)
그 못난 기질은 바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전자를 선택한다."는 것. 너무 고상하게 표현했다. 조금 더 껍질을 까면 "단순한 게으름 때문에 생리적인 현상을 인내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no.1) 깼을 때, 맞다. 나는 보통의 경우 - 폭풍이 아니라면 - 현상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기보다 다시 잠들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나만 이래?)
마요르 광장에서도 그랬다. 겉바속쫄(깃) 깔라마레즈를 먹다 텁텁해지는 목구멍이 "가뭄이오!" 하고 외쳐도 일단 지금 쏟아지고 있는 마드리드의 햇살과 지금 눈에 담긴 빨간 벽돌의 경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맞다. 마실 것을 사들고 다시 자리하면 된다. 하지만! 마실 것을 사러 갔다가 돌아왔을 때의 경치는 과거에서부터 이 순간까지 내가 즐기고 있었던 효용의 연속성을 끊어내고 공백을 만든 후에 다시 시작되는 것이기에 그 전과 후는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오! 수치스러운 게으름이여!)
그래도 화장실 타이밍을 놓치면 오히려 편해지는 것처럼 타들어 가는 목마름도 적정 시간 이후에는 또 견딜만한 것이 된다. 그렇게 나는 마요르 광장에서도 게으름 신과 한 껏 영접한 상태로 한 시간 정도 더 앉아 사람 구경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이 사람 구경 아니니? 뭔 시간 낭비냐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게 진짜 리얼리티잖아!)
산 미구엘 마켓에 나와서 마주쳤던 '팔찌 아저씨' 보다 훨씬 더 악질인 사람의 행동을 가만히 관찰하는데 재밌었다. 그가 선택하는 사람은 무조건 혼자 혹은 많아도 세 명 정도로 구성된 여자들이었다.
(1) 다가가 스몰토크를 나누고 팔찌를 보여준다.
(2) 구매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지만 훑어 보라며 옵션들을 보여준다.
(3) '이쁘네요' 하는 순간 팔찌를 직접 착용해 보라고 권한다.
(4) 가려고 하면 그냥 주는 거라며 거짓말한다.
(5) 진짜 그냥 주는 거냐고 반복해서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 대신 팔찌를 채워준다.
(6)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값을 부르기 시작한다.
(7) 모두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참고로 앉아있던 한 시간 동안 팔찌를 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명이 비슷한 전략으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성공률이 유효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도 나처럼 게으름 신과 영접해서 '현재'의 편안함에 갇혀있는 것일까. 아무튼 그들의 친구가 된다면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연인을 공략해야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몇 푼도 못 쓰는 사람 취급받기 싫어서 지갑을 여는 거대한 에고의 휴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펠리페 3세 기마상 주위로 비보잉을 하는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광장의 품격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의 음향으로 멋들어지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정말 볼 만했다. 오히려 관현악단의 연주가 아닌 비보잉이라 배경과의 그 부조화 속에 조화로움이 정말 좋았다. 마치 예상치 못했으나 골목 어귀에서 첼로 연주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도 금세 원을 만들고 놀라운 몸놀림에 박수를 쳤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몸을 요래 요래 팍!팍!’
그런데 마드리드 주정부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경찰이 탄 오토바이 두 대가 와서 스피커를 끄고 공연을 멈출 것을 권했다. 아쉬웠다. 다들 즐기고 있었는데. 그래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 인정.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이렇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마요르 광장 자체가 거대한 연극 무대인 것처럼.
'아. 근데. 나 이제 진짜 물 좀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