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기에 다가가는 그 걸음걸음이 설레었다. 마치 불같이 사랑했던 그 남자를 다시 한번 더 만나러 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잘 지내고 있니이이 (주체 없는 이 아우성 뭐니?)
사실 이 번 여행을 시작하기 전 "마드리드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것" 5가지를 적어봤는데 그중 제일 첫 번째가 바로 "마요르 광장에 앉아 보까디요를 먹으며 사람 구경하기"였다. 꼭 해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이제 막 그것을 해보려고 할 때의 마음의 진동은 정말 돈 주고 살 수 없는 감정이다.
설레고 기쁘고 황홀한 마음에 촐랑촐랑해진 발걸음이 민망해서 일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고 억지로 발걸음에 무게를 실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 몸이 이렇게 가벼운 적이 있었나. 광대가 이렇게 승천한 적이 있었나. 볼따귀에 불긋한 과즙은 또 얼마만인가.
(꼬르륵)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고 펠리페 3세 기마상 가까이서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고 난 후에 알아챘다. 온몸이 다 즐거운 건 아니었다는 것을. 불쌍한 나의 위는 '밥 좀 줘!!!!' 소리 지르며 액 뻠쁘질을 얼마나 했어야 했나. 얼른 그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 미구엘 마켓에서 마요르 광장으로 들어오는 회색 빛 좁다란 길 오른쪽에 아주 유명한 가게가 있다. 이름은, 보까디요 데 깔라마레스 (Bocadillos de Calamares), 가격은 4유로다. 환율을 적용하면 5-6천 원 남짓한 샌드위치인데 생각보다 크기가 작지 않아서 여행하면서 한 끼 때우는데 매우 적절하다.
'보까디요'는 '한 입'이라는 뜻으로 음식에 붙이면 '핑거푸드(finger food)'로 이해하면 된다. '깔라마레스'는 '오징어'라는 뜻인데 이 둘을 합쳐 '보까디요 데 깔라마레스'라고 하면 보통은 15-20cm가량의 호기롤 (Hoagie Roll) 빵에 - 바게트보다는 쫄깃하고 일반 빵보다는 바삭할 수 있는 - 링 모양의 오징어 튀김이 한가득 들어가 있는 샌드위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페인어가 전혀 안 되는 나는 "4유로짜리 뽀가디요 데 깔라마레스 하나 주세요!"를 영어로 주문했다. 대충 알아들었겠거니 했는데 짜잔. 영수증에는 16유로가 찍혀있었다. 아무래도 '4유로짜리'라고 말한 것을 '4개'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혼자 여행 중이라 4개는 절대 다 먹을 수도 없고 가방이 작아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크게 제스처를 한 번 취하더니 아저씨는 다른 스태프분들과 뭐라 뭐라 엄청난 스피드로 말을 주고받는데 무조건 내 욕이었을 거다. ㅋㅋㅋ
죄송하고 민망하고 쥐구멍에 숨고 싶었는데 당당하게 쏘아붙이지 않으면 뽀가디요 다발을 들고 다녀야 할 비극이 펼쳐질 것 같아서 기존의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진짜 너무 죄송했고 부끄러웠다. 스페인에 와서 영어나 써 재끼다가 실패하고 마무리는 바디랭귀지라니. 죄송했다.
'쎄뇰, 다음번 여행에서는 기초 스페인어는 무조건 학습하고 올게요. 그때 4개 사 먹을게요. 어떻게 해서든.'
뜨끈한 보까디요를 들고 펠리페 3세 기마상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그림이다. 찬란한 마드리드의 태양을 받으며 빨간 벽돌의 마요르 광장에 앉아 펠리페 3세의 말발굽을 바라보며 오가는 연인들과 친구들과 가족들을 바라본다. 갖 튀겨진 깔라마레스는 그야말로 겉바속촉이었다. 튀김옷이 얇고 파삭하게 그리고 그 안에 오징어 링은 촉촉쩔깃 했다. 캬아. 꿀맛이었다.
'컥!'
된댱. 물을 안 사 왔다. 제대로 자리 잡고 딱 좋다 싶을 때 찾아오는 결핍이란. 휴. 갈수록 오징어는 짭조름함이 짠맛으로, 호기롤의 파삭함은 텁텁함으로 변해갔다. 눈앞에는 시원한 맥주와 음료를 손에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만 보였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도 목마름은 참을 수 없다는 걸 - 파이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 왜 하필 이 순간에 경험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 아니 일어나서 음료를 사 먹으면 되지 하겠으나 딱 좋을 때였단 말이다. 완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순간이었단 말이다. 엉엉.
어디 배달 안 되겠니? 되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