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살이를 결심했다. 힘든 결정은 아니었다. 사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예술가가 아닌 예술 학자가 되고자 했던 나의 20대, 학술회 때문에 간 두 달간의 독일은 나의 첫 해외 경험이었다. 핫 핑크색 베레모와 어그부츠를 신고 종종 대며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니던 나에게 독일은 친절했다.
문을 잡아주고 어디서 왔는지 뭐 하는 중인지 먼저 말 걸어오던 미소 없던 독일인들의 무던한 친절함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처음 받아보는 유럽 매너에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지는 영화 속 여자 주인공)으로 빙의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서양사책에서만 보던 거리와 건물들은 내가 동경하던 베토벤과 클래식 작곡가들의 삶에 한걸음 들어와 만남을 기다리는 것 마냥 설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하는 듯한 시공간을 잊게 만드는 풍경,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 프로의 모습은 영화 속에 들어온 듯했으며, 단원들과의 무대 뒤에서의 리셉션은 동화 속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부럽지 않게 했다.
고난과 역경의 모험 없이도 재미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두 달 동안 독일인만큼 먹고 5kg이 빠져서 돌아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알게 된 30대 시작점에, 밥벌이를 하며 느낀 한계로 나의 커리어를 위해 갔던 밴쿠버에서의 1년은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다. 혼밥을 못해 차라리 굶던 내가 첫 독립을 하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게 되었다.
돈을 아끼려 왕복 한 시간 반 이상 되는 등하굣길을 패션이 아닌 기능화로써 장화를 매일 신고 걸으며 이른 새벽 주택에서 새어 나오던 주황불빛을 따듯하다 여기게 됐고 더불어 날씬한 다리를 경험하기도 했다. 산지 연어의 참맛을 알며 이때부터 지역음식과 제철음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주말 아침에 잉글리시 베이 앞 스타벅스에 바닷가 자리를 차지하러 기특할 정도로 부지런히 다녔다. 밴쿠버의 여름은 길을 걷다가 제시카 알바(2000년대 유명했던 할리우드 배우)를 마주할 만큼 흥미진진한 곳이었다. 그러다 이삼십 년씩 타향살이를 해야 걸리는 줄 알았던 향수병을 10개월 만에 걸렸다. 그렇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일을 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 그 이후로는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에 누구도 모를 이야기가 조금 섞인 뻔한 이야기들로 10년이 흘렀다.
40대, 결혼 10년 차 나에겐 한 개의 역할과 여러 가지 이름만 남아있었다. 하염없이 채워 넣는 게 잘하는 일이라 생각하던 나에게 비움이 필요하다 여기게 된 건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인 것은 확실하다.
전업주부로써 아이들을 키우던 나는 별수 없이 기준치가 높아진다. 내가 걸치는 옷뿐 아니라 아이들이 입는 옷까지 엄마의 센스와 배경으로 평가된다. 나는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만한 센스조차 없는데 말이다. 어린이 집에 보내는 숟가락 통까지 하염없이 서치를 하다가 현타가 오고 마음에 드는 (누가 봐도 마음에 들 만한)것을 찾고나 서야 편하게 잠이 들곤 했다.
부단히 뛰었지만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 없는 지루한 터덜 걸음 같은 내 인생도 뒤돌아보니 어느새 달리기 하는 사람만큼 숨이 차올라 있었다.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왔다. 라오스에 발령받아 지내고 있는 친구였다. 미국인과 결혼해 아이들을 외국에서 키우는 친구네 일상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공통사가 없었다.
그날은 문화차이로 미국남편과의 힘듦을 토로하던 그녀에게 나는 툭 “안 되겠어. 나 거기로 갈래 애들이랑”이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마치 카페에 마주 앉아 내 메뉴 결정을 기다리는 친구에게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라고 주문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정적 없이 “그래! 와. 잘 생각했다.” 하고 내 주문에 답하듯 말했다. 이 두 마디로 짐을 쌌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생겼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없고, 외국만 나갔다 오면 네이티브처럼 말할 수 있는 언어적 재능 또한 없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말이다.
나의 세상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주는 남편은 나에게 가장 큰 버팀 몫이지만 같이 살아도 함께하는 물리적 시간이 매우 적은 우리의 생활 때문에 기러기를 하기로 결심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루하루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있을까? 채워 넣는 것만이 미덕이고 그것만 할 줄 아는 내가 비우기를 위해 아무것도 안 해도 뭐라 하는 사람 없는 곳에서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곳을 가야겠다.
그런 길이 없다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을 수 있는 곳으로 가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가보기로 했다.
세상에서 제일 조용한 도시 비엔티안, 라오스로 가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