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까지 짐을 싸고 풀고 반복하다 결국 밥솥까지 넣고 잠깐 눈을 붙였다. 습하고 어둑한 여름새벽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며 조용히 공항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계획보다 1년이 미뤄진 라오스행에 코로나 확인서류로 공항에서까지 말썽이다.
식당에 들러 아이들 아침밥 먹이지만 나는 입안이 까끌해 물도 넘어가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얼마 되지 않아 기내식이 나왔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속을 달래려 어쩔 수 없이 기내식을 받았더니 메마른 한 빵에 무엇을 섞어 버무린 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여멀건 크림을 넣은 샌드위치가 나왔다. 나는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노예들이 마른 빵을 받아먹듯 한입 베어 물었는데 맛이 있어 감각들에 불이 켜진 듯 축 처져있던 눈, 코, 입이 위로 살짝 올라간 게 느껴졌다. 무심결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뜻밖에 행운을 만난 양 기분이 좋아진다. 샌드위치 한입에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나도 모르게 새로움에 대한 설렘보다 불안이 훨씬 커져있던 내 안을 들여다본다. 좀 전까지도 입맛이 없었던 게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듯 겨우 바튼 숨을 몰아쉬고 있었기 때문이란 걸 깨닫는다.
어려서부터 엄마는 나에게 “넌 참 태평하구나.”라는 소리를 자주 했다. 해야 할 일을 목전에 두고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사실인 양 대꾸도 않고 눈만 껌뻑거렸다. 머릿속으로는 하염없이 계획을 세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는 나였다. 이번에는 준비하며 실패와 불안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목구멍까지 올라온 불안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동남아에서도 빈민국인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준비할게 많다. 광견병 같은 생소한 예방주사를 수차례 국립의료원에 찾아가 맞아야 했고 국제학교에 넣어야 할 서류도 손수 준비했다. 거기에 유용할 것 같아 2mm의 미학인 한식조리기능사도 땄다. (사실 한국에서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만들던 나는 여기서 이틀에 한 끼 정도 요리 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요란스럽게 요리를 배우러 간다며 남편과 엄마를 들볶던 게 미안할 정도다.)
둘째는 1학년이 되는 터라 입학식은 안 하더라도 첫날을 기념하는 하얀 투피스를 준비했는데 친구는 여기서 지내면 옷에 구멍은 매일 생기고 맨발로 뛰어다니니 좋은 옷, 신발은 가져오지 말라기에 반품과 주문도 여러 번 했다. 이러던 중에 코로나가 심해져 셧다운이 되어 다 내려놓기도 했었다.
1년 반의 준비 끝에 출국 날이 다가올수록 웃음기 없이 굳어진 듯한 시옷자 입모양을 하며 지내오던 내가 샌드위치 한입에 웃음을 보이니 조용하던 아이들이 샌드위치가 정말 맛있다며 신이 나 나에게 말을 붙인다. 내가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나 보다.
다운로드해서 간 영화 한 편을 다 보기도 전에 도착한 비엔티안 공항은 시골에 커다란 버스터미널을 연상시켰다. 숨 쉴 때마다 들어오는 습하고 매캐한 공기가 되레 상쾌하게 느껴졌다. 50미터도 안 되는 게이트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파란 하늘이 가벼운 하얀 구름과 어우러져 트루먼쇼 센트장인 듯 현실감이 없었다.
짐이 많을 것 같다며 친구네 부부는 차 두 대를 가져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30분 내외로 걸리는 작은 도시를 지나가는 동안 친구가 내내 걱정하던 말을 다시 한번 내뱉는다. 마치 추레한 자기 집을 보여준다는 듯 “정말 아무것도 없지? 쉽지 않겠지만 지내다 보면 괜찮을 거야.” 친구가 말한다. 눈에 익은 간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맥도널드, 스타벅스, 피자헛 같은 프랜차이즈를 맛보려면 국경을 넘어야 했기에 친구는 운전을 하며 대신할 만한 곳을 찾아 연신 설명해 준다. 길에 아무도 치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오래된 쓰레기들과 붉은 흙을 빚어 만든 낡은 2층 건물들은 문이 멀쩡하게 붙어있는 게 별로 없다.
오래된 바비인형의 헝클어진 머리칼 같이 도저히 풀릴 기미가 없는 전깃줄들에 눈을 빼앗겨 가다 보니 도로엔 노란, 하얀색 선이 없다. 중앙선도 없는 길을 차들은 무심히 별일 없이 달리고 있다. 사이드 미러도 없이 양쪽 손잡이에 비닐봉지를 주렁주렁 달고 다리는 오토바이들과 남색하의에 하얀 셔츠, 그 위에 빨간 손수건을 돌돌 말아 리본처럼 멘 아이를 아빠가 끌어안아 오토바이에 태우고 신호도 차선도 없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모습에 70년대에 공산당 출근길을 TV로 보는 것 같다. 여기가 글로만 보던 공산국가구나 알 수 있는 시뻘건 상징들이 드문드문 서있다.
이런 곳에서 남편 없이 아이 둘과 3년을 지내야 된다는 생각도 없이 덜컹 거리는 차 속에서 나는 방금 동남아 시골로 여행을 훌쩍 온 사람 마냥 한없이 신이 나서 연신 “좋다, 좋아”를 외치고 있었다. 친구를 안심시키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불안이 사라지니 설렘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라오스의 근처 국가인 태국과 베트남을 두어 차례 가며 느꼈던 화려한 관광지와 근대화된 모습에 느꼈던 아쉬움이 여기엔 없다. 여기엔 뭐가 대체로 없다. 좋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역설적이게 무언가를 하기 위해 찾아 최적의 장소다. 드디어 그런 붉은 흙 땅을 밟고 섰다.
단단하게 결심을 했어도 마음 안에 작은 불안이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지인들이 나를 봤을 때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결심이었음에도 불안은 어디서 생겨 언제 이렇게 크게 자리를 잡다 못해 내 턱밑까지 와있었는지. 샌드위치 한입에 사라질 것이었다는 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