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 만난 인연.
작년 이맘때쯤에는 새로이 알게 된 남자와의 짧은 사랑으로 열병을 앓았는데 올해는 가족을 만나게 된 것 같다.
한창의 가을이 무색할 만큼 한낮의 햇볕이 뜨겁던 지난 10월 16일 일요일.
부산에 사는 친언니네를 방문해서 며칠을 지내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는 아쉬운 마지막 날, 따뜻한 날씨를 핑계 삼아 낮맥에 길맥에 저녁 반주까지, 맥주를 물처럼 마시다 보니 배는 더부룩하고 천천히 오래 마신 술은 취하지도 않고 마지막 날이라는 여운에 '우리 이 밤의 끝을 잡고 달맞이 고개까지 왕복 12km 산책을 하고 오자!' 라며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따라 기분도 살랑살랑, 발걸음도 살랑살랑 걷던 참에 미국에 살러 간 친구에게서 '꿈에 네가 나왔다. 좋은 일을 함께 축하해 줬다.'라며 반가운 메시지가 오고, 낮고도 크게 떠 있는 달이며, 달맞이 고개 산책길은 어쩜 그리 어여쁠까. 좋지 않은 것 하나 없던 그 밤에 언니의 단골 술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칵테일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해서 나왔다.
우리가 그 술집을 지나쳤다면 달라졌을까?
칵테일 한 모금을 들이켰을 즈음 내 옆으로 작고 까만 아기 고양이가 슝 지나갔다. 대왕 고양님들 두 분을 모시고 사는 나로서는 그런 작고 소중한 고양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이 아기 고양이가 덥석 안겨드는 것이 아닌가. 낯선 사람을 경계도 않고 쪼그려 앉은 내 다리 밑으로 자꾸만 파고들고 비비적거리는데 아가의 왼발이 수상쩍다. 가까이, 자세히 보니 왼쪽 앞발이 부어있고 상처가 곪은 건지 딱지도 아닌 것이 덕지덕지 말라붙어있다. 거기다 다리를 절기까지 하니..
딱 봐도 2,3개월 밖에 안된 아기가 어쩌다 발은 다쳐가지고.. 겁도 없이 도로에서 사람에게 툭툭 튀어나오고.. 이걸 어쩌나 그대로 두면 잘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고 구조한다고 해도 나는 내일 서울로 돌아가야 하고 언니는 심한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돌봐 줄 수가 없고.. 오만상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마음씨 따뜻한 우리 언니가 뒷일 걱정 말고 생명부터 살리자며 대뜸 24시 동물 병원을 찾았다.
아, 그래 됐고, 모르겠고, 살고 보자! 이리 와라.
덥석 안고서는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박스를 구해야 한다며 언니의 단골 술집에서 하이네켄 맥주 박스를 얻어와서 아가를 담고 택시를 잡아타고 동물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다친 발을 치료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범백 검사도 하고 심장 사상충 약 애드보킷도 바르고 아기 길냥이 팔자에 없는 동물 병원 체험을 했는데 요 녀석이 기특하게도 세상 이런 순한 고양이 처음 봤다며 한 번을 안 울고 발 내놓으라면 발 내놓고, 엉덩이 내놓으라면 엉덩이 내놓더란다. 살려고 왔구나 네가.
엑스레이 촬영 결과는 뼈가 부러지거나 하는 문제는 없는데 상처 부위에 하얀 점이 찍혀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이 하얀 점은 상처 안에 뭔가가 박힌 것일 수 있는데 지금 당장 마취하고 수술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일단 치료하고 며칠 드레싱을 해주면서 경과를 지켜보다가 진물이 계속 많이 나거나 차도가 없으면 곧바로 병원에 데리고 가서 수술을 하던가 다른 조치를 취하라고 하셨다.
진료를 마치고, 아무 이상이 없기를 이대로 깨끗이 낫기를 바라며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파트 화장실 샤워부스 안에 하룻밤 거처를 만들어주고 (벼룩, 진드기가 있을 경우 대비 또 언니의 고양이 알레르기 유발 방지)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걱정에 잠이 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간택을 당하기는 했는데 이것을 어쩌나. 집에 떡하니 버티고 계시는 고냐미 두 분께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내 경제 능력으로는 우리 셋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애 하나 더 들여서 건사할 수나 있을까. 입양 보낼 곳을 알아볼까. 에라 어떻게든 되려나.
아쉬운 밤의 끝을 잡았더니 길고 긴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부터의 모든 결정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 어떻게든 되어보는 걸로 할까 어쩔까 아가야? (이름도 못 지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