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와 수용의 계절

찬 바람이 뺨을 스치지만 배는 따뜻하다.

by 이잎싹


오늘 대학교 1학년 생활을 함께 한 언니네 집에 놀러 다녀왔다.

언니는 강아지와 함께, 혼자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언니 22살, 나 21살이던 해에 바로 옆집에 각자 자취를 하며 모든 일상을 함께 했다.

둘 다 학교를 일 년 만 다니고 휴학해서 그 후로 같은 동네를 공유한 적은 없다.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서로의 소식을 간간이 나누며 일 년에 한 번, 어떤 때에는 몇 년을 건너뛰고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무늬만 성인이 되어서 세상이 만만하고도 두려웠던 시절, 언니가 없었다면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한 살 언니도 언니라고 맛있는 거 먹이고 싶고 좋은 거 주고 싶고 그런가 보다. 끝이 상한 머리카락도 잘라주고 눕혀놓고 얼굴 마사지도 해주고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주더니 헤어질 때는 기어이 황금향 두 개를 손에 쥐여준다. 언제 만나도 한결같은 언니의 손이 따뜻하고 곁이 아늑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 멀리 시선을 보낸다. 한참 차가워진 바깥공기가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불어 들어온다. 뺨에 닿는 서늘한 기운. 하지만 내 배는 따뜻하다. 오늘 외출하면서 아기 고양이를 슬링백에 담아 데리고 나갔더니 딱 내 배 부근에서 따뜻한 체온을 마구 전해주고 있다. 가방에 손을 넣어 고양이의 뺨과 배를 쓰다듬으니 손도 따뜻해진다.


나에게 이번 가을은 포기와 수용의 시간이다.

기다리던 소식도 응답 없는 마음도 찬 공기와 함께 내 속에서 식어가고 그것 또한 그럴 수 있으니 상심하지 말기로 한다. 이번 겨울도 잘 나기 위해. 나와 내 주변을 잘 지켜야 하기에.


나는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혼자 사는 사람이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일의 끼니가 고민이고 이번 달 월세가 걱정이지만 때때로, 자주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리고 같이 사는 세 고양이에게 작은 행복을, 조용한 웃음을 건네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다.


언니,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단단해졌어. 그런데 단단함이라는 것은 뭘까? 너무 단단하면 휘어져야 할 때 부러질 수도 있잖아? 내 생각에 우리는 전보다 많이 가벼워진 것 같아. 비우고 채우고를 반복하는 중인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쌓고 있는 거 아닐까? 마치 고화작용으로 단단한 암석이 만들어지듯이. 하지만 언제든 부서지고 무너져도 괜찮아. 다시 또 만들면 되니까. 그때도 내가 옆에 있어줄게.


언니가 손만 대면 따뜻함을 나눠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온기를 가득 머금고 버티고 있을게.


또 금방 보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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