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17년의 나

by 이잎싹



연극 연출님이 첫 연습날의 과제로 ‘26살, 27살의 나를 최대한 디테일하게 소개하기’를 내주셨다.


서랍 깊숙한 곳의 다이어리들을 꺼냈다. 뒤죽박죽 엉켜있어서 대충 펼쳐보면서 연도별로 정리를 했다. 2012년~14년까지의 다이어리가 있고 몇 해를 건너뛰고 2018년~22년까지의 다이어리가 다시 이어졌다. 훑어보니 대학생 때의 나는 다이어리 첫 장에 일 년의 계획을 세우고 매달, 매일의 계획을 실천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며 목표를 달성하고 그런 스스로를 뿌듯해하고 칭찬해 주고 또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들도 옮겨 적어두고 친구들의 편지와 해외여행 다녀온 비행기티켓도 모아두었다. 글씨들로 빽빽한 다이어리였다. 올해 다이어리를 보는 듯했다. 나는 내가 느슨하게, 특별한 계획도 없이 지냈었다고 기억했는데 그 당시 나의 생활태도는 지금과 거의 똑같았고 글씨체는 더 가지런했다. 그리고 그 목표들을 다 이루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20대 후반의 다이어리를 펼쳤더니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여백이 아주 많고 휘갈겨 대충 쓴 글자들이 있는데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모습이다. 그 당시 내가 나에게 그래도 억지로 시키킨 했나 보다. 안 버리고 가지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여백이 많은 다이어리였다.


그런데 과제에 필요한 2015년부터 17년까지의 다이어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부모님 계신 본가에 있을 수도 있고... 이사를 다니면서 버렸나... SNS도 18년도 9월부터의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때의 나는 어땠지, 사진이 없나, 기억을 되짚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시기에 아주아주 방황을 했더랬다.

14년도 목표 중에 그 당시 에어전시 계약을 했던 회사랑 '전속계약 체결하기'가 있었다. 12월 말에 전속계약을 체결했고 15년을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했었다. 나보다 훨씬 전문가이신 대표님이 하라면 하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러다 보면 나도 더 많이 배우고 알게 되리라,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 덮어놓고 믿으며 내 목소리를 넣어둔 채 무조건 따랐다. 그런데 눈 감고, 입 닫고, 귀만 열고 있는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그 당시 회사 대표님의 강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스트레스로 계속 쌓였고 항상 위염, 장염, 피부병, 몸살을 앓고 살았다. 그럴수록 의심이 들지 않게 더 외면했고 내가 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해서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는 항상 선택받기를 기다리기만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오직 요구에 맞춰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자신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나는 못생기고 키도 작고 몸매도 별로고 그나마 연기 조금 하는 거 말고는 (그것도 더 잘하는 애들이 훨씬 많지만)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데 말 잘 듣고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니까 대표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도와주시는 거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내가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도 대표님이 만들어준 거라고 들었고 내가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면 그 자리는 회사에 더 오래된 더 예쁘고 키도 더 크고 어린 친구에게 주고 나는 조연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들었고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대표님의 친딸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고 고스란히 병으로 남았다. 맹목적으로 열심히, 열심히 쫓아가면서도 도망가고 싶었고 연기를 그만두고 싶었다. 너무 힘들었다. 그래 정말 솔직하게 너무 힘들었다. 계약을 깰 수도 없었다. 위약금도 감당할 수 없었고 배신을 했다는 낙인이 무서웠다. 내가 원해서 배우는 취미나 특기도 집중할 수 없었고 그저 싫기만 했다. 연기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면 거부감부터 들었다. 실제로 27살에는 연기를 그만두겠다고 본가로 내려가 몇 개월을 살기도 했다. 그때는 영화관 근처도 가기 싫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그렇게나 좋아하던 내가 영화관 근처만 가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연기는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몇 개월 쉬고 나니까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남은 계약기간 동안 다른 회사에 가지 않고 연기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중도해지계약서를 쓰고 이별했던 회사였는데 내가 너무나 하고 싶어 했던 영화의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게 되면서 다시 계약을 이어간다는 재계약서를 쓰고 돌아왔다.


26살부터 28살까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이 시기에 이런 일들은 나의 자아에,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고치고 싶어 하는 나의 성격들은 유년시절부터 생성되어 이 시기에 굳혀진 것들이다.

작년 말부터 스스로를 똑바로 마주하면서 바꿔가는 중이다.

돌이켜보면 26살부터 20대가 끝날 때까지 나는 연애도, 친구들과의 관계도 불안정했고 가족들과의 소통도 어려웠던 것 같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과도 잘못된 소통을 했다. 이런 것들은 작년까지도 이어졌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했던 말이나 내가 겪었던 일들을 까맣게 잊는 경우가 많았다. 거의 유체이탈 상태였던 것 같다. 모든 순간이 내 선택이었음에도 내가 아닌 상태로, 멍하게 살았던 거다.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았다. 최근에 만난 재철오빠가 "그때는 터프하고 생각도 별로 안 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아 보여. 부드러워진 것 같긴 한데 걱정이 많은 건가? 좀 터프해도 되잖아?"라고 하길래 "사실 나는 그때 더 생각이 많았어. 생각이 복잡하게 엉켜서 생각을 하기 싫었고 외면했어. 지금은 내 생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내 의지로 살려고 해."라고 대답했다.

그랬다. 그 당시의 나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생각을 하면 의문이 들고 그것이 의심이 되는 게 무서웠다. 똑바로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외면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내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약했다. 생각이 바로 선 사람들을 질투했고 싫어했다. 사회생활의 첫 경험을 그렇게 했다. 외면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나에게 어떤 영향으로 남을지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어떤 때를 생각하면 그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나 친구들이 떠오르는데 그때에는 없다. 분명히 연애도 했던 것 같은데 정말 생각이 안 난다.

단 한 명의 친구가 떠오른다. 같은 동네에 살며 연기하던 친구인데 지금도 친구지만 그때만큼 친하지는 않다. 그 친구가 나에게, 스트레스받으면 부풀어 오르는 '개복치'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딱 맞는 별명이다. 그 친구는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은연중에 하는 모든 말을 들었으니 알고 있었겠지..? 그 친구에게 그때 내 옆에 있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덕분에 큰 힘이 되었다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많이 울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다이어리를 찾아 꺼내고, 15년부터 17년까지의 다이어리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SNS에 들어가서 18년도 9월 이전의 사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 한번 탈퇴했었지.' 떠올리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 생각하다가 갑자기 망치로 가슴을 한 대 맞은 듯 억 하고 올라왔다.


누구의 탓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최근까지도 그 당시, 그 회사의 대표님 덕분에 그래도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말했다. 이건 진심이다. 좋은 기억만 남기려고 했다. 실제로 너무 힘들었던 기억들은 내 방어기제가 발동해 알아서 지워주기도 했고.

내가 선택했었던 회사였다.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 때 나를 선택해 주었고 오디션도 많이 보내주고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었다. 그래, 나라면 그 회사를 만나지 못했어도 아마 계속 어떤 방법이든 찾고 문을 두드렸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고마워했었던 것 같다.

그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 다른 직원들에게 "왜 저런 애를 뽑았냐"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를 선택해 준 대표님이 감사했다.


어리고 부드럽던 뇌에 큰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자신감 없고 위축되고 쓸데없는 말이 많고 또 후회하고 갈팡질팡, 핑계 대고 변명하는 그런 버리고 싶은 성격들이 생겨난 시기.


그래도 좋은 것은 어려움 뒤에 오고, 역경이 있으면 깨달음도 있는 것이고, 더 크게 나아갈 수 있다.

맞다. 나는 덕분에 더 단단해졌고 더 깊어졌을 것이다.


좀 더 좋은 어른이 이끌어주었으면 참 좋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나에게 그런 어른이 없었다. 목표가 생겼다. 나에게 필요했던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


내일 첫 연습을 가면 나의 방황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솔직하게.

그리고 이 연극이 나에게는 잃어버린 26살, 27살, 28살을 찾는 과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지금 이때, 이 연극을 만나게 된 것.

이것이 우연일까?


문득, 감사해지는 마음이다. 평온해진다.


2014년도까지의 나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며 모두 이루어내는 아이였다. 그 이후 무기력해지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선택받기만을 막연히 기다리며 타인에게, 환경에 나를 내던져놓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다시 14년도의 내 모습이다. 나는 한다면 하고, 이루어낸다면 반드시, 끝까지 이루어내는 사람이었다.


내 안에 있던 이런 내 모습을 제일 크게 꺼내 들었다. 23년도부터는 달라졌다.


최근 이틀 동안 막연해지고 아득한 기분에 조금 답답했었는데 이틀 만에 복구완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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