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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혁 Jan 31. 2021

육지인듯 육지 아닌 육지 같은 섬

[위로여행 5장] 통영 장좌도

통영 장좌도


통영 남망산 정상에 있는 수향정에 걸터앉아서 바다를 넋 놓고 관망했다. 내가 통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각자의 방향으로 떠나는 친구들과도 이렇게 수향정에 앉아 바다를 한참 보았었다. 바다에 길을 만들며 오가는 배들은 막힘이 없다. 



많은 물보라 속에 살고 살아지고 살아내는 시간이 흘렀다. 

통영의 옛 친구들과 다시 만나는 연말 술자리는 단명한 꿈들의 묘비명을 서로 읊어주는 시간이었다. 서가 칸칸이 꽂혀있던 문학소년의 고뇌들, 어디 고물상에 처박혀 있을 일렉트릭 기타들, 불의를 겨누던 불온한 상상들이 굳은 살 아래에 무덤이 되어 묻혀 있었다. 우리는 성장하는 대신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가는 듯했다. 각자의 가지에 움트던 빛나는 잎사귀들이 세상의 바람에 벗겨지고 나니 근근이 광음을 버티며 살아가는 생활인만 앙상하게 남았다. 출근길 지하철 유리에 비친 양복차림의 몽롱한 사내가 자기의 모습인지 다른 이의 모습인지 분간하기 힘들어 놀랍고도 슬펐다고 친구는 푸념했다.



우리의 송년회는 어쩌면 조금씩 멀어져가는 ‘나’들을 위한 환송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나는 잎사귀를 틔우는 나무였던 우리를 생각하다가 나는 통영의 잃어버린 섬 하나를 떠올렸다. 통영에는 ‘육지인 듯 육지 아닌 육지 같은’ 섬이 있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통영의 지도들을 보면 남망산 우측 편에 작은 섬이 하나 보인다. ‘장좌도’라고 나름 이름도 적혀 있는 섬이다. 



1872년에 제작된 <통영지도>의 일부분


오늘날 장좌도 일대의 위성사진



통영시 동호동 산 1번지 장좌도(장자섬, 장개섬으로도 불린다)는 한산대첩이 벌어진 그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큼직한 언덕이 웅크린 모양으로 놓여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들을 속이기 위해 이 섬에 풀을 베어 높이 쌓아 군량미가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통영 토박이들 중에도 장좌도를 아는 이가 드물다. 나의 가족이 몇 해 간 살았던 동호동 집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었지만 부모님도 나도 거기에 섬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관광객들에겐 완전 ‘듣보잡’ 섬일 것이다. 동피랑 벽화마을을 들른 후 남망산 공원을 구경해볼까 하고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장좌도 앞까지 왔다가 ‘여기엔 아무 것도 없구나’하며 되돌아가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통영엔 한국 최대의 해저 금광이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신세가 된 장좌도는 그러나, 나름 탄생의 전설을 가진 곳이다. 우리나라 땅 형성의 민간설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마고할미가 여기서도 나온다. 키가 하늘에 닿을 듯한 마구할매(‘마고할미’의 통영 표현)가 남해 바다 저 멀리서 통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단다. 그걸 보고 빨래하던 아낙이 ‘저게 마구할매 온다’고 외치자 할매가 깜짝 놀라서 치마폭에 들고 있던 금덩이를 바다에 빠뜨리고는 안티산(여황산) 너머로 휘리릭 사라졌다고. 그리하여 이 금덩이가 장좌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전설은 전설로만 남지 않고 진짜 금덩이를 장좌도에 남겨두었다. 일제시대 때 대규모 금광이 발견된 것이다. 부경대 환경지질과학과 박맹언 교수는 자신의 책 <돌 이야기>에서 장좌도의 해저광산이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최대의 금광이었다고 적고 있다. 가장 큰 폭이 7m나 되는 금광맥이 장좌도 주변 해안을 따라 700m 이상 이어졌다. 갱도는 무려 해저 200미터 아래까지 연결되었다. 금의 순도도 매우 높았다. 그동안 캐낸 금이 20톤이 넘었다는데 현재의 시세로 따지면 9천억 원 가까이 된다고.



황금을 품은 섬이란 것을 알게 되자 노다지를 캐내기 위해 일제는 섬을 파헤쳤다. 그때부터 이 보물섬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큰 바위덩이 같던 섬의 가운데가 채굴로 인해 함몰되어 섬이 토막 났다. 파낸 흙은 광석을 운반하는 길을 만들기 위해 바다를 메우는데 쓰였다. 이런 연유로 육지와 연결된 장좌도는 결국 섬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그 후, 사람들은 수탈할 대로 탈탈 털다가 더 이상 채산성이 맞지 않자 광산의 문을 닫아버리고 만다. 



지금의 장좌도는 섬의 흔적도, 매력도, 풍채도 잃어버리고 폭격 맞은 듯 무너진 채 누워있다. 품었던 금빛 재능을 다 빼앗긴 채 이제는 어느 도시에나 있는 후미진 변두리의 무언가로 버려졌다. ‘장좌로’라고 표시된 도로명 주소만이 겨우 남았을 뿐이다.


 

섬의 가운데가 함몰되며 생긴 벼랑


장좌로 너머 장좌도가 보인다


빼앗기고 내동댕이쳐진 우리가 장좌도



존재감이 사라진 장좌도를 생각하면 한때 빛나는 보물을 간직했던 내 친구들이 그렇게 버려져 누워있는 듯 느껴진다. 착취당한 섬처럼 우리의 열정은 누군가의 호주머니에 축적되었다. 다 쓴 것 같으면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변변한 이름도 갖지 못한 흔한 동산이 된 장좌도처럼 우리는 계약직1, 파트타이머2, 백수3이 되어 길을 떠돌고 있었다. 



여행서에는 나오지 않는 장좌도를 위로하려고 나 혼자 찾았다. 남망산을 왼쪽에 끼고, 오른쪽으로 바다를 접한 한적한 길을 걸었다. 이사를 자주 다녔던 나의 외가가 이 근방에도 몇 해 있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꼬꼬마이던 어느 여름밤, 정전으로 암흑천지가 되자 어느새 집 앞 골목으로 나온 빈촌 사람들은 군데군데 무리지어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었다. 장마가 지났었는지 유난히 달이 밝았던 야밤의 반상회 광경을 나는 아직 까먹지 않고 있다. 어둑하지만 무섭지 않은 밤. 별반 특별하지도 않지만 회억하면 선들바람이 마음에 인다.   



절망처럼 갈라지고 허물어진 장좌섬에 도착해보니 수북하게 나무들이 기어올라 새 터를 구축했다. 회갈색 민둥한 낭떠러지에 잡풀들이 부둥켜 뿌리를 내렸다. 단비가 지난 후의 풀벌레 소리는 고결했다. 어깨를 맞댄 나무들은 섬의 상처를 뒤덮어 생의 숨결을 다시 돌게 하고 있었다. 바위섬에 손을 대고 있는 나무 잎사귀에서 빛이 났다. 무엇을 교신하는 걸까. 빼앗긴 섬에도 봄은 오는가. 장좌도 앞바다에 길을 만들며 오가는 배들은 여전히 막힘이 없다.



통영 태생의 시인 김춘수는 그의 수상집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에서 대표작 <꽃>의 창작 배경을 설명할 때 집 근처에 있던 장좌도(장개섬)에서의 기억을 언급한다. 자신이 네댓 살 또는 젖먹이 시절에 장개섬에서 보았던 수십 마리 갈매기들의 날아가는 모습에서 받은 감동은 이 시 <꽃>의 근원 체험이었다. 황홀을 주었던 ‘갈매기’를 어린 김춘수는 ‘비행기’라는 이름으로 잘못 기억하였다.



강탈당한 땅이 되어 존재가 잊힌 장좌도와 우리 사회의 엑스트라가 되어 존재가 잊힌 벗들을 위해 김춘수의 시 한 편을 띄워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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