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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혁 Jan 22. 2021

아버지는 동피랑 벽화가 됐다

[위로여행 4장] 동피랑벽화마을

통영 동피랑벽화마을



나는 가족 행사가 있어 어느 여름 통영에 내려가자마자 나의 벗 동피랑이 잘 지냈는지 궁금하여 보러갔다. 전날 몰아친 태풍의 잔상이 여전한데도 동피랑 벽화마을엔 관광객들이 비와 함께 들이붓고 있었다. 어느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달동네가 되어버린 동피랑. 전국 곳곳에 움튼 벽화마을의 원조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당국의 재개발 정책으로 쫓겨날 처지에 몰린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전국의 그림꾼들이 모여 골목 담장에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우아한 저항이 큰 호응을 얻자 통영시는 재개발을 철회했다. 포크레인에 맞선 예술이 삶을 지켜낸 것이다. 



동피랑 마을에 방문할 때는 갯마을 사람들의 가파른 하루들을 생각하길 바란다. 애초에 누구에게 구경하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생활하는 터전이다. 동피랑은 여전히 가난한 마을이다. 

그 안에 사는 보통사람들의 삶도 담장의 그림 같을까? 우리의 삶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상념으로 동피랑 골목을 산책하다가 건너편에 보이는 000병원에 나의 마음이 머문다. 아버지가 오랜 날들을 투병했던 3층 병실. 나의 아버지는 통영에 살면서 동피랑의 어느 그림도 볼 수 없었다. 동피랑에 처음 벽화들이 들어서던 2007년에 동양화가인 나의 형수도 그림 한 점을 그 곳에 그렸었지만 아버지는 며느리의 그림을 볼 수 없었다. 2000년 즈음부터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뿌옇게 변해가는 정적 속에 10년 간 삶을 묻어갔다. 철재상을 운영하던 강철 같고 활동적인 남자는 시각 장애 때문에 더 이상 대문 밖을 나설 수 없었다. 생활의 감옥 속에서 급성폐렴, 대장암, 간암이 연달아 강도처럼 달라붙었다. 그런 몸으로 아버지는 동피랑 벽화마을이 바로 보이는 병원에 입원하셨다.



3평 남짓한 병실의 유리창은 유난히 컸다. 창문 너머 멀리 하늘을 향해 돋아난 동피랑에는 사람들의 조류가 언제나 흘렀지만 아버지에겐 단지 한 덩이 적막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통유리는 창이 아닌 벽일 뿐이었다. 



담당 의사는 아버지가 치매 초기 증세도 보인다고 일러 주었다. 어린 시절 일찍 당신의 어머니를 여의어 무척 외로웠을 시간들을 잊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단단한 불가능 앞에 아버지는 야위어갔다. 끝나지 않을듯한 수형의 시간들이 탄식의 기력마저 꺾어버렸다. 뻘밭 같은 병상에서 10년이나 갇혀온 아버지는 표정마저 잊어버렸다. 



그렇게 생의 썰물을 받아들이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의 병실에서 본 동피랑벽화마을



형과 형수가 아버지의 갓 태어난 손자를 데리고 병실에 왔다. 그리고 암흑만을 더듬던 아버지에게 당신 생애 첫 손자를 안겨드렸다. 그때,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찰나를 아버지에게서 보았다. 아버지의 온 얼굴에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들뜬 물결이 일었다. 황홀하고도 슬픈 소용돌이가 먼 허공에서 아버지에게로 달려온 듯 했다. 기어이 맞이한 선물이자 다 펴보지 못할 환희 앞에서의 서러움이 느껴졌다. 그 순간, 저물녘 침침해오는 동피랑이 보이는 병실 유리벽에 새로운 삶을 보듬은 아버지의 모습이 벽화처럼 겹치며 비췄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에게 동피랑의 벽화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2012년 가을 아침, 아버지는 동피랑이 보이는 병실에서 하늘을 향해 돋아 고요한 바람이 되었다. 이젠 벽화들을 보실 수 있을까?



통영 바다는 여전히 밀물과 썰물이 삶을 적신다. 동피랑에 그림을 그렸던 형수는 2년 후 둘째 아이를 낳았다. 또 하나의 창조적인 예술 작품으로 탄생한 둘째 조카는 할아버지의 눈매를 닮았다.



조카의 백일잔치를 마치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오는 버스를 탔다. 차창 밖으로 사람 사는 풍경이 구불구불한 산천을 따라 이어지며 휙휙 지나간다. 평야가 나오나 싶더니 계곡이 나타나고 그러다 다시 태산이 돌진한다. 

희극과 비극이 섞여 몰아치는 삶 속에서 우리의 시간들은 그 자체가 예술을 닮아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희극의 영토가 커지려면 마을이 강제 철거될 뻔했던 동피랑을 지키러 벽화가 들어서고 내 아버지에게 손주가 안기듯 늘 새로운 아름다움들로 삭막한 대지를 일구어 나가야할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8강 스페인전에서 홍명보 선수가 마지막에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는 골 장면을 축구광이던 아버지가 앞을 못 보시면서도 그 찰나만큼은 봤다고 하시던 말이 떠올라 가끔 웃음이 난다. 진심을 다해 보려 한다면 환연한 순간은 머릿속에 그려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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