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 에세이] Cafe My 20
밤의 뒷모습을 보며 집을 나섰다. 5월이었지만 아직 날이 쌀쌀했다. 여의도 전철역 3번 출구에 도착하니 나처럼 정장을 차려입은 무리가 보였다. 배정받은 버스를 타고 가 경기도 용인에 있는 드라마 세트장에 내렸다.
그곳에서 SBS 드라마 <더 킹-영원의 군주> 극중 기자회견 장면 촬영이 진행되었다. 나는 40여명의 엑스트라 중에 카메라 기자 역할을 맡았다. 건네받은 명찰에는 ‘MBS방송국 유은지 기자’라고 적혀있었다. 어차피 이름 없는 엑스트라이기에 유은지가 아니라 묵은지라고 써놓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뒤늦은 나이에 작사·작곡 활동을 시작했으나 아직은 한 달에 한번 커피 한 잔 마실 정도 되는 음원 수입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비정규직으로 소소한 밥벌이를 해왔지만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일자리가 가물어져 몇 달째 백수였다. 그런 와중에 구하게 된 일이 보조출연자 아르바이트였다. 이름 없는 나는 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열애설에 대한 브리핑 장면을 취재하는 연기를 했다. 인생 내내 엑스트라처럼 살아왔기에 엑스트라 연기는 쉬웠다.
다음 날 오후에는 같은 드라마의 촬영을 위해 충남 천안의 한 대학교 건물에 집결했다. 모인 엑스트라들 중에 배역을 얻지 못한 나와 같은 잉여인력들은 호출이 올 때까지 건물 외부에서 대기해야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졌다. 날이 어둑해졌고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기온이 떨어졌다. 구석기 시대 유물처럼 생긴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뽑아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커피멍’이 시작되었다.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카페 구석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하던 스무 살 무렵의 내가 떠올려졌다. 카페의 그 청춘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며 그윽한 커피향을 품도록 잘 로스팅됐을까. 희미해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원두 조각을 마음속에서 만지작거렸다. 촬영장의 누구도 신경 안 쓰는 엑스트라인 나는 그렇게 3시간 동안 검은 비구름 아래에 카페를 차려두고 환각처럼 선연한 나를 기억하려 애쓰는 씬을 혼자 연출했다.
다음 날 촬영은 종로에서 밤 10시 집합이었다. 그날은 초미세먼지 수치가 최악이었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획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음악앨범을 제작하려 했지만 그렇게 할 돈은커녕 당장 송금해야하는 월세금도 부족했기 때문에 현장에 나가야했다.
MBC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에서 두 주연 배우가 우연히 서점에서 재회하는 장면의 배경을 채워줄 서점 손님 역할이었다. 엑스트라들은 서가를 이리저리 오가며 주인공의 병풍이 되어주면 된다. 나는 책장 사이를 지금껏 살아온 나의 속도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득 책 한 권 앞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제목이 나를 빨아들였다.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자정을 훨씬 넘겨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 집으로 가는 길, 먼지가 잔뜩 깔려 앞이 흐려진 밤을 걸으며 내 생의 드라마를 생각했다. 막장 전개이지만 비극으로 치달을지 희극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나의 노래를 적막한 거리에서 흥얼거리며 새벽을 맞았다.
그리고 일 년 정도가 흘렀다. 나는 나에게 ‘예혁’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고, 거리에서 흥얼대던 노래를 지난 9월 23일에 <Cafe My 20>이란 제목으로 작사·작곡해 발표했다. 노래는 이번에 자신의 첫 음원을 발매하는 배우 남가현의 청량한 목소리로 불려졌다.
이 곡은 청춘의 희망과 다짐을 커피에 비유해 풀어내고 있다. 노래의 향기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벨을 울릴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