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병 속의 독
그렇게 몇 년을 버티던 어느 날, 나는 결국 어머님께 터져버렸다.
그날도 자잘한 잔소리와 통제의 행렬이 이어지던 날이었다.
내가 잘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나를 불렀다.
“야, 여기 와서 앉아봐. 너 왜 내가 말하는데 대답을 그렇게 해?”
'그래, 잘됐다. 나도 이제 할 말을 해야겠어.'
어머님의 그 말은 내가 오랫동안 꽉 막아두었던 인내의 코르크마개를 열었다.
“어머님, 어머님이야말로 저한테 너무 말을 막하시는 것 같아요.”
나는 그동안 쌓여 있던 불편함 몇 가지를 한 번에 쏟아냈다.
한소리 하려던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하지 않던가.
나는 몇 년 만에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꿈틀거림으로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 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어머님의 끝없이 이어지는 간섭과 모순들은
회차를 거듭하는 장편 드라마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명절에 “이번에는 많이 안 할 거야”라고 하시면서도
막상 가보면 냉장고는 재료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 밥을 대충 차려 먹이자 하시면서도,
정말 간단히 주면
“국이라도 해서 같이 먹여야지, 왜 그거만 줘?”
내가 아이를 낳고 작은 일이라도 해보려 하면
“너가 ○○보다 더 벌 수 있어?”
하며 남편과 비교했다.
그녀는 장기가 많았지만,
하나의 치트키는 바로 이런 끊없는 기준 변경과 모순된 요구였다.
집공사를 이유로 우리 집에 2주간 머물렀던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젓가락 한 번 놓은 적 없이 거의 세 끼를 다 드셨다.
황태뭇국을 하면
“된장국도 맛있는데.”
그래서 된장국을 하면
“카레 하면 어떨까?”
내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어머님은 말했다.
“집에서 여자가 밝아야 다른 가족 모두가 행복하지.”
끝없이 바뀌는 기준과 모순된 요구 속에서
나는 점점 더 깊은 혼란과 불안, 그리고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이는 그동안 나에게 쌓여 있던 경계침범의 상처와 복합외상을
더욱 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들의 원성과 말림에도 그녀는 끄떡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은 늘 같았다.
“나는 이렇게 생겼어. 나는 계속 말할 테니까 너네가 흘려들어.”
그렇다.
그녀의 또 다른 치트키.
누구의 고통의 목소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심지였다.
참는 데도 끝은 있었다.
내 몸과 마음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사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일관된 사랑이라는 것을 남편에게서 받았다.
원래 잘 대우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그의 사랑이 더 크게 와닿았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어려움도 잘 인내해야 한다고 여겼다.
나는 늘 좋은 것과 불편한 것이 함께 있을 때 사리분별이 어려웠다.
어머님도 남편이라는 좋은 사람과 함께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머님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내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들은 결국 나를 무너뜨렸다.
남편의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도,
수많은 내 경계를 넘는 행동들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무너져버린 나를 조각조각 맞추며 앞으로의 길을 다시 그려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까.
나는 이제 선의와 통제를 구분해야 했다.
내 마음을 먼저 살피며 자신이 안전할 수 있도록 내 몫을 해야 했다.
마치 큰일을 치르기 전 다짐을 되새기듯,
그때 내 머릿속에 『제인 에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I am no bird; and no net ensnares me: I am a free human being with an independent will.”
<<나는 새가 아니며, 그 어떤 그물도 나를 가둘 수 없다. 나는 독립된 의지를 가진 자유로운 인간이다.>>
-Charlotte Brontë, Jane Eyre, 1847-
예쁘게 포장된 그물도 나를 가둘 수 없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독립된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