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내가 외도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이혼한 사이였다는 것이다."
제1장 프롤로그
민준은 보증을 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의 간절한 부탁이어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인이 파산을 하는 바람에 그 채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민준은 자신의 채무도 아니어서, 일부러 돈을 갚지 않았다. 그러자, 은행에서는 집안의 가재도구 등에 압류를 하겠다는 통지를 하였다. 그래서 6개월전 쯤 부인인 서연에게 형식상으로만 이혼을 하자고 하였다.
“여보 형식적으로 이혼하는 거야. 보증 문제만 정리되면 바로 다시 혼인신고를 하면 돼.”
“당신… 확실한 거지?”
민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가 뭐가 달라져.”
법원에 출석해 협의이혼의사 확인을 받던 날 아침이었다. 판사가 '두 분은 서로 이혼하기기로 한 거 맞아요?'라고 물었다. 서연은 대답을 주저하면서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을 했는데, 민준은 "네! 맞습니다, 판사님"이라면서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서연은 아주 미세하게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느낌이 스쳤다.
제2장 이혼 후 동거, 그러나 별거
-1-
민준과 서연은 이혼신고를 마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고, 서연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민준이 받아오는 월급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서연은 이혼을 민준의 보증 문제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여겼을 뿐, 그들의 결혼 생활이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준의 생각은 달랐다.
민준은 회사 동기였던 혜민과 입사 직후부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혜민은 늘상 차분하기만 한 서연과 달리 통통튀는 매력이 있었다. 썸을 탔는데, 민준이 소개팅으로 만난 서연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관계가 더 진전되지는 않았었다.
-2-
혜민은 회사 총무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혜민은 어느날 민준으로부터 배우자 수당에 관한 신청서를 하나 받았다. 이혼을 했으니, 앞으로는 배우자수당을 지급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혜민은 사내메신저로 민준에게 연락을 했다.
'옥상에서 커피 한잔 할래요?'
건물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2월말의 하늘은 청명했으나, 바람은 쌀쌀했다. 둘은 볕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았다.
"민준씨, 이혼했어요?"
"아, 그거 봤군요. 그렇게 됐어요. 제가 보증을 잘 못 서서"
갑자기 혜민이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준씨, 어쨋든 이혼을 축하해요. 축하할 일이 아닌가? 어쨋든 나 이제 민준씨와는 더 이상 밀당하지 않을래요. 옛날에도 그러다 민준씨가 다른 여자랑 결혼해버렸잖아요."
민준은 들고 있던 커피를 벤치에 내려 놓았다. 그러면서 민준은 혜민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라는 표정으로 혜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요?"
"민준씨, 다음 달에 베트남에 출장갈 일이 있는데, 이혼한 기념으로 저와 단둘이 갔다올래요?"
민준은 다시 커피컵을 들고, 커피잔을 만지작 거렸다. 검은색 커피 위로 서연의 얼굴과 아이들의 얼굴도 스쳐갔다. 한모금 들이켰다. 썼다. 그렇지만 달콤했다.
민준은 '우리는 이미 이혼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혜민을 바라봤다.
"그래요"
꽃샘 추위가 절정이던 3월에 그렇게 둘은 까끗한 남쪽나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3-
서연은 며칠 후 민준의 여권을 정리하다가 여권안에서, 민준과 혜민의 항공권을 보았다. 그리고 민준이 혜민과 단둘이서만 해외에 다녀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연과 민준은 크게 부부싸움을 했고, 4월 말 민준은 짐을 챙겨 집을 나갔다. 비로소 민준과 서연은 남남이 된 듯 했다. 그런데 서연은 아파트 도어락의 비밀번호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번호를 바꾸는 순간, 정말로 끝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민준이 집을 나간 후에도 아이들은 꾸준히 민준을 찾았다. 서연은 아이들의 양육비도 필요했고, 아빠를 찾는 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를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서연은 민준에게 집에 정기적으로 들러 아이들을 좀 봐주고, 양육비도 지급해달라고 했다. 민준도 이에 동의했다. 민준은 따로 원룸에서 살면서도, 일주일에 두, 세 번 씩은 아파트에 들러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서연의 계좌에 양육비와 생활비를 보내주었고, 아이들의 방학 때면 가족여행을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민준은 서연의 아파트에 가지 않는 날이면, 혜민과 함께 밤을 보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서연은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민준이 현재와 같은 이중생활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서연은 그해 8월 무렵 혜민에게 전화로 부탁 아닌 부탁을 하기도 했다,
“혜민씨, 앞으로 민준과 만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민준과 혜민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서류상으로도 이미 남남이고, 동거도 하지 않는 관계여서, 서연이 혜민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상 이를 포기하고 있었다.
제1장 찬우
서연은 민준과 혜민의 관계가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자신이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중 서연은 아침 운동삼아 다니던 수영장에서 돌싱으로 지내던 찬우를 만났다.
서연은 일주일에 두세 번, 2km의 자유수영을 즐겼다. 차가운 물속을 가르며 25미터 풀을 40번쯤 왕복하다 보면, 폐부 깊숙이 차오르는 숨 가쁨 외에 모든 것이 잊히는 것 같았다. 물 밖의 세상에서 겪는 수치심과 미련도 물속에서는 그저 고요한 기포가 되어 흩어졌다..
그렇게 자유수영을 마치고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서연은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는 눈빛을 마주했다. 수영 후 심장박동이 빨라져서인지, 그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에 가슴이 설레었다.
"오늘 페이스가 엄청 빠르시네요.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으신 것처럼요."
갑자기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수면의 파동을 타고 서연의 귓가에 닿았다. 그날 이후, 운동을 마친 서연을 기다리는 것은 찬우의 다정한 배려였다. 그는 수영장 로비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서연을 기다리다, 그녀에게 따뜻한 캔커피를 건넸고, 어느 날은 "수영 후엔 늘 배가 고픈데, 혼자 먹기 적적해서요."라며 가벼운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동네 식당에서의 간단한 식사였다. 서연도 아이들 걱정에 저녁식사만 마치고 귀가를 서둘렀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식탁 위에는 맥주가, 때로는 소주가 곁들여졌다. 알코올 기운이 빌미가 되어 대화는 길어졌고,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의 갈증을 털어놓았다. 찬우는 서연의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서연이 잊고 지낸 '위로'라는 감각을 거칠게 되살려놓았다. 그러다 서연은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횟수가 늘었다.
"엄마, 오늘도 회사에서 회식이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아. 우리 집에 가서 애들 밥 좀 챙겨줘요. 엄마."
찬우도, 잔잔히 서연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가끔은 술에 취해 자기이야기를 했다. 부인을 사고로 잃었고, 아이들은 외할머니 내외가 키워주고 있다는 이야기, 회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술자리에서 찬우는 아이들로부터 전화를 받게되면, 영상통화를 했다. "오늘은 무슨 놀이를 했어?"라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자상했다. 영상통화여서 서연도 아이들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찬우네 아이들이 철없이 '엄마가 보고싶다'라는 말이라도 하면, 찬우는 때로는 아이들을 달래주기도 하고, 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아이들을 꾸짖으면서 통화를 마치고 나면, 찬우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면서, 자리를 피하곤 했다. 찬우의 자상함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서연은 민준과 찬우의 모습을 비교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찬우의 빈자리를 자신이 채워주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연은 민준과 혜민의 관계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만 유령처럼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우린 이미 끝났어. 서류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그렇게 믿으려 애썼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그렇게 서연은 찬우와 함께 모텔에 가게 되었다.
제2장 완전한 별거
찬우와 서연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모텔에서 서로의 상처를 달랬다. 하지만 둘 사이의 비밀스런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12월 말, 살을 에듯 차가운 밤공기를 뚫고 모텔 입구를 나서던 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입구 근처에 세워진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민준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민준은 이미 오래전부터 혜민과 이중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서연이 자신 외의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이런 곳에서 나오는 풍경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민준의 눈에는 용납할 수 없는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서연은 민준이 화를 낼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민준이 불같이 화를 내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먼저 서연은 찬우를 들여보내야 했다. 찬우를 이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찬우 씨, 미안해요. 먼저 가세요. 제가 해결할게요."
서연이 찬우를 등 뒤로 숨기며 차로 밀어 넣자 민준이 악을 썼다.
"너 어디 가? 도망치지 마, 이 새끼야! 내 마누라랑 여기서 뭐 한 거야!"
민준의 비아냥 섞인 고함에 서연이 가로막아 섰다.
"당신, 오늘 왜 이래? 먼저 바람피운 건 당신이잖아! 이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 왜 애먼 사람한테 막말을 해?"
민준은 당장이라도 찬우에게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지만, 한눈에 봐도 자신보다 다부진 찬우의 체격을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분노를 눌렀다. 민준은 비겁하게도 찬우가 차를 몰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찬우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날 선 증오뿐이었다. 민준이 계속 달려들자, 서연은 그동안 가슴 속에 벼려왔던 서슬 퍼런 진실을 휘둘렀다.
"당신, 정말 구역질 나. 혜민이라는 그 여자애랑 베트남까지 가서 이혼 축하 파티를 벌인 게 누군데? 당신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 난리를 치는 거냐고!"
서연이 민준의 치부를 정면으로 들이대자, 민준의 눈동자가 이성을 잃고 뒤집혔다. 자신의 추악함이 낱낱이 파헤쳐진 수치심은 비겁한 폭력으로 치달았다.
'짝!'
차가운 겨울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서연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서연은 싸움 끝에 민준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파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꿨다. 아이들에게는 이제 집에서는 아빠를 볼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두 번 엄마가 아빠의 원룸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엄마와 아빠의 결별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제1장 법정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서연은 법원에서 온 우편물을 하나 받았다. 민준이 서연을 상대로 사실혼 부당파기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서연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먼저 바람을 피운 게 누군데, 누가 누굴 상대로.. '
서연은 자신의 패배를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법원에 출석했다.
첫 변론기일이었다.
민준은 서연의 부정행위로 인하여 비로소 혼인이 파탄되었다는 취지의 짧은 변론을 마치자,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사님, 먼저 바람을 피운 건 민준이고, 그것 때문에 저희의 혼인관계는 파탄된 상태였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저와 민준의 혼인관계의 실체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 상태에서 찬우를 만났을 뿐입니다. 제가 민준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민준도 본격적으로 변론을 시작했다.
“판사님, 제가 회사동료와 해외여행을 가고, 그것 때문에 별거를 하고 있었던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저는 피고와 자녀들이 지내는 아파트에 계속 들어갔고, 피고에게 예전과 마찬가지로 생활비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가족여행도 갔습니다. 그리고 피고는 마치 자기가 부인이라도 되는 양 제 회사동료에게 전화해서 저와 만나지 말라는 말도 했습니다. 저와 서연은 이혼 후에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혼관계가 서연의 부정행위로 파탄된 것입니다.”
방청석에서는 ‘이혼 후 서로 바람을 피웠다는 사건이네’라면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법정에 들리는 듯 했다.
판사는 방청석을 향해,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서, 서연에게 먼저 물었다.
“피고! 원고 민준이 주장하는 내용이 모두 사실인가요?”
“네,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아빠인 민준이 필요해서, 민준이 나간 후에도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준이 아파트에 자주 왔고, 돈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원해서 가족여행도 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별거 이후에도 민준은 혜민과 따로 만나고 있어서, 저와는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혼 관계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실혼 관계도 아니었다고 하시면서, 왜 민준의 회사동료인 혜민에게까지 전화를 하신건가요?”
판사는 안경을 고쳐쓰며, 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민준이 다른 여자와 만나는 건 부도덕한 행위잖아요. 아이들 보기에 바람직한 모습인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서연은 마지막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판사의 말 속에서, 서연은 자신이 민준의 부인인 양 행동했던 모습이 자신과 민준이 사실상 부부였음을 인정하는 가장 치명적인 증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서연은 판사가 법정을 빠져나간 후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제2장 판결
판사는 재판을 마치고, 2주후에 판결을 선고했다. 법원의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두 사람은 자녀의 양육을 함께 책임졌고, 주거를 공유하였으며, 가족행사와 여행을 함께하는 등 사회통념상 부부 공동생활로 평가할 수 있는 관계를 지속하였고, 서연은 제3자에 대하여 사실상 혼인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할 때, 원고와 피고 사이에는 혼인의 실질에 부합하는 사실혼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피고가 제3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은 행위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로서의 정조의무를 위반한 것으로서, 원고에 대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
따라서 서연은 민준에게 위자료로 1,500만 원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
법정에서 서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고, 민준은 환호했다. 법정을 빠져나가는 민준의 발걸음은 느긋했고, 서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민준의 느긋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1장 다시 법정
지금껏 서연은 서류상으로 이미 민준과 남남이었고, 동거도 하지 않는 관계여서, 사실혼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준과 혜민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민준과 물리적인 별거를 시작한 4월 이후에도 사실혼 관계에 있다고 적혀있었다.
서연은 이번에는 실패하기 싫었다. 그래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리고 민준과 혜민을 상대로 법원에 다시 소를 제기했다.
다시 변론기일이 다가왔다. 피고석에는 민준만 앉아있었다. 혜민은 차마 서연을 볼 수 없어 법정에 출석할 수 없었다. 서연도 혜민의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쉬우면서도, 혜민이 아주 염치가 없는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은 얼마 후 다시 같은 법정에 앉았다. 법대 위에는 몇달 전의 그 판사가 다시 앉아 있었다. 변호사는 같은 판사가 판결문을 증거로 제시하며 변론을 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판사님의 판결과 같이 원고와 피고 민준이 사실혼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면, 민준은 사실혼 기간 내내 혜민과 부정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고들은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민준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변호사의 말에 반박을 했다.
“판사님, 서연은 제가 혜민과 성관계 등을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가족여행도 가고는 했습니다. 저의 부정행위를 이미 용서했다고 할 것입니다. 서연의 청구를 기각하여 주십시오.”
서연이 변호사를 대신해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변론에 나섰다.
“이미 지난번 소송에서도 문제가 되었지만, 저는 혜민에게 전화해서 민준을 만나지 말라는 말도 했었습니다. 용서라니요. 말도 안됩니다”
판사는 불과 몇 달 전에 판결을 했던 당사자들이 다시 법원에 와서 다투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재판을 마쳤다.
제2장 두번째 판결
그로부터 2주일 후. 판결이 선고되었다. 판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서연과 민준이 사실혼관계에 있었다는 사정은 앞에서 본 바와 같고, 피고들이 그 기간 동안 부정행위를 한 사실은 다툼이 없다. 서연은 아이들을 위해 민준과 가족여행을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뿐이므로, 민준의 부정행위를 용서했다고 볼 수 없다. 나아가 민준의 부정행위로 인하여 부부사이의 갈등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점, 민준의 부정행위가 상당한 기간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점 등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혼인관계 파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민준에게 있다. 따라서 민준과 혜민이 서연에게 지급하여야 하는 위자료의 액수는 2,000만 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주문을 낭독했다.
“민준과 혜민은 공동하여 서연에게 위자료로 2,000만 원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
서연 자신이 민준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보다 500만 원이 많은 금액이었다. 금액의 다과보다는, 서연은 판결을 통해 그나마 민준과 혜민에게 복수를 한 것 같아 행복했고, 민준은 되치기를 당한 듯 한 동안 법정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서연은 법정을 나와 햇살이 쏟아지는 출입문으로 향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이들의 양육비 문제로 다시 얽힐 일은 있겠지만, 민준과의 '부부 관계' 또는 '사실혼 관계'라는 질긴 굴레는 이 판결을 끝으로 비로소 완전히 매듭지어졌다.
서연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순간, 문득 찬우가 떠올랐다. 찬우로부터 위로를 받았던 것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민준에 대한 복수심으로 시작된 관계였던 듯 싶었다. 민준과의 관계가 정리된 이상, 그조차도 마음 한 구석에 곱게 접어 넣어야 맞을 것 같았다.
서연은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햇살이 창문을 넘어와 서연의 옆얼굴에 부드럽게 닿았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길 위에서, 서연은 한 걸음씩 자신만의 삶을 다시 써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