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대학에서 효주는 피아노를, 인철은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둘은 인철이 군대에서 군악대 생활을 마치고 음대에 복학한 후부터 사귀고 있었다.
어느덧 둘은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둘 모두 악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인철은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효주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효주야,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너와 내가 같이 학원을 차리면 좋을 것 같아. 내가 클라리넷 전공이지만 웬만한 관악기는 다 연주할 수는 있거든. 그래서 우리 학원에 등록만 하면, 피아노도 배우고 클라리넷이나 플루트 같은 다른 관악기도 배울 수 있다고 광고를 하면 사람들이 꽤 찾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오빠, 그거 괜찮은 생각이다. 근데 돈은 어떻게 마련해?”
"내가 조금 알아 봤는데, 너랑 내가 부모님들로부터 조금씩 지원을 받고, 부족한 부분은 사업자대출을 받으면 될 거 같아."
효주도 졸업은 가까워 오는데,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인철로부터 제안을 듣자 고민 끝에 그러자고 했다. 그리하여 둘은 1층에 편의점이 있는 3층짜리 아파트 앞 상가 건물의 2층을 빌려, 피아노와 클라리넷이라는 이름의 음악학원을 차렸다.
새로 바른 연회색 벽지에서는 아직 기분 좋은 접착제 내음과 새 가구 특유의 향이 감돌았다. 효주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가만히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그녀가 조심스레 C음을 누르자, 투명하고 맑은 울림이 텅 빈 레슨실의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갔다. 효주는 그 소리 안에 자신들의 미래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복도 건너편 관악기실에서는 인철의 분주한 움직임이 들려왔다. 인철이 조심스레 클라리넷 케이스를 열자, 짙은 밤색의 클라리넷이 매끄러운 표면을 드러냈다. 학원에 C음이 울려퍼자자, 인철도 클라리넷의 리드에 입을 대고 C음을 내보았다. 둘이 내는 C음의 화음이 학원에 오래 메아리쳤다.
그리고 둘은 얼마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까지는, 둘 다 이 선택이 서로를 더 단단히 묶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학원은 처음에는 인철의 예상대로, 피아노와 다른 관악기를 같이 배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원생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얼마 후 효주는 아이를 낳았다. 효주가 아이를 양육할 때는 효주의 후배가 임시로 피아노 강습을 했다.
인철이 혼자 학원을 운영할 무렵부터, 인철은 힘에 부친다면서, 친구들과 저녁에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 잦아졌다. 인철은 악단에서 쥐꼬리 월급을 받는 친구들에게 술을 자주 샀다. 인철은 그렇게라도 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털어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효주는 인철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철은 효주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효주야, 내가 왜 그 녀석들에게 술을 사줘. 걔네들도 월급 받잖아. n빵해서 마신거니까 걱정하지마"
그때쯤부터 인철이 가져오는 돈이 계속 줄어들 뿐만 아니라 계산보다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효주는 인철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인철은 원생도 몇 명 줄었고, 효주의 후배에게 월급을 가불해 주기도 했다고 둘러댔다. 효주는 가계부를 펼쳐 놓고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인철은 효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효주는 인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냐'고 따지는 날이 많아졌고, 그렇게 사소한 다툼이 지속되었다.
시간이 흘러 효주의 아이는 어린이집에 갈 나이가 되었다. 효주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다시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효주의 후배에게 지급하던 비용은 지급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물가도 오르고, 교육환경이 바뀌어서 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원생도 점점 줄어, 대출금 이자를 갚고 나면, 세 가족이 생활하기 힘들어졌다.
그 무렵, 1층 편의점 앞 유리에 ‘임대’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인철은 효주와 함께 출근하는 길에 그 플래카드를 보았다.
“효주야, 요즘 학원생이 많이 줄었잖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저 편의점을 인수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여보, 저 편의점도 장사가 안 되니까, 사장님이 가게를 접으시는 건데, 우리가 인수한다고 뭐 달라지겠어?”
“1층 편의점 사장님은 편의점 수입으로만 생활을 하셔야 하는데, 매출이 떨어지니까 생활이 힘들어지신 거지만, 우리는 여기 학원에서 나오는 수입도 있으니까, 1층 편의점 수입으로도 생활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러면, 학원은 어떻게 해? 당신을 찾는 원생들도 계속 있는데... 그 애들은 어떻게 해?”
“편의점은 낮에 알바를 쓰면, 그 시간에 내가 가르칠 수 있지. 그건 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
편의점을 꼭 인수해야 하는지, 인수한 이후에는 학원운영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걱정하는 효주와 달리, 인철은 꼭 편의점을 인수하고 싶어 했다. 인철은 학원에서 점점 줄어드는 원생 수보다, 매일 계산대 위로 쌓이는 현금이 더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인철은 하루 종일 집과 학원에서 효주와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에 점점 지쳐가,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 자유를 꿈꾸고 싶었다.
인철은 추가로 효주를 안심시키며 대출을 받아 편의점을 인수했다. 그런데 은행의 요구로 효주도 그 대출신청서에 연대보증인으로 서명해야 했다. 보증서에 서명을 하던 날, 효주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효주도 연대보증인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자, 편의점의 수입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철은 항상 '다 잘되고 있다'라고 말했지만, 학원도 그렇고, 편의점도 그렇고 계산이 맞지 않는 것 같아, 인철과 다툼이 잦아졌다.
그러는 와중에 편의점 알바생들은 툭하면 근무시간에 출근하지 않았다. 인철이 전화를 하면 아프다거나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는 등의 핑계만 잔뜩 늘어놓았다. 인철이 약간 심하게 잔소리라도 그만 두기 일쑤였다. 어쩔 수 없이 인철이 편의점을 지켜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에 비례하여, 플루트나 클라리넷을 배우려는 학원생들도 학원에 대한 불만이 많아졌고, 그 불만은 학원을 지키고 있던 효주에게 쏟아졌고, 강의실은 점점 비어갔다. 반면 인철은 그 시간에도, 학원이 아닌 편의점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효주는 그렇지 않아도 원생이 줄어 빈 강의실이 늘어나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상해가고 있었는데, 인철이 맡던 플루트와 클라리넷 반마저 줄어드는 걸 보며, 그 무게가 혼자에게만 쏠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인철은 2층으로 올라오는 날을 점점 줄여갔고, 그 시간만큼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점점 늘려갔다. 효주의 핸드폰에는 매일 문자메시지만 쌓였다.
'효주야, 오늘도 알바생들이 안 나와서 힘들다. 친구들과 술 한잔만 하고 들어갈게'
그러던 어느 날 한 학부모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학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짧게 울렸다. 효주는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효주가 아직 인철을 사귀기 전, 효주는 물리학과를 다니던 형기라는 남학생과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음악밖에 모르던 자기에게, ‘음악은 인간 영혼의 영롱한 결정체이지만, 결국 파동과 진동이라는 물리 법칙 아래 있는 거야’라고 이야기해 주던 그 남학생이 참 매력적이었었다. 4개월쯤 사귀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일로 다툰 후 헤어졌었다.
그 남학생이 어느덧 커서 아이와 문을 열고 들어왔던 것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학원에 들어오던 형기도, 종소리에 입구 쪽을 바라보던 효주도 깜짝 놀랐다.
효주는 낯익은 얼굴을 보는 순간 헝클어진 앞머리를 급하게 옆으로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한편, 아이에게도 “안녕~”이라며 인사를 했다.
형기도 깜짝 놀라며, 손을 급하게 옷에 문지르면서 닦아낸 후, 활짝 웃으며 효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 네가 피아노를 전공했었지. 여기서 학원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잘 지냈지? 정말 반갑다.”
형기는 이 앞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데,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해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데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형기는, 효주에게 자기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한 후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원생 수는 많은지, 학원 운영은 잘 되는지 등을 물었다. 효주는 음대CC였던 남편과 결혼해서 학원을 같이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 원생은 좀 줄었지만, 그럭저럭 학원을 운영할 만하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형기는 자기 딸을 잘 부탁한다고 하면서 3개월 치 수강료를 한꺼번에 결제했고, 딸이 피아노 치는 소리를 듣다가 딸의 손을 잡고 학원을 나갔다.
그 후로 피아노 강습이 있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마다 형기는 아이 손을 잡고 학원에 들러 효주와 인사를 나눴다.
“이건 효주 너 마시라고 가져왔어. 아이들 가르치다 보면 목 타잖아.”
형기는 그 다음 레슨 때부터 아이를 잡지 않은 다른 손에, 어떤 날은 커피를, 그리고 또 다른 날에는 조그만 케이크를 들고 오기 시작했다. 형기가 건넨 손에서는 달콤한 케이크의 향기와 쌉싸름한 원두 향이 났다. 인철이 요즘 들고 오던 폐기식품들과 전혀 다른 향기였다. 3개월 치 수강료를 결제해 주던 형기의 여유가 그 케이크와 커피에서도 느껴졌다.
그렇게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효주에게 '형기 딸의 레슨이 있는 날'이 아니라 '형기가 오는 날'이 되어 있었다. 효주는 형기가 올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고, 어느 순간부터 형기가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효주는 요즘 인철이 2층에 오지 않고 편의점을 지키고 있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형기가 오고 나서부터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효주야, 너는 아직도 피아노 칠 때가 제일 예쁘다.”
어느 날 형기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가는 길에 효주를 향해 한 마디를 남기고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날 효주는 형기가 사다 준 케이크를 보면서 포크만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학원 사무실에는 달콤한 케이크 향기가 한참을 머물렀다. 그 향기만큼 효주는 형기를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었다.
형기의 물리학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나란히 앉아서 서툴게 건반을 누르던 모습과 가느다랗던 손이 생각났다. 그때도 형기는 자기를 바라보며 웃었었다. "효주 너는 피아노 칠 때가 가장 예쁘다"는 말과 함께.
그랬던 형기가, 그 모습 그대로, 피아노를 치는 자기를 향해 웃어주면서 예쁘다고 해주던 모습이, 효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래 층 편의점에서 고생하고 있을 인철이 떠올라, 인철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 찰나에 인철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편의점 조끼를 입고 있던 그에게서 퀴퀴한 향기가 났다. 손에는 어느 날처럼 폐기음식이 들려 있었다. 인철은, 케이크에 관심을 보였다.
“어, 무슨 케이크야?”
효주는 인철에게 무엇이라도 들킨 듯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어느 학부모가 사다 주고 가셨어.”
“며칠 전부터 케이크가 자주 보이던데... 누가 사다 주는 거야?”
인철의 표정에는 의심이 묻어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자기도 찬혁이 엄마 알지? 찬혁이 엄마가 찬혁이 간식 사는 길에 하나씩 더 샀다고 하면서 주고 가신 거야.”
효주는 인철의 의심어린 시선을 피하면서, 얼버무렸다.
인철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얼른 집에 가자”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인철은 편의점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라고 하면서, 집을 나서, 어젯밤 케이크가 놓여 있던 2층 학원 사무실에 들어가 CCTV를 돌려보았다.
제1장 학원 사무실 CCTV
학원 입구를 비추는 CCTV에서 케이크를 들고 오는 사람은 찬혁 엄마가 아니라 처음 보는 아이의 아빠였다. 같은 시간 사무실을 비추는 CCTV 속 효주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며,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혼자 빈 강의실로 들어가 연습을 시작했고, 남자는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웃으며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효주가 그렇게 웃는 모습은 인철에게도 낯설었다. 정말 오래전에 봤던 모습인 것 같았다.
효주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손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효주의 입 모양을 보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는 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인철은 그렇게 볼 수 없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영상은 인철의 상상력을 독처럼 자극했다.
손을 놓은 후에도 효주와 그 남자는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효주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고, 그녀의 손은 자주 형기의 어깨와 팔을 툭툭 쳤다. 그러다 효주는 아이를 보러 강의실에 갔고, 그 남자도 따라나섰다. 복도를 비추는 CCTV에는 그 남자가 강의실 창문을 넘어 효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인철이 보기에 그 남자의 눈빛이 무척 그윽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는 딸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었을 수 있으나, 이미 인철은 그렇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철은 편의점 안에서 효주가 출근하길 기다렸다. 2층으로 올려가려던 효주는 인철에게 손이 잡힌 채 1층 편의점으로 끌려갔다.
제2장 편의점 CCTV
효주는 한참 동안 인철에게 형기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과거에 잠깐 사귀었었는데, 우연히 아이를 이 학원에 맡긴 것이다.',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워 찬혁 엄마가 케이크를 사줬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손을 잡고서 피아노 치기에 좋은 손을 가졌다고 이야기한 것뿐이지,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말을 주고받은 적도 없다.'는 이야기를 했고, 인철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효주는 그날 형기에게 전화를 해, 남편이 오해하는 것 같다면서, 아이만 학원에 올려 보내 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형기도 생각이 짧았다는 말고 함께 알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형기에게 전화를 끊고 나서, 효주는 한동안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 후, 효주는 2층 사무실에서 한참 동안 혼자 앉아 있었다. 인철이 CCTV를 보면서 자신을 감시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계산이 맞지 않던 가계부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효주는 속으로 ‘당신이 나를 감시한다면, 나도 당신을 감시해야겠다. 그러면 돈이 왜 비는지도 알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효주는 인철이 편의점을 비운 시간, 편의점 알바생에게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5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고는, 편의점 안에서 CCTV를 돌려보았다.
흑백 화면 속 인철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연미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조끼를 입은 모습,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손으로 물건을 받고, 바코드를 찍고, 돈을 세는 모습까지 모두 실물로는 봤던 모습이었지만,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남편의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쭉 화면을 보다가 효주는 멈춤 버튼을 눌렀다. 인철이 손님으로부터 받은 현금을 포스기에 넣지 않고,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는 것이 보였다. 효주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자신도 편의점을 인수하기 위해 연대보증까지 섰는데, 편의점이 망하면, 자신도 살아갈 수가 없는데, 인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편의점의 수입을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효주는 ‘나까지 꼭 서명을 해야 해? 그렇게 해서라도 편의점을 꼭 인수해야겠어?’라면서 거부했으나 인철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은행에 찾아가 서명을 하던 손끝의 떨림이 떠오르면서 손끝이 다시 떨리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 이 남자가 돈을 빼돌리려고 그렇게까지 편의점을 인수하려고 했었나.’라는 생각에 CCTV를 계속 볼 수가 없었다.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계산을 해도 계산이 안 맞았던 거구나, 그런데 이 남자는 이렇게 빼돌린 돈으로 대체 무엇을 했을까?’
인철은 빼돌린 돈으로 코인에 투자했다고 했다. 수익을 내면 말하려고 했는데, 계속 손실이 나서 말을 못 했다고 했다. 인철은 계좌내역서를 보여줬지만, 효주가 보기에 여전히 계산이 맞지 않았다.
효주는 며칠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인철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인철에 대한 믿음이 모두 깨졌다고 했다. 같이 운영하자고 했으나, 결국은 혼자 운영하게 된 학원의 어려움, 자기를 의심하면서 CCTV까지 보면서 뒷조사를 했다는 서늘함, 그에 더하여 자기를 배신하고 돈을 빼돌렸다는 배신감, 그러면서 끝까지 자기가 빼돌린 돈의 용처를 밝히지 않는 모습, 연대보증의 부담감 등으로 혼인관계를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인철은 효주의 이혼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전부 잘못했다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러면서도, 돈을 빼돌려 코인에 투자한 것 말고는 절대 다른 곳에 사용한 것이 없다고 했다.
효주는 결국 법원에 이혼을 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드디어 첫기일이었다.
효주는 소장에 기재된 내용처럼, 부부 사이의 신뢰가 모두 깨져 민법 제840조 제6호의 이혼사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철은 그에 대하여, 억울하다고 했다.
"판사님, 제가 원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돈을 빼내 코인투자를 한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사정만으로는 민법 제840조 제6호의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인철은 그에 덧붙여 효주에 대한 공격도 잊지 않았다.
"원고는 다른 남성과 학원 사무실에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는 등 부정행위를 한 잘못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에 해당하므로, 효주의 청구는 부당합니다."
첫 변론기일은 그렇게 당사자의 주장을 교환하는 것으로 끝났고, 다음 기일이 지정되었다.
효주는 첫 변론기일이 끝나고 난 후, 법원에 인철의 은행계좌에 대한 금융거래정보제출명령을 신청했고, 며칠 후 거래내역서가 도착했다.
효주는 그 계좌거래내역에서 인철이 보낸 송금내역에서 '아이유'라는 부기해 놓은 부분들을 발견했다. 한 달에 2, 3회씩, 매번 20만 원에서 30만 원씩. 송금 시각은 모두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두 번째 기일에 효주는 법정에서 판사에게, 피고로부터 한 가지만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이를 구석명신청이라고 합니다*).
"판사님, 저는 인철이 무슨 이유로 아이유라는 명의의 계좌에 위와 같은 금원을 보낸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제가 이 사건 청구원인으로 주장하고 있는 신뢰상실과도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이므로, 판사님께서 피고에게 이와 같은 돈을 보낸 경위가 무엇인지 설명하라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사는 효주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인철을 보며 물었다.
"그러게요, 피고... 왜 적요란에 '아이유'라 기재해서, 이런 돈을 꼬박꼬박 보냈는지, 그리고 그런 사실을 원고에게 왜 말하지 않은 것인가요?"
인철은 법정에서 고개를 숙인 채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법정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피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철은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피해갈 수 있을지 한참을 생각했다.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답변이 아닌 판사에 대한 질문이었다.
"판사님, 제가 그걸 꼭 밝혀야 하나요?"
판사는 인철을 다시 한번 압박했다.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있어야죠. 그렇지만 거짓말로 부부사이의 신의를 저버리면 안 되죠. 피고는 이미 거짓말로 원고의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원고가 이혼을 구하고 있잖아요. 피고가 이혼을 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사실을 말하고 신의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철은 다시 깊은 침묵에 빠졌다. 인철은 정말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철은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답변이 아닌 질문을 했다. 다만 이번에는 모든 걸 내려놓는 듯한 것이어서 저번과는 결이 달랐다.
"그럼 판사님, 제가 지금이라도 원고의 이혼 청구에 응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럼, 재판을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판사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판사의 말처럼 그 이후의 재판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이에 대한 양육권자와 양육비도 인철의 양보로 쉽게 끝이 났다.
원고와 피고는 3일쯤 지난 후 재판상 화해 조서라고 기재된 문서를 받았다. 화해조서라는 제목의 문서는 매우 건조했고, 효주와 인철의 혼인도 그렇게 끝이 났다.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사건본인에 대한 친권자 및 양육자로 원고를 지정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양육비로 이번 달 말부터 사건본인이 성년에 이르기까지 매월 말일에 매월 150만 원씩을 지급한다. 쌍방은 향후 재산분할 청구를 포함하여 일체의 민•형사상 청구를 하지 아니한다."
사실 효주는 며칠 전 편의점 알바생으로부터 인철이 밤에 친구들과 아이유라는 가명을 쓰는 실장이 있는 유흥주점엘 자주 다녔고, 술값과 팁 등은 주로 빼돌린 현금으로 지급했는데, 현금이 부족하면 계좌로 돈을 보내주곤 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런데 효주는 자기가 인철의 뒷조사를 했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자기 입으로 이를 이야기할 수 없어, 판사로 하여금 이를 물어봐 주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인철은 이를 비밀로 부친 채 이혼을 선택한 것이다.
효주는 인철과 하던 학원을 정리하고, 다른 건물에 피아노 학원만을 따로 차렸다. 학원 보증금을 빼서 은행 대출을 모두 갚았다. 1층 편의점을 인수하면서 받았던 대출도 인철이 일부를 갚으면서, 효주는 연대보증인에서 빠졌다.
효주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새로 차린 학원 창가에 앉았다. 이제 더 이상 학원에서는 인철의 클라리넷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효주는 피아노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예전 그 건물에서 인철과 함께 꿈꿨던 '화음'은 깨졌지만, 혼자 누르는 C음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단단하게 빈 강의실을 채웠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만의 음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형기의 딸은 효주가 새로 옮긴 학원에도 계속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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