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제가 이 남자와 바람을 피운 건 인정하고, 그 점은 원고에게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저도 이 남자가 몰래 찍은 몰카의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원고와 그 가족들은 그 영상을 모두 봤고,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이 저에게 너무 수치스럽고, 원고가 그 영상을 어디에 넘기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원고가 요구하는 돈을 지급할 수는 없습니다."
지우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과는 다르게 위자료는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도 이 상황이 버거운 듯 입술과 꽉 맞잡은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판사님, 저 여자가 제 남편이 찍은 몰카의 피해자인지 여부는 제 남편과 저 여자 사이의 문제일 뿐입니다. 수치스럽다구요? 그것도 저 여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저는 저 여자로부터 위자료는 꼭 받아야겠습니다."
지우를 향한 선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원고가 계속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는 이 남자를 몰카촬영죄로 고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혼을 해도 애들 아빠인 건 변함없는데, 애들 아빠를 파렴치한 몰카범으로 남게 하실려고 그러시나요?"
선미의 아픈 고리를 물고 늘어지는 지우도 조금 전보다 손끝의 떨림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선미와 지우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판사가 조용히 지우에게 물었다.
"자자 그만들 하시고, 피고 지우씨, 이 사건에서 진짜로 원하는 게 따로 있나요?"
지우도 법정에 오기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 있어서 그런지, 손을 가지런히 모으면서, 차분하게,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정리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원하는 건 원고가 저에 대한 청구를 포기하는 것하고, 이 남자로부터는 몰카 촬영에 대한 위자료로 3,000만 원을 지급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원고가 저에 대한 청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좀전의 3,000만 원에 제가 원고에게 지급해야 할 손해배상금 2,000만 원을 합한 5,000만 원을 저 남자로부터 받고 형사고소를 하지 않는 것으로 사건을 끝내고 싶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돌려 선미와 지우 사이에서 고개만 숙이고 있던 지만에게도 물었다.
"지만씨, 대체 지우와의 성관계장면을 왜 찍으신 건가요?"
지만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냥.. 호기심에......."라고 하면서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판사는 지만에게 지우가 제시한 화해조건을 수용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촬영경위는 그만하면 됐구요, 지만씨의 생각은 어떠세요? 5,000만 원을 지우씨에게 줄 수 있어요?"
지만은 힘겹게 고개를 들고서는, 판사를 향해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판사님, 원고와는 사실 오늘 조정을 앞두고 어제 이혼에 관해 합의를 했습니다. 제가 원고와 이혼하고, 위자료와 재산분할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소유권을 원고에게 이전해주고 장래 받게될 연금도 절반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저도 집을 나와서 새로 살 집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지우가 원하는 위자료 3,000만 원도 지급하기 어렵습니다."
판사는 속으로 ‘이 못난 양반아.. 그러게 왜 바람도 피우고, 그걸 찍기까지 하셨어요’라고 생각하면서, 한참동안 지만을 바라보다가, 이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는 선미에게 물었다.
"원고. 지만씨의 얘기처럼 이혼하기로 합의하신 거 맞나요?"
"예, 제 남편하고는 그렇게 합의했습니다."
"지우씨가 요구하는 화해조건.. 그러니까 지우씨에 대한 청구를 포기한다는 부분은 어떤가요?"
"판사님, 저는 제 남편보다는 저 여자가 더 밉습니다. 저 여자에게는 위자료를 한 푼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판사는 선미가 이해되는 한편으로, 지우가 말한 고소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려 선미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권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원고.. 남편이 공무원이잖아요... 만약 지우가 형사고소를 해서, 남편이 형사처벌을 받게 되면, 징계를 당할텐데요. 최악의 경우에는 파면까지 될 수도 있구요. 그러면 절반씩 받기로 한 지만씨의 연금도 못 받게 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선미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고소라는 말은 그저 지우가 돈을 주지 않으려는 술수로만 생각했지, 실제로 고소를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했다.
"판사님, 조정실 밖에 있는 딸들과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그렇게 하시지요. 이 사건은 잠시 후에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판사는 선미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속으로 '이 사건이 유난히 버겁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조금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잠시 휴정을 선언했다.
선미는 복도에 있던 두 딸을 찾았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작은 딸은 밖에서도 계속 울먹이고 있었던 듯,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엄마, 미안해, 내가 그날 아빠의 USB만 안 봤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해 엄마, 너무 미안해"
선미의 작은 딸은 학교에 가져갈 리포트 파일을 저장하기 위해, 아빠의 가방 안에서 USB메모리를 찾았다. 리포트 파일을 저장하려고 그 메모리의 폴더를 열었다가, 그 USB안에 있던, 아빠와 낯선 여자의 성관계장면이 녹화된 파일을 보았고, 이를 엄마에게 알리면서 이 사건은 시작되었다.
그래서 선미는 항상, 아빠의 부정행위를 직접 목격한 것이나 진배없는, 그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 작은 딸만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미어졌다. 선미는 조정실을 나와서도 작은 딸부터 안아주었다.
"괜찮아, 딸, 넌 잘못한 거 없어.."
"근데 엄마, 그 여자는 뭐라고 그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큰 딸이 엄마에게 물었다. 선미는 딸들에게, 그 여자가 아빠를 형사고소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우리쪽에 위자료 청구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딸들 역시 그녀에게 분노했고, 그들은 한참 동안 분노의 말들을 허공을 향해 뱉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큰 딸은 엄마에게 흔들리는 엄마를 압박하 듯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 잘 들어봐. 우리가 그 여자에 대한 위자료 2,000만 원을 포기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아빠한테 위자료 3,000만 원을 받을지 말지 모르는 거잖아. 지금 둘이 짜고서 3,000만 원을 주네, 마네 그렇게 연기할 수 있는 거니까, 우리는 그냥 강하게 나가는 걸로 하자."
"그런데, 진짜로 고소를 하면 어떡하니?"
선미는 큰 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걱정스런 눈빛으로 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작은 딸이 엄마에게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흔들리는 엄마를 부여 잡았다.
"엄마! 내가, 아니 우리가 받은 정신적 충격을 생각해봐봐,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가 있어? 고소를 당하는 건 아빠가 잘못해서 그런 거잖아, 왜 우리가 그런 사정까지 봐줘야 해? 엄마, 그 여자 절대 봐주지 말자, 응? 알았지?"
선미는 딸들의 말에 용기를 얻어 다시 조정실에 들어섰다.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먼저 들어와 있던 판사가 선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따님들과 이야기는 잘 해보셨나요?
"네, 판사님, 저는 지우에 대한 청구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지만은 울먹이면서, 선미를 향해 읍소하기 시작했다.
"여보, 나 좀 살려줘. 나는 이번 사건으로 다 잃었어. 애들은 내 전화도 안 받고, 당신과는 이혼도 하게 됐어. 저 여자는 날 고소하겠다고 하고 있는데, 고소까지 당하게 되면 내가 지금껏 일궈왔던 명예까지 모두 잃게 되는 거야. 제발 여보, 정말 마지막으로 나 한번만 살려줘"
선미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다. 판사는 다시 한번 이 사건을 해결할 모든 키를 가지고 있는 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판사의 숨소리와 시계의 초침소리, 선미가 고민하면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조정실의 오랜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선미의 머리 속에는 가해자이면서도 뻔뻔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던 지우의 모습, 울면서도 절대 양보하지 말라던 작은 딸의 얼굴, 비굴하게 나를 바라보던 남편의 얼굴, 그러는 한편 최악의 경우 파면과 연금 상실을 우려했던 판사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선미가 지우에게 청구했던 2,000만 원의 위자료는 지우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자신이 받은 고통의 댓가였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공무원 신분을 잃고,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장기적인 연금 수입이 사라지는 것은 2,000만 원으로 막을 수 없는 가족의 몰락이었다.
선미는 깊은 침묵을 깨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판사님... 저는… 지우에 대한 청구를... 포기하겠습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녀는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을 향한 애증과 지우를 향한 분노가 한 데 섞여 복잡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지만도 고맙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우만 원하는 걸 얻었다는 뿌듯한 표정으로 조정실을 빠져 나갔다.
선미도 울음을 그치고, 조정실을 나와 딸들을 데리고 법원 청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작은 딸은 여전히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큰 딸은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세 사람 사이에는 말 없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차에 타자마자 작은 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정말로 괜찮아? 그 여자한테 위자료를 받지 않기로 한 거… 후회 안 해?”
선미는 핸들을 꽉 잡은 채 한참을 앞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후회되지. 우리가 당한 수치와 분노와… 그 모든 걸 되갚아주고 싶었어. 그런데…”
그녀는 백미러로 두 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작은 딸의 떨리는 눈동자, 큰 딸의 굳은 표정. 그 얼굴들을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다시 저렸다.
“내가 포기한 건 돈이 아니라, 더 이상 이 지옥 같은 싸움에 너희를 끌어들이지 않고 싶어서 그랬어.”
그리고 선미는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오늘 너희들 말대로 하고 싶었어. 그런데 계속 싸우다 보면, 결국 너희가 더 아플 거야. 아빠가 파면당하고, 연금이 끊기고... 그러면 너희 대학 등록금은? 졸업하고 취업할 때까지 버틸 생활비는? 엄마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라고…”
큰 딸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 그냥 다 잊고 살아?”
선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잊을 수는 없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떻게 잊겠니, 하지만 싸움은 여기서 끝내자. 더 이상 그 사람들 이름 부르지 말고, 그 영상 생각도 하지말고, 우리 셋이서…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그날 저녁, 세 사람은 오랜만에 집 근처 작은 된장찌개 집에 앉았다. 메뉴판을 펼치며 작은 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나… 치즈 추가해도 돼?”
선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마음껏 시켜. 오늘은 다 먹어 치우자.”
큰 딸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공기밥 하나 더.”
작은 식탁 위에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아직 모든 상처가 아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지옥 같은 싸움에서 한 발짝 물러선 셋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으며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