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학원 - PART II

by 흠흠

이 이야기는 '파아오와 클라리넷, 그리고 CCTV'에서 이어지는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https://brunch.co.kr/@c053f7b095ba4ce/13



제1부 효주의 새출발


효주는 학원생들과 학부모 모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 나니 효주는 비로소 인철과의 인연이 모두 끝났다고 느껴졌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원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학원에서도 피아노 반은 수업을 계속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클라리넷과 플루트 반은 부득이 폐강하였습니다. 새로운 학원을 다니실 수 없거나, 클라리넷과 플루트 반 수강생들에게는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환불을 원하시는 분께는 환불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하고, 새로운 학원에서 새롭게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응원바랍니다. 베토벤 피아노 학원 이효주 드림'


얼마간 환불요구가 빗발쳤다. 예상했던 일이었고, 환불을 해줘야 하는 금액도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때 학원사무실에 '카톡' 음이 울려퍼졌다. 형기였다.


'왜 학원을 옮기는 거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학원을 옮기더라도 우리 딸은 네가 계속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괜찮지? 너의 새로운 시작을 항상 응원하고 있을게. 형기'


한동안 효주의 핸드폰에는 '원장님, 갑자기 학원을 옮기시면 어떡해요', '너무 멀어져서 계속 다니기 힘들 것 같아요', '클라리넷반은 왜 없어지는 건가요'라는 문자만 오고 있었다. 형기는 자기를 걱정해주는 유일한 학부모였다. 누군가가 자신 편이라는 느낌이 오랜만이었다.


'좀 복잡한 일이 있었는데, 다 해결됐어요. 응원 고마워요'


그날 오후 '축 이전, 대박을 기원합니다. 세영 아빠 형기'라는 리본이 달린 예쁜 안시리움 화분이 하나 새학원에 도착했다. 새로 바른 연한 녹색 벽지에 빨간색 안시리움은 잘 어울렸다. 효주는 화분을 받아 들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리본에 적힌 글씨를 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효주는 형기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오빠, 화분까지 보내주시고, 너무 감사해요. 세영이도 잘 가르칠게요'


그날 오후 학원입구를 비추는 CCTV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형기가 세영이를 학원 앞까지 데려다 준 후 세영이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효주가 세영에게 피아노 강습을 하다가 세영이에게 물었다.


"세영아, 왜 아빠만 세영이를 학원에 데려다 주셔? 세영이 엄마는?"

"아.. 엄마는 한국에서 안 살아요.. 엄마는 캐나다에 있어요.. 선생님은 캐나다 알아요?"



제2부 형기 부부


제1장 프롤로그


지금으로부터 4년전, 세영의 첫돌이 될 무렵이었다. 지윤은 아침에 형기를 출근시킨 후 세영과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모녀의 단잠을 깨우는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 나 이번 9월부터 캘거리에 있는 회사의 캐나다 지사로 파견을 가게 됐어"

"정말? 너무 잘 됐다.. 근데 파견기간은 얼마나 돼?"

"보통 2년이야"

"너무 짧다.. 나가는 김에 세영이가 학교에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쉽네"

"그건 어쩔 수 없지.. "

"9월이면 여섯 달 밖에 안 남았구나.. 오늘부터 열심히 준비해볼게.. 오빠.. 사랑해"



제2장 지윤의 학위취득


지윤은 형기와 함께 출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빠, 회사에 출근하면 나 혼자 집에서 세영이랑 있어야 하잖아.. 외국에서 혼자 애 보고 있으면 힘들 것 같아서 그러는데 베이비시터가 있으면 좋겠어..."

"그러겠다.. 내가 가능한지 한번 알아볼게"

"오빠.. 베이비시터가 가능하면, 베이비시터에게 세영이를 몇시간만 맡겨두고, 대학원에 가서 석사를 하고 싶은데... 그것만 하면 안돼? 나 대학때부터 캘거리 대학으로 유학 가고 싶어했던 거 오빠도 잘 알잖아.."

"세영이를 베이비시터에게만 맡겨 둬도 괜찮겠어?"

"나와 있는 것보다 베이비시터와 있는 게 세영이 입장에서도 영어를 더 자주 접할 수 있기도 하니까.."


그렇게 지윤은 한국에서 대학으로부터 어드미션을 받았고, 캐나다에 입국하자 마자 대학원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고, 지윤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있었다.


"오빠, 너무 미안한데.. 나와 세영이는 여기 남으면 안될까? 나는 여기 남아서, 박사까지 마쳤으면 좋겠고, 세영이도 여기서 영어를 배우면 좋을 것 같애... 내가 여기서 그만 두면, 2년간 여기서 고생한 게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아서 너무 아쉬워서 그래"

"여보, 그럼 나 혼자 귀국하라는 거야?"

"오빠, 오빠한테는 정말 미안해.. 근데 세영이를 위해서도 이게 좋은 것 같아.."

"박사 과정은 얼마나 걸려?"

"4년.."

"아니.. 지윤아.. 그건 좀 너무 긴 것 같은데.."


그런데 지윤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자기도 자기지만, 세영이 영어교육을 위해서라도 그 곳에서 학교를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형기가 귀국을 하면, 베이비시터 비용을 회사에서 부담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영과 지윤 모두 남을 수는 없었다. 선택의 순간이 오자 지윤은 자신만 캘거리에 남기로 했다. 세영은 조금 더 커서라도 캐나다에 올 수 있지만, 지윤은 지금이 아니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로 떠날 때와 달리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은 형기 혼자 준비를 해야 했다.



제3장 형기의 귀국


캘거리와 한국의 시차는 계절별로 15시간 또는 16시간이나 차이가 났다. 부부 사이의 통화는 사전에 미리 약속을 해야 겨우 가능했다. 아직 어린 세영은 엄마와 통화를 하기가 더 어려웠다. 부부사이의 대화는 일주일에 두, 세번에서 한번으로 줄더니 이 주에 한번 정도로 줄어들어 갔다.


그럴수록 혼자 세영을 키워야 하는 형기도 힘에 부쳐갔다. 어린이집 등원과 하원, 그리고 피아노 학원까지 아빠 혼자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지윤에게 보내야 하는 학비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형기는 귀국한지 2년만에 어머니가 계시는 동네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지윤은 캘거리에서 조차 형기가 시어머니집 근처로 이사하는 것을 반대했다. 자신이 언젠가 귀국한 후에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별다른 양육보조자가 없는 이상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세영은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마친 후에도 피아노를 계속 배우고 싶어했다. 어머니 집 근처에는 '피아노와 클라리넷'이라는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형기는 그곳에서 효주를 몇 년만에 만났다.



제4장 형기 부부의 파탄


제1절 파국의 전조


형기가 이사를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지윤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오빠, 교수님이 박사를 마친 후 여기 남아 있는 게 어떠냐고 하시네...'

'뭐...?'

'한국에 돌아가도 내 전공을 살리는 게 쉽지 않잖아.. 그리고 내가 여기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세영이가 초등학교 들어간 후에 쉽게 여기로 올 수 있으니까..'


형기는 문자를 읽고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형기는 답장을 하지 못한 채 세영이가 잠든 방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세영이는 요즘 부쩍 엄마를 찾고 있었다.


'아빠, 오늘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그리라고 했는데, 엄마 얼굴을 잘 모르겠어.'

'아빠,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이 피아노 엄청 잘친다고 칭찬해주셨는데, 엄마한테 자랑하고 싶어'


형기는 그럴 때마다 세영이를 안고 세영이를 달래주었다. 세영이에게 조금만 더 참으면 엄마를 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데 지윤의 문자는 그 세월이 더 길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형기는 이를 세영이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지윤에게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세영이가 엄마를 많이 보고 싶어 해'

'오빠, 정말 미안해... 나도 여기서 매일 세영이 사진 보면서 울고 있어. 그런데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나는 자야겠다.'


그렇지만 형기는 세영이가 엄마를 찾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형기는 뒤척이다 다음날 오후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밴쿠버를 경유하여 캘거리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제2절 형기의 이혼

1. 형기의 출국

다음날 아침 일찍, 형기는 세영의 손을 잡고 어머니 집을 방문했다.


"엄마, 당분간 세영이 좀 봐줘요"

"왜.. 갑자기"

"세영이 엄마에게 다녀올려구요"

"에미에게..? 무슨 일로...."

"세영엄마가 박사학위를 마친 후에도 캐나다에 있고 싶다고 해서요...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구요"

"그래, 알았다"


형기 엄마는 세영의 손을 잡고, "세영아 당분간 할머니랑 있자"라고 하면서도 아들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형기는 회사에 일주일 간 휴가를 신청하고 밴쿠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윤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지금 캘거리로 출발한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그날 오후 효주는 세영이 낯선 할머니와 함께 학원에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영아.. 오늘은 왜 아빠랑 안 왔어?"

"아빠는 엄마 만나러 캐나다 갔어요"

"그럼 이분은..?"

"아.. 우리 할머니에요"


효주는 세영 할머니에게도 두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2. 담판

지윤도 캘거리로 온다는 형기의 문자를 받고, 잠을 설쳤다. 형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지윤도 세영이 보고싶고, 젖살 가득한 귀여운 볼에 자신의 볼을 부비며, 세영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그렇지만 한국으로의 귀국은 지금까지 자신이 4년여간 일궈온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했다.


지윤도 충혈된 눈으로 공항에 나왔다. 부부 사이에는 짧은 포옹도 없었다. 형기는 무거우 표정으로 지윤의 차를 탔다. 지윤의 차는 캘거리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출발했다. 그런데 지윤의 차에는 더 차가운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지윤아, 2년 후에는 한국에 오겠다고 약속을 해줘"

"오빠, 4년간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정말 어렵게 잡은 기회야... 한국에 가면 뭐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수도 있는데.."

"너는 나랑 세영이 생각은 안하니?"

"그럼 오빠는 내 생각은 왜 안해? 2년만 더 있으면 세영이를 이리 데려올 수 있다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

"그럼 나는? 나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데? 네 말마따나 여기에서 자리를 잡으면, 영원히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거 아냐?"

"오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언제 영원히 여기에 남겠다고 했어?"

"언제까지 온다는 말도 안 하고 있잖아"


지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했다. 이 곳의 생활이 너무 좋았다. 학교, 학위, 그 이후 여유로운 생활이 모두 한국과 너무 달랐다. 그리고 자신의 힘들었던 한국에서의 학교생활도 떠올랐다. 세영에게 그 힘든 생활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꿈이 눈 앞에 있는데, 이를 모두 버리고 귀국한다는 것 생각해보지 않았다.


형기가 계획한 지윤과의 마지막 담판은 지윤의 묵묵부답으로 사실상 결렬되었다.


3. 파국

저멀리 형기가 묵을 호텔이 보였다. 형기가 입을 열었다.


"네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으면 우리 이혼하자."

"오빠!"

"세영이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세영이 키우느라 어머니도 힘드시고, 솔직히 학비도 부담되네..."

"정말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야? 학비를 끊으면 내가 잘못했다고 빌 줄 알아?"

"나도 그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힘들어서 그래"

"너무 한다 정말"


둘 사이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형기가 묵을 호텔이 점점 가까워졌다.

".... 그래... 오빠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

"...."

"나도 더는 오빠를 붙잡지 않을게."

"..... 기숙사에 있는 너와 같이 있으려고 이 호텔을 예약했는데, 그건 안되겠다. 여기 세워주라."


지윤은 아무 말 없이 차를 세우고 형기를 내려줬다. 지윤의 차문이 닫히는 소리는 차가운 캘거리의 공기보다 더 차갑게, 지윤과 형기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지윤은 차는 서서히 출발했고, 차문은 그렇게 잠겼다.


형기는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짐을 푸는 형기의 손은 유난히 무거웠다. 그리고 지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윤아, 내 방은 1203호야..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방으로 들어와 줘'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진작에 사라져 있었다. 지윤은 읽었으나 답하지 않았고, 확인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형기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다. 시차때문만은 아니었다. 지윤이 없는 1203호의 고요한 정적이 밤새도록 형기를 짓눌렀다


형기는 다음 날 날이 밝자, 회사의 캐나다 지사에 전화를 해서, 회사의 고문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변호사는 지윤과의 별거기간이 2년이 넘었고, 지윤이 이혼에 동의하고 있으므로, 합의이혼 절차로 진행하면 된다고 했다. 합의이혼는 서류심사만으로 진행되는데, 부부가 이혼 조건(재산분할, 양육권, 양육비 등)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한국과 달리 형기와 지윤이 법원에도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날 형기는 변호사로부터 설명만 듣고, 다시 1203호로 돌아왔다. 방에는 여전히 지윤의 흔적이 없었다.


형기는 다음날 다시 변호사를 찾아가 필요한 절차를 모두 위임한다는 서명을 한 후 한국에 귀국했다. 그리고, 변호사를 통하여, 양육권은 형기가 갖되, 세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각각 한달씩 세영을 캐나다에 보내 지윤과 보내기로 합의도 했다. 몇달 후 변호사로부터 이혼판결이 확정되었다는 메일이 왔고, 형기는 한국에서 이혼 신고를 마쳤다.



제3부 조용한 균열


형기는 어머니에게만 이혼 사실을 알렸다. 세영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고, 지윤과 통화할 일이 있으면 면접, 교섭 차원에서 통화를 하도록 해줬다.


효주에게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효주가 이를 알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효주의 학원에도 여전히 학원 앞까지만 바래다 주었다. 그런데 비가 오는 어느 쌀쌀한 날 오후였다. 세영을 학원에 데려다 주는 길에 효주로부터 문자가 왔다.


'오빠, 오늘은 비가 오고, 날씨가 춥네요.. 사무실에 들어 오셔서 몸 좀 녹이고 가세요'


형기는 예전에 인철이 자신과 효주를 오해했 듯, 자칫 지윤이 자신과 효주를 오해할까 싶어 학원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효주에게는 그러고 나서야 답장을 보냈다.


'미안.. 집에 어머니가 혼자 계셔서.. 그냥 갔다가, 세영이 수업 끝나면 다시 올게'


효주는 사무실로 들어 오지 않고 뒤돌아서는 형기의 뒷 모습이 못내 아쉬워 오래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곧 이해했다. 형기 오빠에게도 나름의 무게가 있겠지.


그렇게 겨울이 지나갔고, 세영은 우리나이로 일곱살, 효주의 아들 민수는 다섯살이 되었다. 효주는 민수가 어린이집을 마치면 민수를 자신의 학원에서 놀도록 했다. 세영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남자아이에게 관심을 보였고, 같은 연습실에서 피아노 건반을 같이 누르면서 놀고는 했었다.


어느날 저녁이었다. 형기는 거실에서 세영에게 간식으로 딸기를 먹여주고 있었다.


"아빠, 학원에 피아노 선생님의 아들이 있어"

"아.. 그렇구나.. 그 아이랑 친해?"

"응.. 나하고 잘 놀아줘"

"걔는 몇살이야?"

"다섯살.."

"이름은?"

"민수.... 그런데 엄마랑 아빠가 이혼했대"


형기가 들고 있던 딸기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세영이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형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놀란 세영이를 안아 주었다.


학원에서 효주가 처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음대 CC였던 남편과 같이 음악학원을 하고 있어요. 저는 피아노를 가르치고, 남편은 클라리넷을 가르쳐요'


그리고 학원을 옮긴다면서 보냈던 문자메시지도 떠올랐다.


'클라리넷 반은 부득이 폐강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받은 문자메시지...


'오빠, 오늘은 비가 오고, 날씨가 춥네요.. 사무실에 들어 오셔서 몸 좀 녹이고 가세요'


형기의 머릿속에서는 그제서야 그 모든 선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형기는 다시 딸기를 건네주며 세영에게 물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세영이는 민수에게 뭐라고 했어?"

"응, 우리 엄마 아빠도 이혼했다고 했어"

"너 그 이야기 어디에서 들었어?"


형기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할머니한테..."


세영은 놀라는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아빠가 세영이에게 미안해서 그래"


형기는 놀라서 울먹이는 세영을 안아주었다.



제4부 다시 새로운 출발


제1장 형기


형기는 그날 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며칠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만큼 그녀도 힘들었겠다'... 효주의 이혼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형기의 머릿속에는 그녀의 아픔이 자신의 고독과 겹쳐 보였다.


그 너머로 효주의 대학생때 모습도 떠올랐다. 옆에 앉아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녀의 모습, 얇고 가늘었던 그녀의 손가락, 그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 건반 위에 올려주며 '오빠 계이름으로 <라>음 아시죠? 여기가 오케스트라 연주 때 기준이 되는 <A>자리에요'라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수줍게 고백도 했었다. 고백하던 날 그녀와 강렬한 첫키스도 나누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넓은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지던 가을날.. 함께 교정을 거닐며 올려다보았던 하늘도 떠올랐다.


기억조차 나지 않던 사소한 이유로 그녀와 싸웠는데, 자존심 때문에 연락을 못했다. 지금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는 게 옳은 일인지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몇차례의 세영의 교습일이 흘러갔다.



제2장 효주


효주는 그날 밤, 거실의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어둡던 거실이 천천히 밝아지며, 플라타너스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교정이 펼쳐졌다. 어린 시절의 자신과 형기가 창밖으로 햇살이 밝게 비치는 피아노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형기가 안경 너머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빠는 손가락이 예뻐서 물리학이 아니라 피아노를 쳤어도 잘 쳤겠어요'

'건반이 이렇게 많은데, 어느 건반에서 어떤 음이 나는지 어떻게 다 외워서 연주를 해? 나는 못할 것 같은데..'

'다 외울 필요는 없어요.. 여기가 '도'음인 'C'음이고, 그리고 여기가 오케스트라 튜닝의 기본인 'A'인데, 계이름으로 '라'인데, 이런 것들만 알면 되는걸요'


옆에 있던 형기가 넋을 놓고 효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효주 너는 피아노 칠 때가 제일 예쁘다'


효주는 컴컴한 거실에 앉아있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도 힘들었는데, 오빠도 힘들었겠다'

효주는 상상속에서나마 형기를 위로하듯, 그날처럼 'A'음을 눌러보았다.


효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이 짙게 내린 창밖을 내다 보았다. 효주의 한숨이 깊어졌다. '인철로 인해 상처입은 내가 형기오빠를 위로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렇게 몇차례 더 세영 교습이 있었지만, 여전히 형기는 사무실에 오지 않았고, 효주도 세영에게 아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제3장 형기와 효주


한달 쯤 지나 다시 세영의 교습이 있던 날, 형기는 소개팅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끔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형기는 세영의 손을 잡고 케이크 가게에 들렀다. 이번에는 민수가 좋아할 공룡 케이크였다. 어쩌면, 이 작은 선물이 효주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원에는 효주와 민수가 있었다. 효주는 오랜만에 보는 형기에게 반가우면서도 쑥쓰럽게 인사를 했고, 형기는 꼬마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네가 민수구나"


효주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형기가 건넨 케이크를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포크에 케이크 조각을 꽂은 채 세영과 민수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달콤한 케이크 향이 사무실을 빈틈 없이 채워갔다. 두 아이를 바라보는 형기와 효주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세영과 민수는 케이크가 모두 사라지자 나란히 손을 잡고 빈 연습실로 뛰어갔다. 사무실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 전에 세영이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어.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서.. 많이 힘들었지?"

"저도 민수한테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좀 어때? 새로 옮긴 학원운영은?"

"그럭저럭 그래요... 오빠도 혼자서 세영이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시죠?’

".... 효주야... 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제가 무슨 오해를...."

"음... 그러니까... 혹시라도 네가 많이 부담되지 않으면..."

"...."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내가 조금 도와줘도 될까?"


그때 세영과 민수가 같은 연습실에서 나란히 누른 C음이,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풍성하게 학원의 강의실들에 울려퍼졌다.


효주는 형기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상처입은 자기가 형기에게 또 상처가 될까 조심스러웠다. 효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빠... 그럼 우리 이제 비 오는 날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되는 거죠? 저는 그거면 돼요"


형기는 효주의 조심스런 마음이 고마웠고, 자신이 거기에 부담을 얹어 줄 수도 없었다. 형기도 잠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연습실에서 다시 한 번 C음이 울렸다.

형기과 효주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 형기는 세영이와 함께 학원에 올 때마다 조금씩 더 오래 학원에 머물렀다. 효주는 자신이 강습때문에 자리를 비워도, 학원 사무실을 지켜주는 형기가 점점 든든해졌다. 그러는 시간이 많아질 수록 효주도 점점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민수도 세영이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비 오는 날이 올 때마다, 둘은 사무실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었다. 효주가 인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아픔, 그리고 형기가 지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짙은 아쉬움이.. 함께 나누던 커피의 따뜻한 온기에 초가 녹아내리 듯 사라져갔다.


그렇게 찾아온 봄날, 날이 화창했던 토요일에, 벚꽃이 만개한 제방길에서 민수와 세영이 앞장 서 걷고 있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형기는 어느새 효주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날 오후 형기는, 거실에서 피곤에 지쳐 잠든 세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언젠가 이 아이가 아빠에게 묻지 못할 질문을 하게 될 날을 떠올렸다. 효주는 산책으로는 부족했는지 거실을 놀이터 삼아 철없이 뛰어다니는 민수를 보며, '이 집에서 저 아이와 같이 놀아줄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고민들 속에 며칠이 지나갔다. 효주의 핸드폰이 알람 때문에 흔들렸다. 형기의 문자였다.


'효주야, 다음 주 월요일이 세영이 생일인데 토요일 저녁에 민수랑 같이 저녁 먹을까?'

'좋아요.. 어디서 봐요?'

'○○에서 볼까?'

'거기 엄청 비싼 곳인데...'

'세영이 생일이니까....'

'네.. 거기서 봬요'



제4장 프로포즈


제1절 형기와 세영


형기는 다이닝룸으로 예약을 하고, 조그만 반지를 샀다. 장미와 백합이 어우러진 꽃다발도 준비했다. 세영에게 빨간색 드레스를 입혔다.


"세영아, 피아노 선생님 어때? 좋아?"

"응"

"피아노 선생님이 세영이 엄마가 되면 어떨 거 같아?"

"네?"


세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쳐다보았다. 형기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딸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세영이 환하게 웃었다.


"아빠가 좋으면 나도 좋아요.. 그럼 민수가 진짜 내 동생이 되는 거에요?"


형기가 세영을 꼬옥 안아주었다.


제2절 효주와 민수


같은 시간 효주는 민수의 손을 잡고, 인형을 고르고 있었다. 효주도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옅은 그린색의 원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고, 민수도 작고 귀여운 정장을 입고 있었다. 민수가 예쁜 공주 인형을 골랐다.


"엄마, 이거 세영이 누나가 좋아할 것 같아"

"정말 이쁘다.. 민수가 어쩜 여자 마음을 이리 잘 알까?"


효주가 민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민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민수야, 민수 진짜 아빠 말고, 세영이 아빠 같은 아빠는 어때?"

"세영이 아빠는 나랑도 잘 놀아 주고, 나도 좋아요"


효주는 무릎을 꿇은 채 민수를 끌어당겨 가만히 안아주었다. ‘이 아이가 형기를 아빠라고 부르는 날이 올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살짝 아렸다



제3절 다이닝룸


형기와 세영이 먼저 도착했다. 효주를 기다리는 다이닝 룸 안.. 양초모양의 조명 끝부분이 촛불처럼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뽀로로가 눈 위에서 웃고 있는 조그만 케이크와 꽃다발이 식탁위에서 효주와 세영을 기다리고 있었고, 형기는 마른 침을 삼키며 넥타이를 계속 매만지고 있었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들리며 효주가 민수의 손을 잡고 다이닝룸 안에 들어섰다. 다이닝 룸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효주는 케이크의 달큰한 향과 장미향이 어우러진 룸에서 말끔하게, 정말 신사같이 차려 입은 형기와 눈이 마주쳤다.


"오빠..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세영에게 줄 인형이 든 쇼핑백을 들고 있던 효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효주는 다른 손을 가슴에 올리며 형기에게 물었다.


그날 저녁,

다이닝룸 안에는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마치 피아노의 C음처럼

맑고 길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몇달이 흘렀다. 형기와 효주의 손가락에는 가느다란 반지가 하나씩 끼워졌다. 세영은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했다. 공연이 끝나고 효주와 형기, 그리고 민수가 꽃다발을 들고 세영이를 축하해줬다. 자그마한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백합과 프리지아가 가득한 꽃다발을 든 세영의 모습은 마치 천사같았다. 그렇게 네 명은 공연장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형기와 효주의 핸드폰 바탕화면이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행복할 줄만 알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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