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파아오와 클라리넷, 그리고 CCTV'의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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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이 한달간 캐나다에서 지내기로 한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지윤은 한국에 절대 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세영은 보호자 없이 혼자 캐나다로 가기로 했다.
세영이 캘거리로 떠나는 날. 형기와 효주, 그리고 민수가 세영을 배웅하러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의 출국장에 서있었다. 형기는 세영의 목에 걸린 노란색 ‘UM(Unaccompanied Minor)’ 파우치를 몇 번이고 바로 잡아주었다. 그 안에는 세영의 여권과 항공권, 그리고 형기가 밤새 영문으로 작성한 아이의 알레르기 유의사항과 지윤의 캘거리 연락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침에 세영이, 형기 몰래 넣어둔, 형기와 효주 그리고 민수와 함께 찍은 콩쿠르 사진도 들어있었다.
보안 검색대 너머로 노란색 파우치를 흔들며 사라지는 세영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형기와 효주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세영은 그 노란색 파우치를 손에 꼭 쥐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민수도 한달에 한번 인철을 만나러 인철의 편의점으로 갔다. 인철도 그날만큼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편의점 조끼를 벗고, 깔끔한 흰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인철은 환하게 웃으며 민수를 안아주었다.
"민수야, 요즘 엄마랑 잘 지내고 있어?"
"응, 그리고 새로 생긴 아빠도 있고, 새로 생긴 누나도 있는데, 같이 잘 지내고 있어"
".... 새로 생긴 아빠?"
인철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응...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세영이 누나의 아빠인데, 새아빠가 됐어"
인철은 '세영'이라는 이름과 그 아빠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날 CCTV에서 봤던 장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아, 어쩐지 그때부터 의심스럽더라니.. 그 놈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만....'
인철은 '그때 조금 더 주장을 했어야 했는데.. ' 라는 아쉬움에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제1절 캘거리
모처럼 엄마를 본 세영은 지윤을 향해 달려갔고, 지윤도 세영을 꼬옥 안아주었다.
"엄마"
"딸.. 엄마도 세영이가 많이 보고 싶었어"
세영을 조수석에 태운 지윤이 차안에서 노란색 파우치를 손에 쥐고 있던 딸을 바라보았다.
"세영아,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
"응.. 보물"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어?"
"응.. 잠시만"
지윤은 세영이 꺼내준 사진을 보자마자,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지윤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 핸들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세영이 놀라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갑자기 왜 그래? 무서워... "
지윤은 놀란 세영을 안심시키려 목소리를 낮추었다.
"세영아... 이 사진 뭐야?"
"응 나 콩쿠르때 찍은 사진이야, 나 예쁘지? 피아노 잘 친다고 엄마한테 보여주려고 아빠 몰래 가져왔어"
"이 여자와 남자애는...?"
"응 피아노 선생님하고, 민수.. 새로 생긴 엄마와 동생이야"
"새엄마?"
지윤의 목소리는 다시 낮게 떨렸다.
지윤은 사진을 세영에게 건네고 다시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백미러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캘거리의 눈보라를 맞은 듯 창백했다. 방금 본 사진 속 그 여자의 환한 미소와 대조되는 자신의 초라한 분노가 지윤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의 차가운 모습 너머로 갑자기 캐나다로 날아와서 학비를 핑계대며 '우리 이혼하자'라던 형기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래서 이 인간이 한국이 아닌 여기까지 와서 이혼을 하자고 했었구나'
제2절 세영의 귀국
세영이 한달간의 캐나다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캘거리 공항에는 형기가 도착해 있었다.
"오빠, 재혼했다며?"
"응.. 그렇게 됐어"
"재혼하려고 나에게 이혼하자고 했던 거야?"
"오해하지마, 너와 이혼한 후 결정한 일이야.."
"그게 말이 돼? 나랑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결혼을 해?.. 내가 캐나다에 있다고 그 여자랑 마음껏 사귀고 있었겠지. 안 봐도 뻔해..."
"오해하지 말라니까.."
멀찍이서 놀고 있던 세영이 다가왔다. 둘은 싸움을 멈췄고, 딸을 향해 웃었다.
"딸, 겨울방학 때 또 보자..사랑해"
"응.. 엄마도 잘 있어"
지윤은 세영이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세영의 뒷모습에서, 어젯밤 세영이 소중하게 가방에 넣던 사진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캐나다에서 서명했던 이혼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윤은 멀어지는 형기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3절 이혼 무효확인 및 이혼취소소송
지윤은 자신이 당한 고통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형기에게 되돌려주고 싶었다. 지윤은 한국에 있는 친정 부모를 통해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이메일로 사건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냥 진행해 주세요'
지윤의 답장은 짧았다.
변호사는 두 가지 청구를 함께 제기했다. 하나는 캐나다에서 이루어진 이혼이 절차상 위법이므로 처음부터 무효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령 이혼이 무효가 아니더라도, 형기가 재혼을 위해 부정행위를 한 사실을 숨기고 지윤을 속여 이혼에 응하게 한 것이므로 사기이혼이어서 취소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집에 와 소장을 받아든 형기의 손은 떨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효주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의 곁에 앉았다. 형기가 고개를 효주에게 떨궜다. 효주는 그를 안아주었다.
그로 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부부에게는 또 다른 소장이 날아들었다.
제2장 인철의 손해배상청구
인철은 민수로부터 새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후 편의점 금고에서 효주의 학원에 있던 CCTV의 원본 영상이 담긴 USB메모리를 꺼내 다시 재생해보았다.
'이걸 따로 보관해 두길 잘했네'
인철의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CCTV 영상 속 효주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효주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한참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손은 자주 그 남자의 어깨와 팔을 툭툭 쳤다. 효주가 아이를 보러 강의실에 들어간 그 순간에도 그 남자는 강의실 창문너머로 효주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철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효주가 형기의 손을 잡고 있는 사진 몇장을 캡처해서 법원에 부정행위를 원인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에 첨부된 사진을 본 효주는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그날은 형기가 효주를 안아주었다. 효주가 울먹이며 형기의 품안에 파고들었다. 형기와 효주 모두에게 힘든 날들이었다.
형기의 재판이 먼저 진행되었다. 원고인 지윤의 변호사가 먼저 변론을 시작했다.
"원고와 피고는 모두 한국 국적자입니다. 따라서 둘의 이혼사건은 대한민국 법원이 관할을 가지는 것이 타당합니다. 캘거리 법원의 판결에는 우리 민사소송법에서 정한 요건이 결여되어 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지윤의 변호사는 사진 한장을 법정에 설치된 대형모니터에 띄웠다.
"피고는 원고와 이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재혼을 했습니다. 피고는 원고가 캐나다에 있음을 기화로 한국에서 제3자와 부정행위를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숨기고 원고와 이혼을 했습니다. 따라서 위 이혼은 사기에 의한 것이어서 취소되어야 합니다."
형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캐나다 캘거리에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캐나다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이혼절차를 진행했습니다. 이혼은 우리 법에 따르더라도 유효합니다."
형기도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대형모니터에 문자메시지를 하나 띄웠다.
'지윤아, 내 방은 1203호야..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방으로 들어와 줘'
이 메시지가 뜨자 법정이 술렁였다. 형기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판사님, 원고는 제가 효주와 부정행위를 하던 중에 이혼을 요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원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원고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저에게 돌아와 달라는 저런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형기는 긴장감에 온 힘을 다 쏟은 듯 자리에 쓰러지 듯 앉았다. 법정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판사가 양쪽을 둘러보았다.
"원고 변호사님, 방금 띄우신 사진 외에, 피고가 다른 여성과 부정행위를 하였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판사님, 원고가 개인적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피고와 재혼한 여성의 전남편이 전 배우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고 합니다. 원고에게는 증거가 없지만, 그 사건 기록을 확인하면 다른 증거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건 기록에 대해 문서송부촉탁신청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사는 다음 기일에 그 사건 기록을 확인해 보겠다고 하면서 기일을 마쳤다.
방청석에 있던 효주는 퇴정하던 형기를 다독여 주었다. 효주는 법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철이 지윤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기의 첫재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주도 법정에 출석해야 했다. 인철의 변호사가 변론을 시작했다.
법정에는 세영이 가지고 있던 사진이 먼저 대형스크린에 띄어졌다. 이 사진은 지윤이 인철에게 건네 준 것이 분명했다.
"피고는 원고와 이혼하자 마자 재혼을 하고, 새로운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물론 피고는 원고와 이혼한 후 새로운 남편을 만났다고 변명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의 부정행위는 원고와의 이혼 전부터 있었습니다."
변호사는 능숙한 솜씨로 CCTV영상을 재생했고, 거기에 담긴 영상이 대형스크린에 띄어졌다.
"방금 보신 화면들의 모습과 같이 피고는 원고와 이혼하기 전부터 폐쇄된 공간에서 제3자와 부적절한 스킨십 등을 했습니다. 그러다 좀 전에 보신 사진과 같이 결혼까지 한 것입니다. 피고의 부정행위로 혼인관계가 파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법정안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학원선생님과 학부모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효주의 귀에 들려와 박혔다. 인철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졌다.
효주는 고개를 숙인채 눈물을 닦고 있었다. 경솔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다 방청석에서 자기를 응원하고 있는 형기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남편과 대학교 때 잠시 사귀었습니다. 그러다 헤어졌고, 학원에서 학부모로 다시 만났습니다. 반갑고, 옛생각이 나서 친밀한 행동을 했던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화면 속의 모습이 전부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판사가 효주를 바라보았다.
"피고, 원고와 이혼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원고가 저와 같이 운영하기로 했던 학원과 편의점에서 돈을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효주는 눈물을 닦아내던 손수건을 움켜쥐고 판사를 바라보았다.
"재판과정에서 피고의 부정행위가 문제된 적이 있었나요?"
"원고는 이전 소송에서도 저 CCTV영상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부정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전 소송은 재판상 화해로 끝났군요."
판사가 안경을 고쳐썼다. 그리고 인철의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님, 피고의 말처럼 이전 소송에서도 피고의 부정행위에 대한 주장이 있었나요?"
변호사가 옆에 앉아있던 인철에게 확인을 했다. 인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변호사도 맞다고 했다.
"그럼 변호사님, 이전 소송에서 이미 한번 주장했다가, 재판상 화해로 끝난 문제를 다시 주장하시는 건가요?"
판사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묵직했다.
변호사의 얼굴은 붉어졌고, 인철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좀전의 미소가 사라진 인철과 변호사는 다급하게 귓속말을 나누었다. 잠시 후 인철은 고개를 숙였고, 변호사는 기록을 넘기는 시늉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재판장님, 한 기일만 속행해 주시면, 다음 기일까지 원고의 의견을 서면으로 정리해서 제출하겠습니다."
판사는 원고를 쓰윽 보더니 메모지를 덮으며 재판을 마쳤다.
"화해권고결정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더 주장하실 내용이 있으시면 이의신청서에 기재해주세요."
인철이 제기한 소송은 조용히, 그리고 허무하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또 다시 며칠이 지나 형기에 대한 두번째 재판날이었다. 지윤의 변호사가 신청한 송부촉탁문서가 도착했고, 그에 대한 증거조사가 이루어졌다. 효주의 재판에서 재생되었던 동영상이 형기의 재판에서도 다시 재생되었다.
방청석도 저번처럼 술렁였다. 판사가 방청석을 향해 조용해달라고 한 후, 판사가 입을 열었다.
"잘 봤습니다..."
법정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변호사님... 이 사건에서 피고가 이혼의 의사가 없는 원고에게 거짓말을 해서 이혼의 의사를 표시하게 했나요?"
"네?"
변호사는 판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판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판사가 안경의 가운데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밀어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제 말은, 사기란 허위의 사실을 고지해서 착오에 빠뜨리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남편의 부정행위가 실제로 없었어요.. 그런데 남편이나 제3자가 부인에게 부정행위가 있었다라고 거짓말을 해요. 그말을 들은 부인이 남편의 부정행위가 실제로 있었다는 착오에 빠져요. 그래서 원래는 이혼할 의사가 없었는데, 그 거짓말에 속아서 이혼할 의사가 생겨서 이혼을 하기로 합의를 해요.. 그래야만 사기에 의해 이혼의 의사표시를 한 경우로 볼 수 있는데, 이 사건은 그와 반대의 경우잖아요?"
변호사는 비로소 얼굴이 벌개졌다.
판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원고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인과관계가 있는지 의문이네요"
"다음 기일까지 서면으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일단 변론을 종결하고, 화해권고결정을 하겠습니다."
변호사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했으나, 판사는 변호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판을 마쳤다.
형기와 효주에게 각각 화해권고결정문이 도착했다. 당사자들은 달랐지만 결정사항은 모두 동일했다.
'원고는 이 사건 청구를 포기한다.'
인철과 지윤은 각각의 변호사들에게 이의를 신청해 달라고 했으나, 변호사들의 설득에 이의신청을 포기했다. 지윤과 인철 사이에도 서로 당신 탓에 패소를 했다는 내용의 이메일이 오고 갔다. 하지만 그 마저도 이의신청기간이 지나자 모두 조용해졌다.
두 개의 화해권고결정이 모두 확정된 그날 밤, 효주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까지 학원에 남아 악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형기가 따뜻한 차 두 잔을 들고 사무실 문앞에 서있었다.
'똑똑!'
효주의 표정이 놀람에서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효주야, 이제 정말 다 끝났네. 고생 많았다. 우리.."
형기가 건넨 찻잔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효주의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효주는 형기의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고, 형기가 효주를 가만히 끌어 당겨 꼬옥 안아주었다.
포옹은 짧았다. 효주는 형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맞추고는 형기를 밀어냈다.
"우리 얼른 들어가요. 애들 배고프겠어."
그날 저녁 피아노 앞에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형기의 손가락이 가장 낮은 건반 위에 멈췄고, 효주의 손이 그 옆에 조용히 내려왔다. 세영은 잠시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민수도 따라 하듯 같은 건반에 손을 올렸다.
잠깐의 침묵.
그 짧은 순간, 형기의 머릿속에는 캘거리의 차가운 눈보라가, 효주의 머릿속에는 인철의 퀴퀴한 편의점이 스쳐 지나갔다.
네 개의 손가락이 동시에 내려갔다. 작은 거실 안에, 다시 한번 하나의 C음이 단단하게, 그리고 길게 울렸다.
그 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네 사람이 같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글쓴이의 노트]
법정은 매일 불협화음이 가득한 곳입니다. 각자의 정당함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부딪히고, 누군가의 진실은 누군가의 거짓에 가려 비명을 지릅니다.
판사로서 그 소란스러운 소음들을 정돈하며 늘 자문했습니다.
'판결로 그들의 갈등이 매듭지어지더라도, 상처 입은 그들의 삶에 다시 화음이 깃들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한 저만의 조심스러운 바람 입니다.
삶은 때로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와 같습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관계는 예기치 못한 시련 앞에서 줄이 끊어지고 음이 이탈합니다. 형기에게는 캘거리의 차가운 눈보라가, 효주에게는 퀴퀴한 편의점의 정적이 바로 그런 삶의 불협화음이었을 것입니다.
법정의 판결은 사건의 끝을 알리지만, 각자의 인생은 판결 이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조율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과거의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하나의 낮은 저음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화음을 쌓아 올리는 과정,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아 누른 C음이 보잘 것 없는 이 이야기를 읽어주시는 여러분의 가슴에도 단단하고 길게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의 소란스러운 소음들에 마음이 흔들릴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여러분만의 음을 찾아 인생을 다시 조율해 보시길 권합니다.
부족한 저의 풍경화 속에 함께 머물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