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그리고 재범

신용카드 영수증의 가치 1.8억 원

by 흠흠

​제1부 용서


정진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가면서 핸드폰을 거실에 두고 나갔다. 남희는 우연히 정진의 휴대폰에서, 민서라는 이름의 여자가 보낸 ‘얼른 와, 나 그 모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남희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숨을 가다듬고, 메시지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보니, 며칠 전인 11월 6일 오후 4시 무렵이었다.


남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그날 오후를 떠올려 보았다. 정진이 느닷없이 낮에 집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면서 짐을 챙겨나간 날이었다.


정진은 담배를 다 피웠는지, 돌아가는 사정도 모른 채, ‘으~ 추워’라는 호들갑을 떨면서 집에 들어왔다. 남희의 추궁이 이어졌고, 빼박인 물증 앞에서 정진은 민서라는 여자와 모텔에 간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희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 아들의 옷가지와 책 등을 대충 챙긴 다음 집을 나왔다. 학원 앞에서 어리둥절해 있는 아들을 차에 태워 엄마만 계시는 친정으로 갔다. 처음에 친정엄마는 남희와 함께 정진을 욕하면서, 집을 나온 딸에게 “잘했다. 잘했어, 이 집에 머물러 있어도 된다.”라고 하면서 딸의 선택을 응원했다.


그렇게 몇 시간쯤 흘러, 흥분이 가라앉자 남희의 엄마는 남희에게 사과를 깎아주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너는 지금 직업도 없잖아. 에미가 받는 연금으로는 이 집에서 너랑 니 아들이랑 같이 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모르겠어, 그냥 너무 화가 나서 집을 나오긴 했는데, 앞으로 아들이랑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네. 내가 당장 직업을 구할 수도 없고...”


남희는 엄마가 건네준 사과를 먹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울먹였다.


“내일이라도 박서방이 오면, 못이기는 척 용서해 줘라. 이 에미가 이 말 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하구나, 그래도 어떡하겠니.”


남희 엄마는 갂던 사과를 내려놓고는 울먹이는 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정진이 남희 엄마의 집에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날은 내가 미쳤었다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면서 정말 잘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빌고, 또 빌었다. 당장은 정진과 이혼하고 따로 살 방도도 없는 마당이어서, 각서를 한 장 받고 이번에 한하여 용서를 해주기로 했다.


정진은 집에 도착하마자, 남희에게 ‘정진은 추후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이며, 또다시 바람을 피우면, 그때는 아무 말 없이 협의이혼하고, 위자료 및 재산분할로 2억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 주었다.


제2부 신용카드 영수증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남희는 정진이 벗어두고 간 정장 상의를 세탁소에 맡기기 위해 주머니를 털다가 술집에서 결제된 것으로 보이는 신용카드 영수증 1장을 발견했다. 무심코 버리려고 했는데, 신용카드 번호가 낯설었다. 결제일시는 일주일 전인 12월 1일 밤 11시 무렵이었다.


12월 1일이라... 정진이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서 들어온 날이었다. 그런데, 남희는 일찍 잠이 들어 정진이 몇 시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희는 애써 정진의 친구의 신용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일 것이라고 스스로 믿으려 했다. 그러나 가슴에는 차가운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희는 집에 들어온 정진을 붙잡고 누구의 카드로 결제한 것이냐고 물으면서, 정진의 지갑을 뒤져보았다. 지갑 속에서 낯선 신용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신용카드 영수증과 동일한 카드번호 밑에 영문으로 기재된 이름은 ‘MIN SEO’였다.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이름인데, 이미 너무 많이 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희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저번에 약속한대로 우리 이제 이혼해요. 내일 가정법원 앞에서 봐요. 알았죠?”

"여보, 내 말 좀 들어봐"

"됐어.. 들을 필요 없어"


남희는 뭔가를 설명하려는 정진을 뿌리치고, 아들을 태우러 학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다시 친정으로 들어갔다. 이번만큼은 남희의 엄마도 남희를 달래지 않았다.


남희는 다음날 가정법원 앞에서 정진을 만났다. 정진은 전날에 이어 계속해서 변명을 했다.


“여보, 나는 당신에게 각서를 써준 이후로 그 여자를 본 적이 없어. 근데 그 전에 그 여자에게 받아 둔 카드가 내 지갑에 있더라고, 나도 몰랐지. 술에 취해 결제를 하다가, 실수로 지갑 안에 있던 그 여자의 카드로 결제를 해버린 것 같아. 진짜 그 여자와 술 마시던 게 아니라니까. 여보, 제발 나 좀 믿어줘”


정진은 계속 변명을 하면서 협의이혼신고서 작성을 거부했다. 남희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정진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다.


“그럼 여보, 이렇게 해요. 오늘 협의이혼확인신청을 하고, 이혼숙려기간이라는 게 있다는데, 당신이 그렇게 떳떳하면 그 기간 안에 증거를 가져오든가 해요. 내가 그걸 보고, 협의이혼을 하든지 취하하든지 할게. 알았죠?”


정진도 남희가 요구하는 증거라는 것은 충분히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를 작성해 주었다.


정진은 며칠 후, 그날 함께 술을 먹었던 친구들이 써준 확인서라면서 종이 몇 장을 들고 남희를 찾아왔다. 그 확인서에는 같이 술을 먹었는데, 정진이 자기가 계산한다고 하면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증거라고는 달랑 그것뿐이었다.


남희가 어떻게 그날 그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인지, 그 경위를 알 수 있게 친구들과 나눈 문자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여 달라고 캐물었지만, 정진은 우물쭈물하면서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정진은 끝내 협의이혼의사확인기일에 모두 출석하지 않았다. 남희는 어쩔 수 없이 변호사를 선임해 법원에 부정행위를 이유로 이혼을 구함과 동시에 위자료 등을 구하는 소를 제기했다.



제3부 법정


원고석에는 남희와 변호사가, 피고석에는 정진과 변호사만 앉아 있었다. 남희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정진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법정 안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남희는 민서라는 이름의 여자를 상대로도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었지만, 정진이 인적사항을 알려주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다.


남희의 변호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사님, 정진은 11월 6일과 12월 1일 최소한 두 차례에 걸쳐 민서라는 여자를 만나 부정행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진은 11월 6일의 부정행위가 발각된 후 위자료와 재산분할로 2억 원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원고의 청구를 전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진의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론을 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민법 제841조는, '부정행위에 대해 사후 용서를 한 때에는 이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피고는 11월 6일에 부정행위를 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원고는 피고로부터 각서를 받은 후 그 부분을 용서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이유로 한 이혼 청구는 부당합니다. 그리고 12월 1일에 피고는 민서라는 여성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11월 6일에 민서로부터 카드를 받았는데, 이를 미처 반환치 못하고 지갑 속에 넣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술에 취하여 실수로 그 카드로 결제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원고의 청구는 모두 이유 없으니 이를 기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남희는 그 말을 들으며, 용서라는 말이 이렇게 이혼까지 가로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변호사가 제지했지만, 직접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사님, 피고는 다시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저와 엄마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이 지켜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용서한 겁니다. 다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저는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판사는 양쪽 당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추가로 제출할 증거가 있는지 물었다. 피고쪽에서는 친구들이 작성한 사실확인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판사가 사실확인서를 훑어 보면서, 정진에게 물었다.


“피고, 신용카드는 민서라는 분께 돌려줬나요? 그날 사용했던 카드대금은 어떻게 결제하기로 했나요?”

“남희에게 영수증이 발각된 다음날 민서에게 전화해서 신용카드를 잘라버릴 테니까, 분실신고를 하라고 했구요. 결제대금은 민서가 얼마 안 되니, 그냥 자기가 결제한다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따로 이체해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판사는 다시 한번 정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럼, 피고... 일단 그날 누구랑 술을 마셨는지 불러서 물어보십시다. 사실확인서를 작성한 친구들보다는 민서씨를 직접 불러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피고 생각은 어때요?”


정진이 당황한 듯 대답을 하지 못하자, 판사가 다시 한번 정진을 옭아매었다.


“피고... 원래, 부정행위에 대한 입증책임은 원고에게 있는데요. 원고가 입증을 위해 민서의 인적사항 등을 확인하려면, 신용카드사에 인적사항을 물어봐야 하고, 그렇게 실명과 주소 등을 알아낸다고 해도, 증인 신청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그런데, 피고는 민서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니까, 증인을 신청하는 게 수월할 것 같아서 그래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희도 자리에 앉아, 그 동안 정진에게는 셀 수도 없이 요구하였으나, 볼 수 없었던 민서의 얼굴을 법정에서 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면서 판사의 얼굴과 당황해 하는 정진의 옆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정진은 넥타이가 답답한지 연신 목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판사는 정진을 다시 한번 압박했다.


“피고, 법원이 사실을 인정할 때는 명확한 증거 외에도 ‘변론 전체의 취지’라는 게 있어요. 이렇게 민서에 대한 증인신청 조차 하지 못하는 걸 보면, 피고가 거짓말이 드러날까 봐 증인신청도 못하는 구나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법원에서는 변론 전체의 취지에 따라, ‘아! 그날 피고는 민서와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증인신청을 못하시겠어요?”


정진이 머뭇거리며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정진의 변호사가 그때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원고와 충분히 이야기를 해본 후에 다음 기일까지 증인신청 여부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다만 화해권고결정문을 양쪽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피고가 이에 대해 이의신청을 하실거면, 꼭, 민서에 대한 증인신청서를 같이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판사는 미소를 지으며 재판을 마쳤다.



제4부 화해권고결정


남희와 정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결정사항으로 기재된 화해권고결정을 받았다.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 및 재산분할로 2026. 1. 31.까지 1억 8,000만 원을 지급한다. 사건본인에 대한 친권자 및 양육자로 원고를 지정한다."


남희는 금액이 다소 줄었지만, 정진의 부정행위가 인정된 것에 안도했고, 1억 8천만원이면 새로 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시간, 정진과 변호사는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정진은 민서에게 부탁해 거짓말을 해달라고 부탁해보겠다고 하자, 변호사는 그건 절대 안된다고 말리며 정진을 질책했다.


"그러면 증인신문 이후에 상대방 측에서 민서의 기지국조회를 신청할 거고, 그러면 위증한 것이 금방 들통납니다. 그리고 민서를 위증죄로 고발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정진씨는 위증교사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진의 변호사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정진을 설득했다.

"화해권고결정을 수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진은 변호사의 말을 들으며, '그날 신용카드 영수증을 왜 버리지 않았을까'라며 자책했다.


제5부 에필로그


화해권고결정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남희는 1억 8천만 원으로 신축 아파트 전세를 얻어, 친정엄마와 살림을 합쳤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엄마에게 아이를 맡긴 뒤 남희는 집 근처 마트 계산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서서 바코드를 찍고, 손님들의 잔돈을 세는 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하지만 계산대 위를 지나가는 물건들처럼, 하루하루가 분명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가끔 신용카드를 내미는 손을 보며, 무심코 그날의 영수증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애써 그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몸은 힘들지만, 친정 엄마가 있어 마음은 편했다. 아파트에서 마트로 가는 발걸음도 훨씬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