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던 해 2월, 나는 친한 친구들 예닐곱명과 함께 풍물패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처음 동아리를 만들다 보니, 학교에는 풍물 치는 법을 가르쳐 줄 선배들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와 친구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가까운 대학교에 가서 대학생 선배들의 지도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대학생 선배들은 방학이니까 2주 동안 매일 연습을 하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연습 첫날, 우리를 기다린 건 대학생 선배들만이 아니었다.
연습장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들도 여덟명쯤 와 있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대학생 선배 형은 나에게 더운 데 학교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물 한 잔을 건네 주었다.
"어.. 그리고 진호야.. 인사해라, 여기는 K여고 풍물패 애들이야.. 애들도 우리에게 강습을 받고 싶다고 해서, 너희와 같은 시간에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괜찮지?"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또래 여자애들과 대학교 잔디밭에 같이 앉아서 악기 연습을 한다는 걸 싫어할 이유가 없어서, 우리는 선배들의 일방적 결정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렇게 우리와 K여고 아이들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그 무리 속에, J가 있었다.
2주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대학생 선배들은 연습이 끝나갈 무렵, 뒷풀이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1박 2일 간 지리산 천왕봉에 다녀오자는 제안을 했다. 나와 J는 참석하기로 했다.
선배들이 제안한 코스는 백무동에서 출발해 장터목에서 하룻밤을 잔 후, 새벽에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다시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일정이었다.
광주에서 백무동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로 남원까지 간 후 백무동계곡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시간은 지체되었고, 해지기 전까지 장터목에 도착해야 했던 우리들은 마음도 급했고, 발걸음도 따라서 급해졌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나는 힘들게 굽이굽이 좁은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정표에는 제석단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곳의 한쪽에는 샘물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제석샘의 물을 컵에 받아 마시고 있었다.
제석단은 천왕봉 바로 아래 제석봉의 서쪽 기슭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그곳에 서면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장대한 주능선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는 마침 해가 질 때여서, 그 장대한 능선과 함께 일몰까지 볼 수 있어서 정말이지 엄청난 광경이었다.
내가 이마에 밴 땀을 닦아내고 있던 그때 J도 제석단에 도착했다. J도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한 손을 허리에 걸친 채 넋을 놓고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J의 얼굴은 평범했고, 숏컷트를 한 머리에,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썼다. 항상 헐렁한 티셔츠에 품이 넓은 바지만 입었다. 그래서 나는 그전까지는 J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J의 모습에 마음을 완전히 뺏기고 말았다.
나는 방금 전 제석샘에서 받은 물을 컵에 담아 J에게 건넸다.
"물 좀... 마실래?"
내가 J에게 한 첫 말이었다. J가 물을 다 마시고 건네 주던 빈 물컵을 받을 때도 나의 마음과 손은 떨리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장터목에서 출발해 짙은 안개를 뚫고 천왕봉에 올랐다. 어두운 산길을 가린 짙은 연무는 우리를 몇 번이나 다른 길로 이끌었다.
하산하는 길, 새벽의 짙은 안개는 구름이 되어 숨이 막힐 듯한 비를 퍼부었다. 변변찮은 우의도 없던 우리는 그 비를 고스란히 맞아야했다. 우리는 빗길에 미끄러워진 길을 그렇게 조심조심 함께 걸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두근거리던 그 마음이 미끄러질까 겁이 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무뿌리와 돌을 지날 때, 미끄러지지 말라면서 내민 나의 손을 그녀가 잡아주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여름날 비에 흠뻑 젖은 그녀의 손에서는 체온 때문인지 희미한 김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따뜻했던 감촉이 아직도 내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지리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나의 마음은 그애와 둘이 나란히 서서 일몰을 보았던 제석단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기 위해 매주 토요일에 있는 연습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면서, J에게 줄 편지를 쓰곤 했다. 어린 소년은 J 생각에 발그래진 볼을 어루만지며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그러는 한편, 내가 다니는 학교에 계시던 선생님들 몇 분이 방학 중에, 전교조활동으로 인해 강제로 해직이 되었다. 학생회 간부였던 나는 학교측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도 해야했다.
나는 그 무렵 사범대에 가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전교조 활동만으로도 교사가 해직되는 세상이었다. 내가 꿈꾸던 멋진 선생님이 되기 위해, 학교에 남는 게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몇날 밤을 뒤척인 고민 끝에 나는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그 시절 어린 나는 여러 일로 청소년기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 두고 나서는, 그런 세상에서 교사가 되기도 싫고, 기성교육의 체제에 순응할 수 없다는 치기어린 이유를 대며, 대학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리고서는 취업을 하겠다며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 취득반에 다니고 있었다.
시간도 어느덧 12월로 접어들었다. 토요일 저녁, 여느 때처럼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J는 내게 근처 카페에 가서 파르페를 같이 먹자고 했다.
어두웠던 카페에서 J는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 주었다. 그 안에는 유안진의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그녀가 예쁜 손글씨로 앞뒤로 빼곡히 베껴 적은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당시 이미 유명한 수필이어서 나는 이미 읽었었지만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내가 다 읽어갈 때 쯤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진호야, 우리 이제 곧 고3이잖아... 우리 공부해야지.. 그래서 나는 풍물 연습도 오늘까지만 할려고.. 그러면... 오늘이 너를 마지막으로 보는 날일 것 같아서.. 너에게 선물로 주려고, 내가 어제 직접 적었어. 괜찮아?"
"어... 정말 고마워.. 너 글씨 정말 예쁘게 잘쓴다."
"진호야, 나도 정말 며칠간 고민하다가, 이렇게나마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따로 보자고 했어."
"근데 무슨 말을......?"
나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켰다.
"네가 나에게 써 준 편지들 말이야... 나를 좋게 봐줘서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나도... 사실은 네 편지 받으면 괜히 하루 종일 기분이 이상했어... 그런데 한편으로 정말 부담되더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호야, 그건 내가 정말 좋아 하는 수필이야. 너하고 나도 오래 향을 주고받는 지초와 난초의 사귐처럼 오랫동안 좋은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어... 내 맘 이해하지? 그리고 너 말이야... 고집 그만 피우고 대학갈 준비 해.. 너 공부 잘했잖아.. 우리 대학 가서 꼭 보자, 응?"
J는 그러면서 맞은 편에 앉아있던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고백도 못 했는데, 고백을 하기도 전에 차인 것 같았다. 창피해서 당장이라도 일어나야 했는데 그녀가 잡아준 손이 너무 따뜻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나도 J와 마찬가지로 풍물 연습은 그만 두었다. J뿐만 아니라 모두들 고3을 앞둔 시기였다.
나는 J를 잊고자, 연습장에 한용운의 시를 적고 또 적었었다. 그런데 그 시의 싯구처럼, 잊으려면 생각이 나고, 생각할수록 J가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잊고자 하면 할수록 J의 마지막 말도 또렷해졌다
'그래 그 애의 말처럼 대학에 가자. 대학에 가서, 다시 J에게 만나자고 하자'
결국 나는 대학을 가기로 하고, 준비하던 정보처리기능사시험을 포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해 2월 대입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학원 문과반의 사회, 세계사, 생물반에 등록을 했다. J에 대한 일방적 해바라기도, 대학을 안 가겠다는 치기도 열병이 낫듯 사그라졌다.
나는 대학에 갔으나 J를 만나지 못했다. 어디선가 길이 엇갈린 것 같았다. 많이 아쉬웠다. 나는 여전히 잊히지 않던 그녀 생각에 대학에 입학하던 그 해부터 졸업할 때까지 여름방학이 되면 빠짐 없이 지리산을 찾았다. 천왕봉을 앞둔 장터목에 묵는 날이면 항상 빈 물통과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제석단의 제석샘을 찾았다.
"야, 김진호.. 왜 가까운 곳에 있는 장터목샘을 놔두고 어디로 가서 물을 떠온다는 거야?"
친구들은 빈 물통을 들고 장터목샘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쪽으로 가면 나만 아는 비밀스런 샘이 있어"
길은 끊기고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졌지만, 내 기억 속의 그 길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열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생각을 하면서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럽게 적어 준 그 편지를 손가방에 넣어둔 채, 제석단에 올라, 혼자서 일몰을 보곤 했다. 편지지는 점점 낡아갔지만, 그날의 일몰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서툴었던 짝사랑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한 소년이 열병처럼 뜨거웠던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기억이다.
풍물패를 만들며 시작된 인연은 지리산 제석단에서의 일몰로 깊어졌다. 그곳에서 건넨 물 한 컵, 빗길에서 잡았던 손의 감촉, 그리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편지 한 장은 이후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작은 불씨가 되었다.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짧았던 그 인연은 그 시절의 나를 흔들어 깨웠고 멈춰 있던 발걸음을 다시 내딛게 했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리워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나를 성장하게 해준 한 시절에 있었던 고마운 사람에게 건네는 조용한 인사이다.
<그 다음 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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