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이Mousai(뮤즈)가 아홉이라 말하는 이 있네만, 무슨 허튼 소리! 보라, 사포가 열 번째 무사Mousa인 것을.
플라톤(?)
리라를 든 사포(BC 510).
리라를 든 사포(BC 510). 사포의 모습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사포를 리라를 든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관례로 굳어졌다.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고대 희랍 서정시의 시대
고대 희랍 문학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 양식의 문학이 크게 인기를 얻으며 집중적으로 창작되어 그 시대를 대표하게 된다는 점이다. 기원전 8~7세기 상고기 그리스 문명의 서막이 열림과 동시에 서사시(epic)의 시대가 함께 시작되었는데,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라는 인류 문학사 최고의 걸작을 배출하며 그 절정을 이룬 순간 촛불이 꺼지듯 서사시의 시대는 저물고, 기원전 7~6세기에 이르러 서정시(lyric)의 시대가 새로 열렸다. (이러한 흐름은 기원전 5세기 희비극의 시대, 5~4세기 역사, 철학 등 산문 시대로 이어진다.)
서사시가 옛날 신화 속 신이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웅장한 어조로 길게 노래하는 시라면, 서정시는 인간사의 다양한 면모를 두루 소재로 삼아 작가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는 짧은 시로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의 형태에 보다 가깝다. 다만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찬송가나 축가, 사회비판시, 애국심을 고취하는 시 등을 두고 서정시라고 부르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서정시는 그러한 내용의 작품들도 모두 포함한다. 또 서정시(lyric)의 어원이 현악기 리라(lyre)인 데서도 알 수 있듯 고대 희랍의 서정시는 기본적으로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로 부르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한 감상 포인트다. 영어 낱말 lyric이 노래의 가사라는 뜻이기도 한 까닭이다.
서정시의 시대라 할 수 있는 기원전 7~6세기 아르킬로코스, 알크만, 솔론, 알카이오스 등 여러 위대한 서정시인들이 범 그리스 문명권 여러 도시에서 나타나 활동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빛난다고 할 만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레스보스의 여성 시인 사포(Sappho)다.
열 번째 뮤즈, 사포(Sappho)
사포는 기원전 600년경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미 살아 생전에도 지중해 전역에 시인으로서 명성을 날렸던 스타였던 것 같다. 그의 명성은 사후에도 지속되어 거의 신화 속 존재와 같은 이미지로 남아 260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류 최초의 여성시인이라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일정 수준 이상 분량의 시가 남아있고 그 명성이 오늘날까지 알려져 영향을 미친 여성 문인들 가운데에서는 가히 최초라는 타이틀을 붙일 만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찬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서두에 쓴 플라톤의 말로서, 오늘날 영어식으로 흔히 "뮤즈"라고 부르는 아홉 명의 예술의 여신 "무사Mousa 여신들(복수형: 무사이Mousai)"의 일원으로 격상시켰다(다만 이 말을 한 것은 진짜 플라톤이 아니라 플라톤의 이름을 빌린 헬레니즘 시대 사람일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이 말 덕분에 사포의 가장 유명한 별명이 바로 "열 번째 뮤즈"가 되었다. 몇 가지 찬사들을 더 보며 고대에 그가 누렸던 위상을 느껴보자.
달콤한 목소리 사포의 노래 듣고 므네모시네 놀라서 일어났네. 이상히 여겨 혼잣말로 물어보네. "열 번째 무사가 인간 가운데 있는가?"
시돈의 안티파트로스(BC 2세기)
므네모시네는 기억을 상징하는 여신으로서, 최고신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아홉 명의 무사 여신들을 낳은 어머니다. 그 므네모시네가 사포의 노래를 듣고는 "내 딸이 아홉 명 말고 하나 더 있었던가?"하며 놀라는, 재미있는 장면을 상상해내어 묘사함으로써 사포를 칭송했다.
파르나스산(1510-11)
음악의 신 아폴론이 무사 여신들과 함께 노래하고 있으며,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 등 위대한 문인들이 어울려 있다. 그 가운데 왼쪽 하단에 비스듬히 앉아 한 손엔 종이를, 한 손엔 리라를 든 여성이 바로 사포다. (Sanzio Raffaello, "Chambre de la Signature : le Parnasse", 1510-11, (C) Photo SCALA, Florence, Dist. RMN-Grand Palais / image Scala)
내 이름은 사포. 호메로스가 시에서 뭇 남자를 뛰어넘었듯 나는 뭇 여자를 능가하였도다.
고대 시라쿠사의 사포 동상 명문
사포 흉상(BC 5세기) "에레소스의 사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사포가 한때 망명생활을 했다고 전해지는 시켈리아(시칠리아, 시실리) 섬의 중심도시 시라쿠사에는 사포의 동상이 세워져있었으며, 그 동상 아래 위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시인으로서, 문학가로서 호메로스에게 비견된다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겠으나 고대 희랍에선 그야말로 최대최상의 찬사다. 사포에게 주어진 이러한 영예는 로마시대로까지 이어졌으니 다음의 찬사가 이를 입증한다.
아무 수식 없이 "시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남자 하나, 여자 하나인데 이들이 각각 호메로스와 사포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갈레노스(서기 2세기)
레스보스의 사포(1904)
사포가 앉아있는 대리석 의자 끝에 호메로스 흉상이 있다. 사포를 호메로스에 비견한 찬사를 시각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John William Godward, "Reverie", 1904, Public domain via Getty)
우리가 알기로 유사 이래 지금껏 시인으로서 실로 사포에게 필적한 만한 여성은 아무도 없다.
이렇듯 사포가 시대를 뛰어넘어 이름을 떨쳤건만, 빛나는 명성에 비해 그의 일생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양도 적고 그나마 전해지는 정보도 부정확하다.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 맞는지부터 논란이 되는 호메로스와는 달리 사포가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데는 틀림이 없으나,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요즘 책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사포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사람들이 남긴 그에 대한 기록, 그리고 현전하는 사포 자신의 시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지금 기준으로야 고대 기록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래봤자 사포가 사망한 후 최소 수 세기가 흐르고나서야 작성된 것으로, 사실과 상상이 뒤섞여 있어 어느 정도까지가 믿을 수 있는 정보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노년의 사포가 젊은 청년 파온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하자 레우카스 절벽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기원전 5세기말 사포를 주인공으로 한 아테네 희극에 처음 등장한 이야기로서 일종의 신화적 상상이자 풍자일 뿐 사실이라 보기 어려운데도, 로마시대에 이르면 이것이 실제 사건으로 거의 기정사실화되었으며 중세, 근대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사포에 관한 글 다수에 사포의 최후가 이러했노라고 전해지고 있다.
사포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1881)
리라를 든 사포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숱하게도 그려졌다. (Miguel Carbonell Selva, Death of Sappho, 1881,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더욱 중요한 정보 출처는 사포 자신의 시이다. 사포의 시 다수는 1인칭 화자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내용이고 간혹 사포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는데, 고대나 현대나 대다수 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1인칭 화자를 사포 자신으로 보고, 시의 내용 역시 실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읊은 자전적 내용이라는 전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포의 삶을 재구성해왔다. 요즘에는 이런 전제에 대한 반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는 것 같다. 중년의 남성 작가가 소녀의 시점에서 시를 쓸 수 있듯, 1인칭 여성 화자라고 하여 반드시 여성 시인 그 자신이라고 보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그래도 이러저러한 근거들을 두루 살펴본 결과 대다수 사람들이 거의 합의를 본, 확실히 사실이라고 볼 만한 정확한 정보 몇 가지는 추려낼 수 있다.
첫째, 기원전 7세기(기원전 630(?) ~ 570(?))에 살았으며,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라는 도시를 주무대로 삼아 활동했다(다만 출생지는 미틸레네, 그리고 레스보스섬의 다른 도시 에레소스로 주장이 갈린다). 레스보스는 범 그리스 문명권에 속한 도시국가였지만 그 위치를 보면 그리스 본토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튀르키예,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에 인접해있었다. 따라서 당대 최고의 부국이자 화려하고 사치스런 생활양식으로 이름을 날렸던 오리엔트 왕국 리디아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으며, 사포의 몇몇 시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레스보스 섬의 위치 / 구글지도
둘째, 시의 내용과 분위기를 보건대 상당한 지위를 가진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사포는 레스보스 내 귀족 가문들 간의 복잡한 정치적 분쟁에 휘말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로 한두차례 추방되어 망명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가족관계로는 세 명의 남자형제(라리코스, 카락소스, 에우뤼기우스)가 확인되며, 클레이스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던 것 같다.
넷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정보로서,사포는 레스보스섬에서 여성들로만 구성된 어떤 공동체의 리더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사포의 시를 이해하는 핵심 정보이며, 나아가 사포라는 인물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된다. 이 공동체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대해 여러 설들이 제기되어 왔다. 19세기 유럽 고전학자들은 사포의 공동체를 귀족 집안 미혼 처녀들을 가르치는 일종의 학교로 보고 사포는 그 교사였다고 주장했는데, 오늘날에는 별로 동의하는 이가 없는 것 같다. 여신(아프로디테, 헤라, 무사이, 카리테스 등)을 숭배하던 종교 집단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사포가 여사제였으리라고 주장한다. 요즘 많은 호응은 얻는 설은 이 공동체가 도시의 축제나 제사, 또는 보다 소규모의 향연 등에서 노래를 부르던, 소녀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이었으며, 사포는 이 소녀 합창단을 위해 노래를 지어 가르쳐주고, 훈련시키고, 함께 공연하기도 하는 합창단 리더였으리라는 주장이다.
고대 희랍의 다른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사포의 시 역시 리라 등 악기 연주에 맞추어 노래하기 위한 일종의 가사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사포의 시를 수집하여 아홉 권의 책으로 편찬했다고 하며, 그 양은 추정컨대 행수로 세어 1만 행 이상이었을 것이다.
사포의 시는 고대 작가들이 자기들의 저술 속에서 사포의 시를 인용한 인용문, 또는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적힌 유물로 전해지는데, 아쉽게도 현전하는 사포의 작품은 고작 650행 정도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완전한 형태로 보전된 시는 단 한 편뿐이며, 절반 이상이 남아 있어 시의 형태를 갖춘 것이 10편 정도, 그 외에는 일부 문장이나 낱말만 남은 것 300편 미만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실정 때문에 사포의 시는 Fragment(단편(斷片))로 번호를 표기하여 구분한다.
사포의 단편이 담긴 파피루스 파편(서기 2세기)
파피루스는 세월의 힘을 이길 수 없기에 보존 상태가 대부분 이러하다.(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사포 시의 성격은 어땠을까? 과거에는 후대의 시 낭송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하여 사적이고 내밀한 자리에서 사포 자신이 직접 읊었을 것이라 가정했지만 오늘날에는 의견이 갈린다. 즉 그 동안의 생각대로 사적인 노래였는지, 아니면 공적인 장소, 이를테면 축제나 제사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노래였는지 논쟁이 되고 있으며, 독주곡인지 합창곡인지, 사포가 직접 불렀는지 아니면 자신은 작곡만 하고 합창단원이 부르게 했는지 모두 논의 대상이다. 단, 결혼 축하노래들은 틀림없이 합창곡이었을 것이다.
사포의 사도들(1896)
사포의 노래가 공공장소에서 공개적으로 공연되었다는 주장이 옳다면 그 모습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Thomas Ralph Spence, "The disciples of Sappho", 1896, Public domain via Artvee)
사포의 시 속 주제는 다양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대에나 후대에나 사포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사랑에 관한 시, 그것도 여성 화자가 다른 여성에 대한 에로틱한 열정적 욕구를 세련되게 노래한 시들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갈망의 상대로 아티스, 아나크토리아, 공길라, 미카 등 여성들의 구체적인 실명을 종종 언급하는데, 이는 사포가 자신이 이끌던 공동체 구성원들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사랑시와 함께 여신들에 대한 찬송가도 사포 시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다른 고대 희랍 시인들도 물론 너나없이 신을 부르는 찬송가를 썼지만, 사포는 여성으로서 여신들을 집중적으로 숭배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역시 뜨거운 사랑의 화신 사포답게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대표적인 찬양의 대상이었으나, 그 외에도 헤라, 데메테르, 아르테미스, 무사이, 카리테스(우미(優美)의 여신들) 등 다른 여러 크고작은 여신들도 두루 찬송하고 있다.
결혼식 축가도 다수 남아있다(위에서 언급한 사포의 시집 아홉 권 중 한 권은 통째로 결혼식 축가 모음집이었다고 한다.). 결혼식의 흥겨운 분위기를 풍기는 축가도 많지만, 소위 결혼 비가(悲歌)(Wedding Cry, Wedding Lament)라는 작품들도 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거니와 특히나 여성의 활동이 극도로 제한적이었던 고대 희랍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이 나고 자란 정든 집을 떠나 시집 간다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할 수는 없었을 터, 남성 시인이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새 신부만의 복잡한 심경과 비애에 공감하고 대신 노래해주는 듯한 시들도 남아있으니, 이런 시들이야말로 여성 시인으로서 사포의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또 누군가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풍자시들도 있는데, 그 대상은 정치적 반대 가문일 수도, 사랑의 경쟁자일 수도, 혹은 비슷한 학교(?)를 운영하는 동종업계 경쟁자였을 수 있다.
이외에도 가족에 대한 노래, 교훈시, 나이듦을 탄식하는 노래 등이 남아 있다.
동성애자 사포?
사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동성애 이야기를 빼트리긴 어렵다. 오랜 세월 동안 사포는 여성 동성애자의 상징처럼 여겨져왔으며, 사포 덕(?)에 원래 사포의 고향인 "레스보스 사람", "레스보스에 관한"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Lesbian은 "여성 동성애자"라는 더 강력한 새로운 뜻을 갖게 되었다. 레즈비언만큼 많이 쓰진 않지만 원래 "사포에 관한"이라는 뜻의 sapphic이라는 단어 또한 lesbian과 같은 뜻이 되었다.
동성애자 사포 이미지의 근거는 역시 그가 지은 사랑 노래들로서, 1인칭 여성 화자가 복수의 다른 여성을 두고 부르는 끈적끈적한 사랑의 노래는 사포가 속했던 여성 공동체의 성격까지 에로틱한 것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성소수자 그룹(LGBTQ)에서 사포는 거의 대선배이자 숭배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유럽의 여성 동성애자 커플이라면 그리스 레스보스섬으로 여행을 떠나 사포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에레소스의 해변을 함께 걷는 것이 일종의 버킷리스트라고 한다. 거의 종교적 순례에 가까운 느낌이다. 심지어 이 에레소스에서는 매년 "국제 에레소스 여성 축제"가 열려 전 세계 여성들, 특히 여성 동성애자들만의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사실 사포가 생존했던 시대에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기원전 5~6세기 고전기 희랍 문헌에서는 사포가 동성애자였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같은 레스보스 출신 남성 시인 알카이오스와의 염문설이라든지 앞서 언급한 파온을 향한 구애 이야기 등, 사포가 이성애자임을 전제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보다는 여러 남자들과 동시에 연애를 즐기는 문란한 이성애자로 묘사되는 편이었다.
알카이오스와 사포(BC 475)
이 둘은 레스보스 섬을 대표하는 동시대의 남녀 시인으로서, 당연하게도 후대인들에게흥미로운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ArchaiOptix,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에로스와 함께 있는 사포와 파온(1809)
사포는 젊은 청년 파온에게 기대어 거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날개 달린 사랑의 신 에로스가 리라를 받쳐주고 있다.(Jacques-Louis David, "Sapho, Phaon et l'Amour", 1809,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기원전 3~4세기 헬레니즘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포가 동성애자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로마시대를 거쳐 이러한 관념은 거의 확정적 사실로 굳어져 중세, 르네상스 시대,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전해졌다.
동성애자 사포 이미지를 깨고자 가장 노력했던 이들은 19세기 유럽의 고전학자들이었다. 사포의 예술적 위대함은 찬양하되, 동성애자라는 혐의(?)는 벗겨내주고 싶었던 고전학자들은 사포를 일종의 여학교 교사와 같은 존재였다고 하면서,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표현들은 스승으로서 어린 제자들에게 느낀 끈끈한 유대감, 즉 사제의 정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멀쩡한 가문의 여성이 집밖으로 나와 활동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예외적이고 나아가 파격적이기까지 했을 고대 희랍 사회에서, 이토록 공개적으로 여성 간의 동성애적 관계를 드러내놓고 노래로 불렀다는 것이 과연 용납 가능한 일이었을지에 대한 의문은 분명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 같다.
논란을 넘어, 사포의 기억
어쨌든 사포가 살았던 바로 그 당대의 기록이나 사포 자신의 시 속에는 그가 동성애자였다느니 혹은 그렇지 않다느니 하는 확실한 언급은 하나도 없다. 사포를 동성애자로 볼 근거만큼이나 그 반대의 근거도 충분히 있으며, 더 확실한 증거가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2600년 전에 살았던 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지금 단언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동성애자였을까 아닐까 하는 문제는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예술가들의 말초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주제였지만, 그의 작품을 즐김에 앞서 반드시 확정지어야만 할 것은 아니다. 사포의 작품 속 화자가 사포 자신이든 아니든, 그의 사랑 노래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실존인물이든 가공의 인물이든, 그 안에서 그려지는 감정이 에로틱한 것이든 아니면 우정이나 사제의 정이든,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포가 서양 문학사 최초의 여성시인으로서, 숱한 남성작가들이 결코 알아챌 수 없었던 여성들만의 감정, 느낌, 정서를 처음으로 남성 예술가의 목소리를 거쳐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스스로 솔직하고 뜨겁게 그려냈다는 사실 아닐까?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까마득한 고대, 다른 어느 문명과 마찬가지로 극도로 남성중심적이었던 희랍 문명권의 변방 어디선가 이러한 시인이 등장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공간이 있었다는 의외의 사실 또한 간과해선 안 될 부분 같다.
사포는 자신의 여러 시 속에서 "기억"을 노래했다. 자기 자신,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기억되리라는 희망, 아니 반드시 기억되리라는 확고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그의 말들은 결국 예언이 되어 현실로 이루어지고야 말았다.
Rayor, Diane J., trans. & ed. 『Sappho: A New Translation of the Complete Wor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nd ed. 2023. Introduction and notes by André Lardinois.
Anne Carson ., trans. & ed.『 If Not, Winter: Fragments of Sappho』, Vintage; Reprint edition, 2003
한정숙,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도서출판 길, 2008.
헤르만 프랭켈 ;김남우,홍사현 옮김,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 :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 희랍 서사시, 서정시와 산문의 역사.1-2』, 아카넷,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