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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10. 2023

나약함을 드러내도 괜찮아.

결핍이 주는 힘


아이는 가끔 집의 평수를 묻는다. 아빠는 얼마를 버는지 묻기도 한다. 멋지게 꾸며놓은 친구의 집을 갔다 온 뒤 정말 부자라며 부럽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기도 한다. 아이들끼리 집의 평수를 논하고 얼마를 버는지 이야기를 한다고도 하더니. 나는 조금 뾰족해진 마음으로 우리 집의 평수를 말하고 아빠의 월급을 아주 낮춰서 이야기해준다. 그러다가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는 어렸을 때 집이 많이 가난했어.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밤에는 동생하고 같이 갔었는데 진짜 무서웠겠제. 밑에 내려다보면 똥이 차 있는 화장실도 써봤다 엄마는.”


애들은 더욱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엄마 방이 얼마만 했는데?”


“우리 집 안 방, 반만 한 방이 두 개 있었는데 거실도 없었다. 우리 집 현관있제? 화장실이 그만한데 세면기도 없어서 수도꼭지로 물 틀어서 씻고 그랬다. 뜨거운 물도 잘 안 나와서 가스레인지에 물 데워서 쓴 적도 있는데.”


나는 한 술 더 떠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더 어릴 때는 여러 집이 모인 곳에 살았는데 화장실도 같이 썼다이가. 문을 드르륵 열면 바로 안방이 나오는데 문도 자물쇠로 잠그고 그랬다이가.”


아이들은 무슨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내 이야기에 귀를 쫑긋 기울인다.


“엄마는 연탄으로 방에 불도 데우고 그랬다이. 너거는 연탄 모르제?”


그게 뭐냐고 묻는 아이.


“엄마가 옆집에 사는 친구 데리고 와가지고 연탄불구경도 시켜주고 그랬는데. 하이튼 엄마는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아서 조금만 좋은 거 봐도 다 좋드라.”


지금 가진 것도 감사하자고 약간의 교훈을 섞어서 이야기를 들려주긴 하는데 아이들에게 통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옛날 살았던 얘기를 시시때때로 들려준다. 지금 우리 사는 집은 엄마가 살던 옛날 집에 비하면 참 크고 좋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진솔한 게 내 매력이라 이제는 생각하지만 옛날부터 이렇진 않았다. 내 사는 모습을 꽁꽁 숨기고 살았다. 누군가에게 허름한 우리 집을 들킬까 봐 망을 보며 골목을 뛰쳐나간 적도 많았다. 살아가는 모습을 꾸미진 않았지만 어찌 사는지 말을 먼저 꺼내지도 않았다. 부끄러웠다. 내 사는 곳이. 초라한 내 모습 같아 고개 들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그런 날들 속에서도 씩씩했다. 엄마는 만날 말할게 있어도 참는다 했지만 내가 보기엔 다부지게 할 말은 하고 사셨다고 생각한다. 궂은일을 하셔도 자신의 모습에 주눅 들지 않아 보였고, 초라하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여긴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그런 엄마는 아주 세월이 흘러서 내게 말했다. 이사를 너무 자주 다녀서 살았던 시간들이 다 들키는 것만 같아서 등본 떼는 일이 부끄럽다고. 그래도 더는 빚을 안 지려고 돈에 맞는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고. 그렇게 엄마는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내가 서른이 되는 날,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날은 내게 너무 기쁜 날이었다. 고생길이 훤했던 부모님이 아파트라는 곳에 살게 되었다는 게 내게 꿈같았다. 초라하고 수치스럽게 여겼던 내가 살았던 집의 기억들이 와장창 무너진 순간이었다. 엄마는 오늘을 위해서 이렇게 견뎌 오셨던 거구나. 현관도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진 곳이 없었던 집의 굴레에서 벗어나 세면기도 있고 욕조도 있는 아파트는 어린 날에 살던 곳에 비하면 대궐이었다.



엄마는 살아왔던 흔적을 누군가에게 숨기진 않았다. 꾸미고 보태지도 않았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아마도 삶에 대한 진솔함을 엄마가 된 뒤로 내가 물려받았듯싶었다. 나 역시 내 삶을 꾸미고 감추려 하지 않았으니. 언젠가부터 있는 그대로 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졌으니.



어릴 적에는 내 사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꽤나 마음을 움켜쥐고 살았다. 혹여나 누구에게 들킨 날에 나는 구겨진 종잇장 같았다. 나를 무시하고 깔보는 일이 죽을 듯이 두려워서 온 힘을 다해 숨기며 살았는데. 들켜 버릴까 봐 조마조마 한 날에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안간힘을 썼는데 가난을 들키면 허무했다. 무시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내 사는 모습이 탄로 난 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어쩌다가 나의 숨기고 싶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까. 그건 아마 어쩔 수 없이 들키는 날들이 잦아져 자연스레 그런 탓이 있을 것이다. 나처럼 약한 모습을 등지고 자신을 부풀리는 타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이기도 했다. 차라리 말을 하고 편안하게 지내지. 뭐가 불안해서 자신을 저토록 포장지로 에워싸는 걸까. 그러다 내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나도 그랬지. 나도 죽도록 싫었지. 그 생각을 하니 이해가 되었지만 나는 다시 불안했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내 살아온 모습들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또 다른 이유는 이제는 그 일들이 나를 무너지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에 대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실수하는 자신에 대해 관대하고 부족하고 모자란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그렇게 미워하며 살아왔기에 나와 같은 일들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 어떤 수식어가 나를 더 빛나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나는 나여서 반짝이는 것이라고.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되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약한 모습들로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속삭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친구가 많이 없다는 것도 차분하게 이야기해준다. 대신 아주 오래된 친구가 곁에 있다고. 모두의 마음을 만족시키며 많은 이들과 잘 지낼 수만은 없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이 보는 것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실수했던 인간관계에 대해 털어놓는다. 우울감을 겪었던 육아를 하는 날 동안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리 상담을 받은 일에 대해 털어놓는다. 아무에게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입에서 뱉는 말들은 내게 이젠 큰 상처가 아니다. 나의 약함으로 인해 내가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단서가 되었기에 내겐 더이상 충격적인 일들이 아니다. 이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일들인 것이다.



아이에게 강하고 멋지고 완벽한 엄마만이 본보기가 되는 것일까? 사람의 생각이 모두 다른 것이니 내 의견이 맞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나약함을 그런 순간을 드러내는 것이 아이에게 짐이 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아주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보고 싶었다.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만 괜찮은 사람이 된다 여겼던 나의 어린 날에 딴지를 걸고 싶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부족함이 있어도 얼마든지 빛이 난다고. 너는 너여서 멋지다고. 그러니 바꿀 수 없었던 것들에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그날이 있었기에 작은 것에도 감탄하는 내가 여기 있다고.



아마도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어린 날의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그때의 그날도 참 괜찮은 아이였다고 말이다.









© breakfast_on_jupiter,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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