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력 강했던 나도 다시 일 하는 건 죽도록 두려웠나니
첫 알바는 전단지 돌리기였다.
요즘시대에 비하자면 옛날 유물이라 알 법한 ‘삐삐’라는 통신물의 요금을 내기 위해서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교차로 신문을 하나 들고 집에 들어왔다. 내 일자리 하나 정도는 꼭 건지고 말리라.
볼펜을 들고선 고등학생인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알바를 찾아 헤맸다.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몸은 건강하잖아.
살이 에릴 만큼 추운 겨울날 하나의 희망을 발견했다.
바로 전단지 돌리기. 그래도 움직이는 일은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사춘기의 열병을 앓던 나는 우리 동네 모든 사람이 내 얼굴을 알아볼 거라 걱정했다.
다른 동네로 가서 이 일을 하는 건 어떨까?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 동네에서 말이다.
유행하던 원색 츄리닝을 입은 한 두어 살 많은 오빠야들도 알바를 하고 있던 피잣집의 전단지 돌리는 일을 친구와 시작했다. 겁도 없었다. 그저 엄마에게 안 혼나기 위해 삐삐값을 채워 넣고야 말겠다는 각오만 있었을 뿐.
그 알바를 시작으로 20살 땐 고깃집 알바, 대학 여름 방학 땐 공장에서 휴대폰 부품 끼워 넣는 일을 하며 처음으로 야근이란걸 해봤다. 휴학을 하던 때엔 휴대폰 팔러 은행을 돌아다녔고, 군대에 간 지금의 남편과 헤어졌을 때는 시름을 잊으려 생과일주스집에서 일했다. 일을 너무 못해서 3일 만에 짤린긴 했지만.
주말엔 백화점에서 쉬는 언니들의 땜방 역할로 일을 하곤 했고, 명절에는 홈플러스에서 양말과 모자를 팔았다. 대학을 다녔지만 용돈은 니가 벌어라는 엄마의 명에 또한 우리 집 살림도 팍팍했기에 방학마다 쉬지 않고 알바를 했다. 그 돈을 기특하게 학비에 보탰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 하고 싶은 거 실컷 사고 먹고 다니긴 했지만 방학 때 쉰 적은 거의 없었다.
‘내게 과연 주말은 올까? 명절에 나도 쉴 수 있을까?
병원 일을 시작한 26살에도 쉬는 일은 없었다. 3교대를 뛰다 일이 힘들어 그만둘 결심을해도 시집갈 자금은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하루 만에 다시 다른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20살부터 아이를 낳는 30살이 되기까지. 도대체 내가 일을 안 할 순간이 오기나 할까? 그런 내가 10년을 쉬었다.
맞벌이를 한 부모님 곁에서 자란 나의 꿈 중에 하나는 아이가 내 손을 필요로 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는 거였다. 돈 아낄 줄 몰랐던 나였기에 남편 혼자 벌어서 과연 생활이 될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어린애를 두고 일을 하러 간다는 게 당시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음 한 편으론 좀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10년 동안 일을 멈춰본 적 없었으니깐. 돈은 어찌 아껴 쓰면 되겠지. 그 마음으로 애들 전집이나 좋은 장난감일랑 꿈도 꾸지 않았다. 모유가 잘 나오지도 않았지만 돈 아끼겠단 생각으로 죽어라 물렸더니 모유도 나오기 시작하더라. 그 돈으로 분유값을 아꼈다. 양육 수당으로 나오는 돈으로 기저귀, 물티슈, 이유식 거리를 준비하고 식비에 보탰다.
한 번 알바 한 돈으로 브랜드 옷 사 입는데 거침없었던 내가 엄마에게 옷도 얻어 입고, 아름다운 가게에서 몇 천 원짜리 옷을 사 입는가 하면 애들 옷도 중고 옷으로 입힐 때도 있었다. 그렇게 돈을 아껴가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을 그만둔 채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애들 커가니 돈들 일은 산더미 같은데. 이제 따박따박 이자 낼 일도 생겼는데. 알바를 이것저것 했던 나라서 생활력 하나는 끝내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 마이갓. 돈 벌러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의 두려움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죽을 만큼 일하러 가는 것이 무서웠다고나 할까.
’ 알바 여왕(?)이던 나, 어쩌다 이렇게 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