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y 01. 2023

비우고 살피는 시간

돌탑을 바라보며

 뒷산을 오르면 곳곳에 돌탑들이 눈에 보인다. 코로나로 사람들에게 섞이기 어려운 날, 애들을 그곳에 데리고 다니며 탑 쌓길 거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날들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렀더니 커다란 덩치로 내 키보다 높게 쌓아져 있던 돌무더기들이 무겁게 다가왔다. 조그마한 높낮이로 곳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나 많은 염원들이 쌓인 것을 보니 서로가 바라는 일들도 정말 많구나 싶었다. 산길을 오며 가는 사람도 적진 않겠다고. 이 많은 바람들이 만약 몽땅 내 것이라면 참 버겁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촐한 돌탑들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심정이 든 것이다.      

 

 수많은 돌로 틈 없이 탑을 쌓은 것처럼 부족함이 없도록 나를 채우며 살아왔다. 인정받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것이다. 일을 못한다며 구박받던 날들을 구실로 월급을 버는 족족 뭔가를 배우는데 써버렸다. 아무것도 잘하고 좋아하는 것도 없는 나란 생각에 취미라도 제대로 된 것을 찾자며. 굶주린 사람처럼 몇 개월에 하나씩 갈아 치워 가며 배움을 일삼았다. 

 이것저것 공을 들일 때마다 내 업이 되면 어떨까 상상했다. 도자기를 구우며 공예가가 되길 바랐다. 피아노를 배울 때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길 꿈꾸며 동요를 연주했다. 수영 선생님이 되는 건 어떨까 생각하며 야근하는 날에도 물에 뛰어들었다. 내가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확신은 생기지 않았다. ‘이 길로 나가셔도 잘할 것 같아요’. 한마디의 입김이라도 있었으면 떠밀리듯 도전이라도 했을 텐데. 별 재능은 없었던지 내가 바란 인정을 얻진 못했다. 그렇게 취미를 전전하며 업을 상상하다 겨우겨우 이어가던 날들의 끝은 결혼이었다. 

 

 엄마가 돼서는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우겠다며 잠시 손에 쥔 걸 내려놨다. ‘어머님’이라는 말을 귀 따갑게 들을수록 내 이름 석 자로 불릴 만한 일을 다시 찾고 싶었다. 집 반찬을 만들면서는 가게를 열어 볼 것이라 기대했다. 애들 간식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걸로 일할 생각을 했다. 정말 일자리를 구했고, 다시 ‘정수 씨’로 불릴 수 있었다.

 새로운 디저트로 특별함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떡을 배우는 자리로도 나를 이끌었다. 좋은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나도 그리될까 모임도 속해보고. 봉사활동을 하며 사회공부를 하는 주부들의 동아리도 가입했다. 그렇게 엄마라는 이름표 외에도 다른 명함들을 하나 둘 만들어 나갔다. 여러 자리에서 괜찮은 사람이라 불리며 쉴 틈 없는 일상을 달리고 있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운동까지 겸하며 건강하게 잘 지낸다 생각했는데. 몸이 비실비실 아팠다. 아니 너무 피곤해서 주말에는 바닥에 널 부러져 지냈다. 애들 보는 게 벅차서 지친 거라며. 엄마니깐 고된 하루에 몸이 늘어지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검진을 받았더니 갑상선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다. 다시 재검사를 해도 여전히 기능에 문제가 있다며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소리가 듣기 불편했다. 

 


 그때가 시작이었을까. 내 삶을 돌이켜보게 된 것이. 큰 병은 아니라지만 삼십 대에 꼬리를 물고 다닐 병이 생긴다는 것은 좀 충격이었다. 피곤함이 더해가니 바삐 돌아가는 일상도 지긋지긋했다. 발랄하게 머리를 자른 것처럼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애면글면 살아내는 게 잘 사는 것일까 의심도 들었다. 뛰어나게 잘하는 것 없는 내게 부지런히 최선을 다한다는 건 버릴 수 없는 이름표와 같았는데도 말이다. 이젠 누가 알아주는 것보다 내가 살아나는 게 중요했다. 많은 것을 얻으려다 지쳐 버렸던 거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덜 익어도 때가 지나서 무르익기를 바랐다. 내 그릇보다 큰 것을 담아내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차고 넘치는 순간 주변부터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쓰지 않는 물건들을 버렸다. 살림이 간소해지니 청소도 비질과 물질로 끝났다. 덩치 큰 물건들이 적어지니 이사할 마음이 생겼다. 아랫집 보기 민망해 아이를 잡던 날들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을 실행에 옮기자며. 그렇게 간소한 물건들을 가지고 1층에 새 살림을 꾸렸다. 간결해진 물건들은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가 속한 것들에 대해서 꼭 필요한 일일까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남 보기에 좋아 보였던 모임은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인가 고민했다. 도리도리 고개가 저어졌을 때 감히 내려놓을 생각을 했다. 음식을 만들고 바느질하며 일상을 나누던 모임은 그만두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로 단순하게 살아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지니 차츰 마음도 붕 떠졌다.

 누구의 시선도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자꾸 물었다. 물에서 활력을 찾던 시절이 생각났다. 몇 년 만에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운동하는 시간이 삶의 중심이 되니 다른 만남에서도 자유롭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 눈에서 멀어졌다고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사람들은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인연이라면 어디서든 다시 이어질 것이니.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는 성의를 다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삶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혼자가 된 시간 속에 조용히 되뇌었다. 삶이란 영원하지 않기에 손에 쥐고 갈 것들을 사려 깊게 고를 의지가 필요했다. 더 이상 일상이 버거워 내팽겨 치고 싶지 않으니깐.     



 이제는 선택할 순간이 오게 되면 잠시 멈 춰 선다. 감당할 수 있을만한 것인지 여러 번 돼  물으면서. 많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날 속에 제대로 해 본 것은 얼마나 될까. 필요 없는 경험은 없다지만 이제는 적은 가짓수의 일들에 그윽하게 관여하고 싶다. 능란함까지 바라진 않지만 탐험가의 마음으로는 살고 싶다. 깊이 바라보고 살피는 삶을 맞이하려면 군더더기를 덜어내야 한다는 것을 뼈 아프게 경험해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잃고, 일하는 자리를 박찼다. 고립되어 외로움의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생각이 들 던 날에 비로소 나 자신과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선택의 기준을 나에게 두게 되었다. 예전보다 거절할 일이 많이 생긴다. 불편한 일이 거듭되지만 익숙해지려 한다.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그만큼의 짐은 지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그렇게 고른 것들을 하나 둘 쌓아가는 요즘은 어제보다는 어깨가 가볍다.

 욕망을 비우고 본질을 살피는 시간. 내가 쌓아 올린 것들에 성의를 다하는 이 순간. 마음속에 세심히 고른 돌로 오늘도 조그마한 탑을 지어본다. 



가벼워져라. 가벼워지나니. 주문을 외워가며. 





© jayhaywire, 출처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수필 배우는 날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