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밀도를 높일 것

면접에 떨어진 그 후 이야기

by 정수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반반의 확률이라고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온갖 달콤한 상상을 해댔다.


이제 얼마간은 일 그만 둘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계약직이야? 아직도 일하고 있어' 하는 그 말에 '저 여기서 오래 일해요'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네 등등등...


인생은 참 뜻대로만 흘러주면 좋으련만 어찌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던지. 티브이에 나오는 그분은 '감사하게도 삶이 평탄하게 흘러갔네요'라고 말하던데 나는 왜 그 말의 주인장이 될 수 없는지.



합격 발표를 보고 처음에 믿기지 않았다. 내 번호가 오버랩 되지 않는 그 화면을 정지된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 숫자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만 있다면 끝자리를 말끔히 닦아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눈물이 났을거다. 그렇게 실망감을 오래오래 안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하늘은 내 편이 안될 수도 있다는 것을. 면접 발표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명심보감을 품으며 글 속의 말을 되새겼다. 인생은 뜻대로 안된다. 하늘의 뜻은 어찌하지 못한다는 그 말들을.


그 구절을 마음에 새겨도 실망과 좌절같은 여러 감정들이 마음을 오 갔다.


다행히 면접날에도 발표날에도 남편이 옆에 있었다. 남의 편이라던 그가 이날만큼은 얼마나 든든하던지. 나처럼 실망했을 남편을 생각하자니 미안하기도 했다. 다 잘 돼서 일도 빨리 마치고 돈도 더 벌고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들도 나도 좋고 좋을 일이 천지인데.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되감기 한들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불.합.격.










속 상한 마음에 혼자 오락실 코인 노래방에 갔다.


잘 올라가지 않는 고음의 노래는 얼마나 고래고래 잘 불러지던지.


감정을 담아 부르는 노래는 어떻게 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던데. 노래 코치를 하던 선생님들이 마음을 실어 불러라는 그 말이 참 와닿게 노래를 불렀다.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 노랫말 가사가 그렇게 감동적인지 이날 처음 알았다.



일하러 가기 전 카페에 들러 아주 콩 만 한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들이켰다. 위에 쇼콜라가 덧대진 그 커피는 꼭 인생 같았다. 쓴맛과 단맛이 잘도 버무려진. 지금 나의 쪼그라진 마음 크기만큼이나 잔도 작았다. 그 안의 맛에는 찰나의 삶이 담겼더라.



실패를 기념으로 오랫동안 벼르고 벼렸던 반지도 하나 샀다. 내 마음에 드는 옷은 척척 잘도 사면서 만 원짜리 반지는 그렇게 돈 아깝게 느껴지더니. 한 달 동안 시험 준비를 하느라 고생한 나를 위해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오래 기다린 뒤에 샀던 반지라서 그런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자랑하는 성격이 못 되는 나인데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 모처럼 자랑도 했다.


'실패 반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착잡한 심정을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비록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생각을 많이 자아내게 한 경험이었다.

겸손함을 배우기도 한 시간이었다. 잘 될 거라 여겼을 때는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렸는데 떨어지고 나니 어깨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조금 움츠려 들기도 했다. 위축되었다기 보다 세상을 조금 더 조심스레 바라보겠다는 나만의 자세였다.


조금은 천천히 흘러가자는 나만의 의지였다. 그리고 한 가지 좋은 점은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은 빠졌다는 것이다.


잘 보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까 탐을 내던 시절에는 모든 일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막상 결과가 이렇게 되다 보니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해도 안될 거면 너무 안달하고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만 더 즐기면서 가자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결과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깐. 한가지 목표에만 꽂히지 말고 일상의 여러 순간들에 밀도를 조금 더 높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제 일을 그만두기까지 약 4개월의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누군가의 말대로 그냥 버티면 끝이 나고 경력이 생긴다 하는데 나는 그리 끝맺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이 사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조금 더 성숙하고 좀 더 영글어지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을 그저 흘리는 것보다 채우고 메우고 싶었다. 그런 내가 되려면 나는 어떤 하루를 살아야 할까.



또 학과 공부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가 보이기 위한 공부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조그만 게 뭘까. 내가 사개월을 밀도 있게 보낼 수 있는 건 뭘까.



아직 답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은 세 번이나 떨어졌던 컴활 공부를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왜냐면 재밌으니까. 서류 작업하는 게 싫지 않다. 그렇게 일하면서 발견한 나의 조각들을 하나 둘 모아 이루어 갈 생각이다.

한 달에 하나씩.

그렇게 네 개의 조각을 모아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깐. 떨어졌다고 내 인생까지 떨어진 건 아니니깐. 그저 하나의 점이 된 순간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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