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뭐 하지?

막막한 오늘이 끝은 아니니깐

by 정수

내가 삼 개월은 쉬었으니까 정확히 11개월 전에도 무직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이전 직장과 일의 성격이 전혀 다른 곳에서 7개월 근무해 보니 이 일이 내게 잘 맞게 느껴졌다.

영리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공적인 일을 하는 것에서 더 보람도 느꼈다. 설문조사를 하는 것도 그렇고 사업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이니 말은 술술 잘도 나왔다.

그렇게 일의 재미를 느끼려던 찰나에 계약은 종료되었다. 알고 시작했으니깐. 끝이 있다는 거.

계약 연장은 없을 거라는 거 나는 다 알았으니깐.



일을 그만두고 다시 어찌 살아야 할까 걱정되었다. 십 년 경력단절 이후에 일을 시작하는 것도 너무나 두려워 집단 취업상담을 받았다. 그걸 다시 받아 볼 생각을 했다. 마침 실업급여를 신청했었는데 구직활동에 인정된다 했다. 상담을 받으며 굳은 머리를 좀 굴리고 싶었다. 내게 어떤 자리가 맞는 건지. 남의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봉사활동도 오로지 나를 위해 시작했다. 내 적성을 찾는답시고.

운전도 잘 못하니깐 연습할 겸 주차하기가 어렵다고 소문난 골목길에서 봉사장소를 찾았다. 나는 그곳에서 어르신들의 일자리 사업 신청건을 도왔다.


아홉 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일자리를 원하는 어르신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 추운 날에 일찍부터 번호표를 받고 입김을 호호 불어대며 어르신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셨다. 나도 최대한 어떤 일자리가 있는지 빨리 파악하고 어르신들이 어떤 일을 하시고 싶어 하는지 욕구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말을 하도 많이 해서 목이 다 쉬었던 만큼 배도 고파 골골 소리가 났다. 짬을 내어 함께 먹는 밥은 꿀맛이었다. 고생한다며 직접 담은 김치에 김이 모락 나는 보쌈을 주셨는데 맛이 환상적이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목이 쉴세라 일했다. 비록 봉사지만 내 일처럼 최선을 다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어르신들에 대한 애정이 나는 참 각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는 전 직장으로 돌아갔다. 8개월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시나 일은 손에 잘 맞았고 다양한 어르신들을 만나며 코를 훌쩍이며 울고 웃었다. 그 기간 동안 오래 일할 수 있는 자리에 두 번이나 지원할 기회가 생겼는데 다 떨어지고 말았다.


B 플랜을 짜놨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내가 짜놓은 계획은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볼멘 것이었다. 카페 가서 커피 마시기. 도서관에서 책 읽기. 내가 늘 해왔던 것들.

아홉 시에 근무하며 여섯 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 때는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이 꿈만 같더니. 시간이 남아도니 이것만큼 지겨운 일도 없다. 다 큰 내가 외롭다고 징징거리며 친구를 찾기에도 뭔가 멋쩍다. 다들 아이를 키우고 일도 하며 삶의 무게를 지고 있는 그 앞에서 나는 응석받이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따로 뒷주머니라도 차 놓을 걸. 계약직의 불안정함을 나는 옷 사 입는 걸로 풀고 있었다. 40대에 입을 옷을 산다며 수도 없이 옷을 샀다. 나도 모르게 움츠려 지려할 때 각 잡힌 옷을 입으며 태를 세웠다. 대신 주머니 사정이 곤란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딴 돈도 좀 마련해 놓을걸.

참 대책 없이 살았구나.


바쁘게 일을 하며 살아갈 때는 느끼지 못했을 헛헛함이 온 가슴에 눌러앉았다. 눈이 시리다니 마음도 시렸다. 누가 내 마음을 알까. 누구에게 이 마음을 털어놓을까.

남편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부럽다고 노래를 해댔다. 암요. 남편이 일하는 걸 보면 내 처지가 참 부러울 만도 하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 일이나 하기는 또 두렵다. 일 할 때 구박받은 날들이 많아서일까. 병원은 죽어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리저리 자리를 골라본다. 급하게 일을 구했다가 한 달 만에 그만뒀던 때가 생각이 났다.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지만 윽박지르는 곳에서 마구 버틸 만큼 내가 센 사람은 아니었다.


배부른 소리라는 말을 들어도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가 잘할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그 어딘가에는 있을 거야. 전 직장도 그렇지 않든. 날마다 출장 다니는 그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즐기는 사람이 갇혀사는 일만 세상에 있는 줄 알았구나.

그런 일을 하는 날이 다시 올 거야.

잠시만 숨을 고르자.

오늘이 인생의 끝은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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