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콩트를 소설화해서 소설집 '옴두르만의 여인들'에 실은 단편소설입니다.*
출근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만원 버스에서 시달리는 악몽을 꾼 날은 더욱 그러했다. 어제 거래처와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머리가 무거웠다. 창밖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태양의 게으름이 심해가고 있었다. 나는 심한 갈증으로 물을 먹으려 일어나, 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아내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회사 쉬느냐고 물어보는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늦게 들어온 나에게 야유라도 하듯 비꼬는 말투처럼 들렸다. 그런 아내에게 미안함보다는 회사 지각을 생각하면 야속함이 앞섰다. 전날 술 먹고 들어왔다고 아침에 해장국을 끓여 놓은 그녀의 야속함이 곧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아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대충 옷을 입고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시간관념이 철저한 나에게 아내는 연애 시절부터 신뢰하였다. 같은 직장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한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성실뿐이었다. 그녀를 믿을 수 있었던 것도 나에 대한 넓은 이해와 관용이었다. 사실 남자들의 늦은 밤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닌가. 평생을 같이 살아가면서 서로의 울타리에 가둬놓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가 울타리를 없애버리면서 나의 행동반경은 넓어지기 시작했고, 그 성과는 남들보다 빠른 승진으로 이어졌다. 물론 울타리 없애준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한의 신뢰 속에서 이뤄지는 결과물은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첫아이를 임신하자 회사를 그만둔 아내는 육아에 충실했고, 아이들도 무럭무럭 자라는 정말 누가 봐도 모험적인 가정이다.
버스에 오르면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날은 운 좋은 날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눈을 감고, 꿀맛 같은 쪽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술을 먹은 다음 날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하루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느낌이었다. 그런 날은 복권을 사고 싶었다. 가끔 눈을 슬며시 떠서 차장 가로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을 보며, 내가 탄 버스가 천국으로 갔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옆에 앉은 사람이 내가 코를 곤다고 어깨로 건드리거나,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여유로움도 생겼다. 오늘은 그런 행운의 날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나마 버스를 놓치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길 건너다 보이는 버스정류장이 멀게만 느껴졌다.
버스정류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뛰어오는 내 모습을 안타깝게 보고 있었다. 넥타이는 목에 걸려 있고, 머리는 외박한 사람처럼 뻗쳐 있고, 아직 술이 덜 깼는지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는 나에게 그들이 보여준 씁쓸한 관심이었다. 내가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봐왔던 그런 관심이라 그리 낯설지 않았다.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서 있던 줄은 조금씩 삐딱해졌다. 나는 다가오는 버스를 보며 긴장하는 그들과 대열에 서 있었다.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서울 근교 위성도시의 아침 풍경은 다양한 군상들로 이렇게 항상 분주하였다. 저녁에는 잠잠했던 아파트의 여기저기서 새벽부터 밀려 나오는 사람들과 함께 어느덧 나도 다람쥐가 되어 그렇게 쳇바퀴 속을 열심히 돌고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자 끝에 줄 서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을 밀어붙이며, 버스에 간신히 매달리다시피 올라탔다. 먼 저 탄 사람들의 눈빛은 몇 곳의 빈 좌석으로 향해 있었고 그 옆의 공간이라도 차지하려고 나는 앞사람을 밀치며 들어갔다.
“앞에 서 계신 분들 좀 안으로 들어가세요!”
버스 기사의 익숙한 멘트를 들으면서 버스 안쪽으로 쓸려 들어가다, 나는 가슴이 멎는 줄 알았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내가 잠시 멈칫하자, 큰소리로 아우성을 쳤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뒷걸음을 치고 싶었지만, 앞뒤로 막힌 사람들 속에 꼼짝달싹 할 수가 없이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제 이야기가 안 들립니까? 안으로 좀 들어가세요!”
내가 중간 좌석 창가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보는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내 귀에는 윙윙거리는 모깃소리만 귓전을 맴돌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슬픈 추억이 뇌 속 깊이 있는 장기기억을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간 나는 새 학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친구들과 사귀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느덧 학교 담벼락에 있던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목련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주말에 친구들과 만나려고 외출 준비를 하는 나를 어머니가 불렀다. 하얀 봉투와 함께 주소를 주면서 그 집 어머니께 전달하고 오라는 심부름이었다. 주소를 보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전해주고 친구들 모임 장소로 가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봉투를 꼭 손에 쥔 채로 찾아간 그 집은 대문이 상당히 큰 한옥이었다. 담장 위로는 철망이 어지럽게 처져 있었고, 그 너머로 큰 나무들이 있어 집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대문 앞에는 커다란 인터폰이 달려 있었다. 사용법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나는 버튼을 하나 눌렀다. 벨 소리가 나면서 집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약간 허스키한 소녀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흘러나왔다.
“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말을 하세요.”
여자 목소리가 재촉하면서 물었다.
“어머님 심부름 왔는데요.”
말끝을 흐리면서 주춤거리고 있는데, 인터폰을 통해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자 문이 덜컹 열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 건너에 있는 큰 마루 문이 열리면서, 인터폰에서 들렸던 어머니 친구가 올라오라고 내게 손짓을 했다.
“어머니 잘 계시제?”
다과를 내어온 어머니 친구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네. 어머니가 이 봉투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친구는 자상하게 내게 이런저런 궁금한 질문을 했고, 나는 부끄러움을 타면서도 그녀에게 또박또박 대답을 하며 내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봉투를 전해주고 방에서 나오는데, 앳된 소녀가 ‘어머니! 학원 다녀올게요.’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 집의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폰에서 들렸던 약간의 허스키한 그 목소리였다. 머리는 길게 땋아서 가느다란 목을 가렸고,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까만 눈동자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혹시 눈이 마주칠까 봐 곁눈질로 본 그녀의 첫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를 슬쩍 보더니 대문을 열고 뒷모습을 보이며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가 나간 후, 나는 한참 동안 대문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신체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등교할 때 가끔 버스 안에서 만나는 한 여학생을 보면 가슴 울렁증이 생겼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항상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탔다. 그녀가 버스를 타기 두 정거장 전부터 내 가슴은 콩알이 되었다. 나는 창가에 시선을 가져가며, 그녀가 버스를 타는지 보았다. 그녀가 버스를 타지 않은 날은 온종일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고 있었다.
날마다 울렁대는 가슴은 그녀를 향했다. 그 여학생이 버스에 올라타서 내 옆으로 다가올 때는 나의 온몸이 후끈거리며 굳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위치를 알고 미리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남학생이 그녀의 가방을 받아주면 괜히 질투를 느꼈다. 그녀는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녀가 나를 보면서 손을 흔들어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춘기의 열병이 조금씩 사라져 갈 때쯤,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그러한 증상은 장맛비에 젖은 옷이 마른 것처럼 말끔히 없어졌다. 그런데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면서부터 다시 그 증상이 도진 것이다. 잠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시작하면서 가벼운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그 소녀 집에 한 달에 한 번씩 심부름을 보냈다. 두툼한 하얀 봉투를 손에 꼭 쥔 채,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집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그녀의 집으로 가면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동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세상이었고, 그곳의 주인공은 그녀와 나뿐이었다.
그녀의 집에 어머니만 혼자 계실 때가 많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녀의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런 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괜히 어머니에게 심부름시킨다고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며칠이 지나면 또 모든 것을 잊은 채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를 보지 못한 한 달은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나만의 그리움만 쌓여갔다.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앞에 빈자리가 생겼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앉으면서 조금 미안했던지 눈을 감았다. 사실 그녀를 보기 위해서는 앉을 수가 없었다. 지난밤의 술기운으로 지쳐있던 몸도 어느덧 사라졌다. 왼쪽 손으로 버스 손잡이를 잡고서, 바로 내가 서 있는 앞 좌석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슬쩍 보았다. 그녀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파마한 모습이 불분명했지만, 입술 위에 있는 또렷한 점을 보고 오래전에 헤어졌던 그녀라는 것을 확신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생머리에 단발하고 다녔던 그녀의 파마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잠시 눈을 뜨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머리를 옆으로 돌리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아찔한 적막을 느꼈다. 온몸이 감전되어 타들어 가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마른침을 소리 없이 삼켰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짧은 순간의 눈 맞춤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본 듯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다시 시작되면서, 그녀와의 기억을 더듬어 갔다.
무성한 잎사귀들이 나무를 뒤덮기 시작했고, 교정에서 멀리 보이는 산들도 푸름이 더해가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로 그녀의 집이 이사 왔다는 것을 안 것은 그녀를 본 지 2년 후였다. 어머니는 큰 시장에서 창고를 가지고 도매 장사를 했다. 가끔 자금 사정이 안 좋으면, 어머니 친구에게 급전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심부름은 어머니의 장사가 조금씩 어려워지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께서 전과 같이 봉투와 주소를 주면서 급히 다녀오라고 했다. 주소는 지난번과 달랐다. 교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지나서 북악산 기슭에 있는 고급 주택가에서 내렸다. 꾸물거리던 날씨는 버스에서 내리자 소나기를 퍼부었다. 비를 피하고자 정거장 앞에 있는 집의 처마 밑으로 달려갔다. 금방 그칠 것 같은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찾아간 집은 지난번 시내 중심가에 있던 한옥이 아닌 커다란 양옥집이었다.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교복이 흠뻑 젖었다.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우산을 쓰고 나와 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2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녀에게서 달라진 모습이란 한 가닥으로 땋은 머리에서 단발머리와 얼굴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여드름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성숙함으로 내게 더욱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녀는 밝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어머니 심부름 왔는데·····.”
나는 빨개진 얼굴로 그녀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알고 있어. 어머니한테 이야기 들었어. 옷이 많이 젖었네!”
그녀의 안내로 거실로 들어갔다. 젖은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교복을 벗으라고 하면서 수건을 건네주었다. 순간, 스쳐 지나간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내 몸으로 번졌다. 짧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그녀를 살며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과 마주치면서 흠칫 놀란 건 그녀였다. 내가 그녀를 훔쳐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벌써 2년이 넘은 것 같네.”
나는 얼떨결에 그녀에게 2년이라는 말을 했다. 그동안 그녀를 잊고 있었던 시간인지 가슴에 두고 있었던 시간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적어도 2년이란 시간은 우리에게 상당히 길었고, 모든 게 달라져 보일 정도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네.”
내가 처음 그녀의 뒷모습을 본 지 2년이란 것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가져온 봉투를 꺼내 어머니에게 전해드리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그녀의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셨다.
“비 오는데 고생 많이 했데이. 어머니는 잘 계시제?”
그녀의 어머니와는 처음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인데도 내 얼굴을 알아보시고 포근하게 맞이해 주셨다.
“이제 못 알아볼 정도로 많이 컸네. 어디 보제이. 우리 ‘해선’ 이와 같은 학년 이제?”
그녀의 이름이 해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는 어느새 따뜻한 차를 가져와서 내 옆에 살며시 놓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한 것 같았다. 누나와 그녀의 언니가 같은 학교에 다녀서 알게 된 학부모 사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심부름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 가까운 그녀의 집 근처를 방과 후 가끔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큰길 옆 개천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그녀의 집을 지나치는 날이면, 뒤에서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면서 나는 가슴앓이를 다시 시작했다.
해선을 다시 만나러 갔다. 어머니가 내게 흰 봉투를 준 것이 한 달 후였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오전부터 그녀의 집으러 달려갔다. 어머니는 내가 왜 심부름을 잘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어머니와 무슨 말을 했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도 혹시 그녀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를 수없이 되새겼다. 그녀한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생각을 했다. 지난번같이 절대 떨면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집에 들어서자 나를 맞이해 준 사람은 해선이었다. 여름이라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하얀 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가슴이 뽀얗게 올라와 있었다. 청바지 스커트는 내 시선을 잡아서 놓지를 않았다. 그녀의 긴 다리에 시선이 고정되면서 나는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참을 수 없이 떨렸다. 그녀가 조금씩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걸까.
거실에 들어서자 또 한 사람이 나를 빙그레 웃으며 반겨줬다. 누나 친구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해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어머니께서 누나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해선이 언니가 차와 함께 과자를 담은 그릇을 가져왔다.
“누나에게 네 이야기 많이 들었다.”
해선이 언니는 누나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해선이 보러 열심히 심부름 다닌다고 하던데·····.”
순간 내 얼굴에 피가 쏠렸다.
“아! 네. 그게·····.”
옆에 있던 해선을 몰래 쳐다보면서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듬었다. 해선이도 당황했는지 내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에 왔으니 해선이랑 이야기하면서 놀다 가라.”
해선이 언니는 우리를 위해서 자리를 피해 줬고,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다가왔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거리의 익숙한 풍경이 오늘따라 어색해 보였다. 풍경이 내 눈으로 들어오지 않아서일까? 잡고 있던 손잡이가 땀으로 젖어서인지 미끈거렸다. 그녀의 뒷모습이 낯설어, 살짝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장 가에 반사되는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녀의 지난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내쉬면서 가슴이 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표정은 긴장해서인지 굳어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어있는 그녀가 아침 일찍 출근하는 모습이 조금은 측은해 보였다. 남편 잘 만나서 호강하며 살 것만 같았던 그녀였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오래 기다려 줬던 너에게 고마웠다.’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픔이 내 가슴 한 곳에 남아있어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나의 과거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어준다면, 그 아픔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집 근처 로터리에 있는 제과점에서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녀의 집과 내가 다니던 학교가 그 로터리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대입 준비를 위해서 자주 볼 수가 없었다. 거리에는 단풍이 물들고 있었고, 싸늘해진 바람은 손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게 했다. 먼저 온 해선이 밝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밝은 모습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대학 진로는 정했어?”
그녀는 탁자 앞에 있던 우유를 마시면서 물어보았다.
“글쎄? 요즈음 머리가 복잡하네.”
부모님은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지는 거라고 신중하게 잘 결정하라고 했지만, 마음속에 항상 내재하여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가 꿈틀거릴 때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의 늪에 빠졌다.
“너는 결정했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질문으로 피했다.
“응! 사범대로 진학하려고 해.”
그녀는 항상 애들을 가르치며 살아가겠다고 했었다. 우리들의 고민은 깊어만 갔지만, 성적이 선택의 지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로터리를 끼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이었다. 길가 양쪽으로 오래된 집들 사이로 뻗어 나온 나뭇잎들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앞에 보이는 산 사이로 떨어지는 태양은 어둠을 부르고 있었다. 갈 길 바쁜 사람처럼 우리는 부는 바람을 뒤로하며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녀를 처음 본지 벌써 5년이 다 되어갔지만, 아직도 그녀 앞에서 제대로 말 못 하는 내가 싫었다. 그녀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로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 가자.”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며 그녀에게 던진 말이다.
“우리들의 새로운 세계, 새로운 희망을 위해서 노력해.”
그녀는 내 눈을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희망이라는 의미를 나는 알 듯했다. 돌아서서 대문 초인종을 누르려는 그녀의 손을 나도 모르게 잡아챘다. 순간 당황한 그녀를 내 가슴으로 끌어들였다. 처음으로 그녀의 따뜻한 가슴을 느꼈다. 이성이 아닌 어머니 같은 그녀의 포근함이 온몸을 감쌌다.
버스가 서울로 들어서면서 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어디서 내릴지 궁금하기도 하고, 갑자기 내리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정차를 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정류장이 다시 시작이 되었다. 평소보다 빠른 느낌의 버스 속도가 야속하기만 했다. 승객들은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 있던 사람들이 내리는 사람들의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내 속도 모르고 정류장마다 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옆 눈짓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직 내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녀는 이미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의 움직임이 불안하고, 어색했다. 파마한 머리 너머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나이에 비해서 앳되어 보였지만, 표정은 굳어있었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렸다. 갑자기 그녀가 뛰어내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버스가 신호등에 서 있으면, 모든 것이 순간 정지된 느낌이 들었다. 버스 창에서 반사되는 그녀의 모습이 창에 낀 서리로 희미하게 보였다. 아직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의 마지막 날이 떠올랐다.
눈이 내린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도로에 쌓인 눈은 걸어가는 사람들을 불안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늘어선 가게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불빛이 화려했지만, 추위를 녹이지는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그녀는 새로운 직장 생활이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갓 제대해서 복학한 나에게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그녀의 순수한 모습은 성숙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쁜 사회생활로 그녀와 만난 횟수가 줄어들었다. 가끔 들려주는 주변 친구들의 결혼 이야기와 회사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과의 대화들이 그녀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녀가 바쁘다는 이유로 만남이 뜸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면 근무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저녁에 만나자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남을 피했다. 얼마 후, 그녀에게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우리가 자주 그녀의 집 근처 로터리에 있는 카페였다.
밝은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들어오던 전과 달리 조용한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지만, 그녀가 본 내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시켜놓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술을 계속 마셨다. 정적을 깬 건 그녀였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같이 살 수 있을까?”
“······”
그녀가 무심히 던진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카페 주방에서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 놀라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집에서는 빨리 결혼하라고 하는데······”
그녀는 오랫동안 내 곁에서 위성처럼 맴돌았고, 나는 그녀가 영원한 나의 별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나와 같이 했던 세월이 그녀의 발목을 잡은 듯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힘없이 뱉은 내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사정을 어머니를 통해서 얼핏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그녀의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그녀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와 같이 수없이 걸었던 언덕길을 오르면서 그녀는 항상 그랬듯이 내 오른쪽으로 팔짱을 끼었다. 술 취한 모습을 제외하면 그녀는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잡아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보여줬던 나의 나약함이 이제는 싫어졌는지도 모른다. 먼 길을 면회 온 그녀를 돌려보내고, 외박증을 찢어버렸던 나를 여러 번 후회했었다. 그녀가 집으로 가면서 외로움과 갈등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다 머뭇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술을 마시면서, 집안의 일로 인한 서러움인지 나와의 아쉬움인지는 모르겠지만, 흘렸던 눈물 자국이 조금 남아있었다. 10여 년간 그녀와 만나면서 헤어지기 싫어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이 언덕길을 걷는 것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마디 말도 없이 걸어가면서 그녀와의 수많은 대화들을 떠올렸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의 집이 점점 다가오면서 그녀가 낀 팔짱이 더욱 강하게 느껴져 왔다. 카페에서 먹은 술기운이 점점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그녀와 멀리 도망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를 원망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빨아들였다. 그것이 그녀를 본 마지막이었다.
버스가 갑자기 요동을 쳤다. 사람들이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동시에 가벼운 비명이 들려왔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여자도 놀란 듯 눈을 떴다. 가끔 벌어지는 버스 안의 소동은 익숙해진 지 오래다. 버스가 조용히 움직이자,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새로운 정적이 흘렀다. 왼쪽 손잡이 사이로 잠시 잊었던 그녀를 내려다봤을 때, 살며시 눈을 뜬 채 차창 너머로 나를 보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차창 밖으로 옮겨지면서 나의 시선도 그곳으로 따라갔다.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이 온통 그녀의 얼굴로 보였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녀의 시선이 다시 서서히 내게로 오는 걸 느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나를 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버스가 정거장에 멎자 많은 사람이 내리기 시작했다. 뒷좌석에 있던 몇 사람이 앞자리로 옮기면서 내가 서 있던 뒷자리가 많이 남았다. 운전기사는 내가 계속 한 자리에 서 있자, 백미러를 통해서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바로 뒷좌석 창가에 앉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바로 옆에 같이 앉아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녀가 갑자기 뒤를 보면서 말을 건넬 것만 같았다.
그녀와 헤어진 얼마 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괴로움은 알코올로 치유가 되지 않았다. 고통의 터널에서 벗어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가슴앓이가 다시 도졌지만, 전과는 달랐다. 긴 겨울방학은 그렇게 지나갔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해선이가 그렇게 좋나?”
어머니가 둘 사이를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이 아직도 제 몸속에서 돌고 있어요.”
솔직히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께 도와달라고 애원을 하고 싶었다. 그녀와의 끊을 수 없는 감정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얼핏 이야기했제. 그 애가 이미 결혼 상대가 있는 것 같던데, 이제는 너도 정신을 차려야제.”
어머니의 말은 냉정했다. 빨리 미련을 갖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말 같았다.
“해선이 아버지가 하는 사업이 좋지 않았는데, 투자하기로 한 분이 아들과 결혼하는 조건을 달았던 것 같더라. 집안이 어려우니 우짜겠노.”
어머니가 해선이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인 것 같았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에서 나왔다. 어머니도 속상해서 했던 말이지만, 결국 나에게는 그녀를 잊으라는 최후통첩 같았다.
어머니의 말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녀를 놓아준 것이다. 그녀는 내게 순수하게 다가왔었고, 가슴속에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잊혀갔다. 회사에서 만난 아내는 내 아픈 과거의 흔적을 치유해 주었다. 그녀가 문뜩 생각날 때면,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독감 예방주사를 맞고 있다고 생각했다.
버스가 서울 중심가로 진입하면서 사람들이 얼마 남지를 않았다. 그녀의 옆자리가 비면서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앉을 뻔했다. 그녀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어색함이 싫었고, 과거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녀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그녀가 내릴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