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윗의 별

단편소설

by 김창수

* 콩트를 소설화해서 소설집 '옴두르만의 여인들'에 실은 단편소설입니다.*


새벽부터 전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뭔가 다급한 상황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이 시간대에 오는 전화는 한국 본사였다. 전화기를 들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김 이사! 당장 텔아비브로 넘어가서 엑소더스 프로젝트(ExodusProject)를 마무리하게.”

평상시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던 본사의 본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직접 전화한 걸로 봐서는 상황이 급한 듯했다. 며칠 전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천안함 피격사건에 이어 지난주 연평도 포격으로 한국 정부는 북방한계선(NLL) 상에 있는 서해 5도에 대한 방위를 강화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나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며칠 전부터 그동안 진행했던 파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최근 북한의 서해 도발로 국방부 방위사업청은 지난 3년간 추진했던 프로젝트가 더는 지연되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본부장님! 지난번 협의한 기술이전과 가격 문제는 그쪽에서 양보하지 않고 있습니다.”

협상은 상대방의 전략을 파악해서 대안을 여러 각도로 만들어 시작해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나는 지난번에 우리 측의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에서 밀렸다는 일종의 경고를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쪽의 요구에 대해서는 일부 양보하더라도 무조건 다음 주까지 협상을 끝내고 연내 무인항공기를 항공으로 선적할 수 있도록 해!”

본부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내게 어느 정도까지 협상의 권한을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한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방산 사업 특성상 현지 상담 시 권한위임을 하게 되면 불법적인 요소들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본부장은 방산 사업의 베테랑으로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급한 상황으로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았다. 지난번 협상 실패를 다시 할 수 없었다.

“제가 현지에서 협상하면서 본사의 지침을 받아 진행하겠습니다.”

지난번 협상 결렬도 결국 본사의 확실한 지침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본부장에게 상기시켰다. 이번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협상에 필요한 대안을 내일 중으로 메일로 보내겠네. 그쪽 방문 허가서도 이미 요청해 놨으니 받는 대로 팩스로 전달하겠네. 그리고 현지 아국 대사관 무관에게도 협상 진행 상황에 대해서 별도 보고를 하도록 해.”

본부장은 이번 일로 방위사업청으로부터 심한 압력을 받은 것 같았다. 처음 본사에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은 나였다. 무인항공기를 도입해서 해군함정에 탑재해서 NLL 전방에 있는 북한 포대 동정과 대잠작전에 사용하여 사전에 북한의 도발을 막자는 취지였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빨리 추진이 되었으면 이번 북한의 공격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방위사업청에서는 ‘엑소더스 프로젝트’에 대해서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다. 군 관계자들도 이스라엘에서 생산되는 여러 종류의 신형무기 구매를 위해 상주해 있었다.

군 관계자들이 무인항공기를 현지에서 몇 차례 성능 실험해서 입증되었다. 팔레스타인의 공습에도 많은 성과를 보여, 도입을 추진하기로 결정이 이미 났었다. 나는 처음부터 몇 대 구매해서 실전배치를 한 후 기술이전을 추진하자고 주장했지만, 본사에서는 기술이전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무인항공기는 해군뿐 아니라 전군에 필요한 신형 무기였고, 한국에서 대량생산 하면 더 많은 물량을 공급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예상대로 지금 기술이전과 가격 문제가 동시에 엉켜서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나는 이스라엘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 협상 마무리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비행기 창가 너머로 저 멀리 동지중해의 중심인 텔아비브 시내가 구름 속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파도가 해안가에 다다르면서 일어나는 하얀 포말들이 연이어서 커다란 띠를 만들고 있었다. 승무원들이 일제히 안전벨트 착용을 확인하러 다니느라 분주했다. 조금 지나자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조금 있으면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텔아비브는 영상 20도의 맑은 날씨로 현지 시각은…….”

기장의 방송이 끝나자 승무원들은 간이좌석으로 가서 앉은 후, 안전벨트를 매고 약간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여승무원이 나의 눈과 마주치자 잠시 밝은 웃음을 띠더니, 다시 긴장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기체가 순간 굉음과 함께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랜딩 했다. 옆 창문으로 공항 건물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나이 들어 보이는 수녀가 무사히 착륙하자 가벼운 기도를 마치고 나를 보며 환한 미소를 띠는 모습이 어머니를 떠올렸다. 비행기가 멈추고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좌석에서 일어나 웅성거리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비행기 트랩으로 나오자, 지중해의 습기가 섞여 있는 따뜻한 바람이 내 얼굴을 감쌌다. 오랜만에 방문한 도시의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일반 비행기들은 보딩 브리지를 통해서 건물로 이동하지만, 내가 타고 온 카이로발 비정기선은 특별구역에서 버스로 이동하였다. 유럽의 일상적인 공항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사복을 입고 중무장한 채 선글라스를 낀 보안요원들이 건물 요소요소에서 승객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동국가에서 들어오는 비행기들은 통상적으로 보안을 강화했다. 승객들은 몇 개의 안전 루트를 통해 보안요원들에게 까다로운 검문검색을 받은 후, 메인 게이트로 들어올 수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현지인들로 보이는 까만 빵떡모자를 쓴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나는 입국 승객 통로를 지나서 긴 에스컬레이터와 무빙워크를 타고 내려왔다. 입구에는 많은 사람이 입국 수속을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내국인 입국심사대에서 있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은 유대인인 듯했다.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시민권을 부여했다. 본사의 여권 담당자가 이스라엘 입국 시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지 말라는 말이 생각이 나자,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입국심사를 유심히 보았다. 여권에 이스라엘 입국 도장이 찍히면 중동 일부 국가에서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별도 정밀 입국 검사로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출입국관리자들도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

“입국 목적이 뭐죠?”

여권 검사대에 앉았던 여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권을 스캔하면서 컴퓨터에 나타나는 내 사진과 대조하면서 물었다. 비즈니스라는 일상적인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 여권을 한 장씩 넘기며 찍힌 도장을 보고 있었다.

“방문회사와 방문자 이름을 말해주세요.”

여느 공항에서는 확인하지 않는 사항을 그녀가 물어보았다. 그녀의 추가 질문이 일반적으로 끝날 수 있는 입국 통과의례와 달리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이집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여권에 붙어있는 워킹비자로 확인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대치 중이어서 중동 국가에서 온 승객들의 출입국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있었다. 출장 전 팩스로 본사에서 보내준 회사의 공식 방문허가서를 그녀에게 보여줬다. 그곳에는 그녀가 요구한 사항이 기재되어 있었다. 방문하려는 회사는 이스라엘 국영기업인 방위산업체였다. 그녀는 다시 나를 한번 꼼꼼히 훑어보더니 조그만 별도 백지에 스탬프를 찍으며, 출국 시 그 종이를 지참하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여권을 양복 포켓에 넣고 짐을 찾기 위해서 나가려는 순간,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항 건물 정면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큰 별이 하나 있었다. 굵은 파란색 선 위와 아래 중간에 삼각형 두 개를 포갠 듯한 모양의 이스라엘 대형국기였다. 이스라엘인들은 그것을 ‘다윗의 별’이라고 불렀다.

아침 일찍부터 따뜻한 햇살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를 감쌌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면서, 내 몸에 밴 땀을 식혀주었다. 파도 소리에 잠을 깬 나는 감고 있던 얇은 시트를 걷어차며 천장을 향해 기지개를 켰다.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테라스로 나가 두 손을 하늘로 향해 뻗었다. 지중해의 파란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해안가에 있는 도로를 따라서 많은 사람이 조깅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들이 자꾸 떠올랐다. 아커만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했던 이야기들이 뇌리에 남아 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살롬!”

그가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나를 금방 알아보고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아커만 씨! 오랜만입니다.”

나는 그를 반기며 앉았던 의자를 뒤로 물리고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텔아비브를 몇 년 만에 오시네요.”

아커만은 오랜만에 본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언제 와도 항상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라 편안합니다. 좋은 호텔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커만은 이곳 방위산업체에 마케팅 담당 임원으로 있다. 그와는 프랑스의 ‘유로사토리’ 방산 전시회를 방문했을 때 미국의 무기 중개인의 소개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이후, 무인항공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나와 여러 번 한국에서 만났고, 성능시험을 하기 위해 방위사업청 직원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더욱 가까

워졌다. 그가 예약해 둔 식당은 호텔에서 가까운 지중해 해안가에 있었다. 식당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유럽식 장식과 함께 내부가 흰색으로 실내장식이 되어 있어서 밝은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가 당장이라도 식탁을 덮칠 기세로 소리를 내며 식당 앞 바위까지 몰려왔다.

조금 전까지 지중해에서 불타던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면서 어두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해안가에는 조명들이 켜지면서 또 다른 밤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커만은 유대인들이 쓰는 빵떡모자인 키파(Kippa)를 쓰고 있었다. 업무적으로 만날 때에는 한 번도 쓴 걸 보지 못했던 키파를 편안한 저녁 식사라 생각했는지 쓰고 나왔다. 그가 손을 흔들지 않았으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자리에 앉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키파를 가리키며 그것이 유대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봤다.

“키파는 히브리어로 ‘가장 높은 계층’이란 뜻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하여 네 머리를 가려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는 현대에 있어서 키파가 갖는 의미를 네 가지로 설명해 주었다. 온 인류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하여, 구약성서의 613계명을 받아들이고, 유대인의 일체성을 위하며, 모든 유대인의 선교적 표현으로 키파를 쓴다고 설명해 주었다. 유대인들이 정수리 부분에 키파를 쓰는 이유는, 인간은 정수리 부분만 맞아도 즉사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위에 있는 무한한 권위에 순종하는 뜻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기도나 식사 시간에 키파를 쓴다고 했다. 그는 쓰고 있는 키파를 머리 정수리에 맞춰서 다시 썼다. 식당 여종업원이 밝게 웃으며 메뉴판을 들고 왔다.

“이번 무인항공기 도입 건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재촉하듯 본론으로 들어갔다.

“식사는 해야죠. 우선, 제가 몇 가지 전통 음식을 권해드리겠습니다.”

그가 웃으며 메뉴판을 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순간 무안해졌다.

“이스라엘은 국가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술이전 건에 대해서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아커만은 메뉴판을 손에 들고 메뉴를 고르듯 국익을 언급하면서,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생각이었다.

“기술이전에 대해서는 별도로 협의하기로 하고, 우선 가격부터 마무리 지었으면 합니다.”

나는 급한 마음에 가격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조급해진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커만이 메뉴판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가격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자 유대인 특유의 빠른 계산이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메뉴판에 있는 사진들을 가리켰다.

“샐러드인 ‘메제’와 강낭콩으로 만든 소스인 ‘후무스’를 전통 빵인 ‘피타’와 함께 드시죠. 유대교 음식 규정에는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릴 요리가 유명하니 지중해에서 잡히는 생선요리를 추천합니다.”

그가 메뉴판에 있는 사진들을 가리키며, 내 표정을 봤는지 오히려 차분하게 음식에 대한 안내를 계속했다.

“이스라엘 전통 요리는 유대교의 식사에 관련된 율법 카샤룻(kashrut)에 의하여 먹기에 합당한 음식으로 결정된 코셔(Kosher) 음식입니다.”

아커만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코셔 음식으로 만드는 식당이 많지 않아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종업원에게 메뉴를 주문하고 나서야 그는 자연스럽게 사업에 대한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 제시한 가격은 이스라엘 정부의 첨단 기술제품에 대한 엄격한 통제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갑자기 며칠 전 본부장과의 통화내용이 생각이 났다. 이번 이스라엘 방문은 구체적인 계약과 제품의 납품 기일까지 협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방위사업청에 납품하기로 한 계약 일정이 늦어지면, 지연배상금을 물어야 해서 나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가격 및 납품일을 매듭지어야만 했다. 최근 북한의 서해 해상 무력도발에 대해서 아커만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발목을 잡힌 듯했다.

내가 이스라엘을 알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 본 영화 《영광의 탈출(Exodus)》이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유대인들의 투쟁을 그린 내용이었다. 역사에서 버려졌던 사람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견뎌내면서, 세계 곳곳에서 전전하다 다시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과정을 보았다.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겪었던 이들의 고된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만든 이스라엘이었다.

영화로만 막연하게 알고만 있었던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탈무드』라는 책을 접하면서였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신앙과 민족정신의 원천이며, 그들의 탁월한 교육과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해 준 바탕이 되었다. 그 속에는 윤리적인 가르침과 처세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들이 ‘이산민족(Diaspora)’으로 살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은 이유가 바로 탈무드에 있었다. 탈무드에 나오는 많은 내용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의 정신세계로 빠져들었다. 특히, 처세에 대한 부분은 내가 살아가는 지침이 되었다.

회사에 들어와 막연하게 생각했던 유대인들과 비즈니스를 하면서 그들의 상술에 대해 비정함을 겪으며 차츰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생각한 것이 그들에 대한 단순한 편견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많은 상처를 줬고, 극복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에게는 자존심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은 민족적인 우월감이었다. 하나님이 세계의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유일신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선택하였다는 ‘선민의식’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지난 세월의 고통도, 중동국가들 틈새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도, 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것은 바로 이 선민의식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겼었던 비즈니스에서도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들의 계산된 논리와 합법적인 행위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우월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항상 상대방의 항복을 받은 후, 베푸는 자비로움과 여유로움을 즐겼다. 나는 어제저녁, 아커만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공격에 당황했었다. 과거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반적인 군상들과 달리 그들은 언제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탈무드에서 배운 대로 실행해 나갔다. 어릴 적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겪으면서 실체를 알게 되었다. 아커만도 내게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의 계산된 사고에는 결국 개인이든 국가이든 이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만의 민족공동체라는 틀 속에서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그런 장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입사하면서 처음에 경공업 제품 수출을 담당했다. 지역은 유럽으로 국가마다 제품의 선호도가 달라서 다른 지역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 당시 가장 큰 시장은 영국이었다. 영국의 내수시장도 작지는 않았지만, 영국식민지였던 동부 아프리카 지역으로 우회수출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제품의 질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다. 가격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시장의 가격이 내려가자, 영국 바이어는 가격 인하를 위한 클레임을 제기해 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식사하면서 아커만과의 신경전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에게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20여 년 전 입사해서 거래한 회사의 사장이 영국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아커만은 내가 갑자기 꺼낸 엉뚱한 말에 당혹감을 느꼈는지, 피타를 후무스에 찍어서 먹으려다 다시 접시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그의 얼굴 모습이 내 눈동자에 비쳤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제품에 하자가 있어서 도착지에 있는 물건을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했죠.”

나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아커만 앞에서 노골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침착함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수출한 제품이 현지에 도착하자, 가격이 내려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가격을 인하하려는 협상으로 일종의 협박이었습니다.”

아커만의 얼굴이 갑자기 불그스레 변했다. 그는 탁자에 놓인 음식들을 응시하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어가 제품의 하자를 핑계로 가격을 낮추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좋은 매너는 아닙니다.”

나의 억양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아커만의 손이 움직이면서 순간 탁자에 있던 접시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듯 내 말을 가로챘다.

“탈무드에 랍비(율법 교사)인 ‘라바’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죽어서 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묻는 말은 ‘너는 장사를 정직하게 하였느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너는 떳떳하냐는 것입니다.”

아커만은 진정하려는 듯 컵에 있던 물을 한 번에 들이켠 후 계속 말을 이어갔다.

“비즈니스맨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상도덕 중에서 정직하게 하였는지,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았는지, 자기의 힘으로 남을 업신여기지는 않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신앙과 사상의 원천이며, 생활의 규범이었다. 유대인들에게 규범이라는 것은 곧 그들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징적인 내용 속에 유대인들은 장사했고, 그것은 곧 시장의 원리였다. 아커만은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유대인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설명해 줬다. 유대인에 대한 나의 어설픈 편견이 그를 자극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접시에 내려놓은 피타를 집어서 후무스에 발라서 먹었다. 그의 시선은 접시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머릿속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여러 번 만났던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 당장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전 세계에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고, 유대인인 아커만도 그들 중 일부분일 뿐이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대인들에 대한 오래된 편견을 없애고,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추천해 준 생선 그릴이 제 입맛에 맞습니다. 사람의 입맛은 조금씩 바뀌는 것 같습니다.”

아커만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유대인을 보지 말고, 유대인 전체를 봐야 한다는 내 생각에 그도 동의할 것이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여자 종업원이 웃음을 띠며 디저트를 가져왔다.

“이스라엘에서는 디저트로 꿀과 너트 그리고 과일이 나옵니다.”

아커만은 너트를 꿀에 찍어서 먹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며 빙긋 웃었다.

“내일 호텔에서 브런치를 하면서 가격 및 선적 일정 협의를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카이로 가는 비정기 항공편이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어서, 내일오후에 선적 일정까지 마쳐야 할 상황이었다.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은 밤바다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요란하게 귓전을 때렸다. 아커만과의 신경전은 이제 끝난 것 같았다. 그가 말 한대로 정직한 협상을 위한 시간만이 남았다.

나는 어제 아커만과 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넣어둔 채로 테라스에서 들어와 샤워를 했다. 비눗물이 눈에 들어오면서 잠시 쓰라림을 느꼈다. 아커만이 한 말들이 아직도 귀속에서 윙윙거렸다. 나는 오늘 저녁 비행기로 떠나기 전에 이번 사업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가격과 기술이전 문제를 어떻게 아커만과 풀어야 할지 잘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는 어제 유대인의 상도덕에 대해서 언급하자, 내가 일단 물러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정공법으로 가는 것이었다. 가격은 그가 요구하는 대로 해주고, 기술이전료에 차액만큼 부담시키면 될 것이다. 기술이전료를 얼마나 책정해야 할지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어제 호텔로 돌아와 아커만과 협의한 내용을 본사에 보내면서 지침을 메일로 요청했었다. 본부장이 보낸 메일에 회신은 간단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가격은 이스라엘 측 요구대로 하고 기술이전료에서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기술이전료가 합의 안 될 경우, 우선 제품 공급 일정만 합의하면 될 것 같았다.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프런트에 맡겼다. 서류가방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아커만이 이미 와 있었다. 그는 서류를 보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내가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브런치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식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다. 비즈니스호텔이라 정장 차림으로 업무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아커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그가 뭔가를 들킨 듯 놀라면서도 나에게 정답게 인사를 했다.

“어제 무례했던 것을 사과드립니다.”

나는 아커만에게 다가서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에게 협상 전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비즈니스에서는 사과는 없습니다. 단지 말에 대한 인정 여부만 있을 뿐입니다.”

아커만은 조용히 내 얼굴을 보면서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보였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가격과 기술이전 문제 그리고 선적 일정을 같이 결정했으면 합니다.”

대안은 이미 서로가 가지고 있었고, 어느 정도 내용도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그에게 확인했다.

“기술이전 문제는 정부와 직접 해결하겠습니다.”

방산 제품에 대한 해외 기술이전 문제는 정부의 허가사항으로 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기술이전료에 대해서도 지난번 우리 측에서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뉘앙스로 느껴졌다. 나는 본사와 협의한 대로 제품의 최종가격을 제안했고, 아커만은 수용한다고 했다. 선적물량 10 대중 금년 내 5대를 SKD(부분조립생산) 제품으로 조기 선적해 주기로 했다. 기술이전료에 대해서는 정부의 허가가 나오는 대로 최종 통보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아커만이 어느 정도 물러서면서, 조금씩 실마리가 풀려가고 있었다. 아커만의 계산은 결국 제품 가격은 받아들이지만, 기술이전료에 대해서는 유리한 입장을 취하려는 의도였다. 유대인의 탈무드 규범을 지켜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인식하고 있었다. 본사의 지침대로 협상은 완전하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우리 측의 상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커만의 계산도 있었지만, 어제저녁 유대인의 상술에 대한 공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협상에는 정도가 없지만, 나라마다 고유의 상관습이 있고 그것을 존중해 줄 때 성공적인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수 있다. 아커만은 기본적인 협상이 마무리되자 내게 귀띔을 해줬다. 그는 나에게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있는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 ‘다비드 벤구리온’ 흉상에 있는 문구를 보라고 했다. 왜 유대인을 세계의 이단아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출신으로 바르샤바에서 성공한 기업인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전 재산을 잃고, 가족들과 함께 독일군에 의해서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였죠.”

그는 지갑에서 오래된 흑백 사진을 한 장 꺼내 내게 보여줬다. 아커만의 할아버지와 같이 찍은, 행복스러워 보이는 가족사진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수용소 생활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우슈비츠 옆에 제2의 수용소 안에 만들어진 독 가스실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를 어떻게 해서든 탈출시키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나면서 죽음 앞에서 가족들이 살아남았습니다.”

아커만은 잠시 창밖으로 자유롭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저는 아버지가 이스라엘로 와서 정착했던 키부츠에서 1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국가의 존재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2년간 군 복무를 하면서 팔레스타인과의 전투에도 여러 번 참가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2000년 넘게 로마군에 의해서 쫓겨난 후, 세계 곳곳에 흩어져 나라도 없이 살았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옛 이스라엘땅은 팔레스타인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들은 1948년 그곳에 나라를 세우며 ‘디아스포라여 안녕!’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들을 쫓아내기 시작을 했다.

“‘디아스포라’는 전 세계를 떠돌며 살던 유대인을 뜻하는 말이죠.”

아커만은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이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원래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목적이라고 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모습이 드리워졌으나 곧 사라졌다.

“탈무드에 ‘그 사람 입장에 서기 전에는 절대 그 사람을 욕하거나 책망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아커만은 상대방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편견으로 보아왔던 유대인들의 실상과 그들이 오랜 역사를 거치며 방랑하면서 존재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의 질곡의 역사만큼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민의식이었다. 아커만의 머리에 있는 키파가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로스차일드대로(大路)는 철통 같은 보안 태세였고, 헌병대가 텔아비브의 미술관 전당에 있는 모든 이들을 샅샅이 검사했다. 다비드 벤구리온이 미술관에 들어와 국가 하티크바(Hatikvah)를 부른 뒤, 그는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의원들이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제 이스라엘은 공식 국가로 탄생하였으며,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다.”

-다비드 벤구리온-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수립하고자 1차 세계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땅을 손에 넣은 영국이 처음 공표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과 그들의 동맹국들에 대한 염려에서 제한 없는 유대인 이주를 거부하였다. UN이 권고한 영토 분할을 유대인들은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건국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동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리(地理)는 전쟁으로 결정됐으며,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이후 수십 년간 전쟁의 상흔에 시달리게 된다.


나는 텔아비브 벤구리온 국제공항 입구에 있는 벤구리온 흉상에 적혀있는 글을 읽으며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유난히 커 보이는 ‘다윗의 별’이 정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버스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