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이른 아침에 눈을 살며시 뜨고, 하얀 천장을 바라본다. 흐트러진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이런 행동은 언젠가부터 시작된, S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요즘은 핸드폰의 기상 소리를 듣지 않아도 일정한 시간에 눈이 떠진다. 가끔은 이상한 꿈을 꾸는 날도 있지만, 숙면 후의 기상 시간은 편안함을 느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잠이 없어졌다는 소리는 귀로 흘려버린다.
S는 샤워를 한 후, 커피를 찐하게 내려 컵에 코를 대고 향을 들이마시면서, 책상에 앉는다. 컴퓨터를 켜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메일 박스를 체크하는 것이다. 오늘은 무슨 메일이 그를 자극할지 궁금해진다. 광고용 메일, 증권회사의 안내문, 아니면 보낸 메일에 대한 답장이 와 있을 것이다. 두 번째에 얼마 전에 보낸 Q의 메일이 와 있었다. 잠시 머뭇거렸다. 첫 문장은 ‘Dear Mr. S’로 시작이 되었다.
S가 Q에게 메일을 보낸 것은 그의 아내와 마지막 눈인사를 하고 1년이 지난 후였다. Q의 메일에는 S가 요청한 사항에 대해서 일정과 장소가 명시되어 있었고, 준비사항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두려움을 느꼈던 메일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면서, 지난 1년간의 긴장되었던 방황이 사라졌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 속에서 준비만 하면 된다.
S는 고통 속에서 아내를 보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녀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따뜻했던 그녀의 손길이 아직도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생생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S는 밤이면 아내를 위해서 했던 결정을 후회를 하면서, 그녀가 S 옆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환상을 겪었다. 아내가 죽은 이후로 매일 한 번씩 듣고 있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집안으로 퍼져나갔다.
S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사진 액자를 집어서 조심스럽게 챙겨 가방에 넣었다. 몇 해 전에 아내와 같이 갔던 여행지에서 찍었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겨울 바닷가에서 S가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아내는 50대의 정숙해 보이는 숙녀였지만, 그의 눈에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S는 액셀러레이터를 쭉 밟았다. 그는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기분을 느꼈다. 평일이라 많은 차들이 없어 도로는 한산했지만,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그에게는 앞에 가는 차가 느려 보였다. 진부 IC를 벗어나면서 길은 평화로웠다. 월정사로 들어가는 주변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울긋불긋한 산들이 멀리서 그에게로 달려왔다. 길옆으로 흐르는 개천에는 지난날이 흐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가을이 되면 부모 따라서 월정사를 왔다. 절을 감싸고 있는 주변의 풍광이 아름다웠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해졌다. 월정사 방문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가족의 행사였고, 성년이 되면서 힘들 때면 이곳에 와서 마음을 다스렸다. 아내와 만나서 처음 여행한 곳이기도 하다. 그녀와의 첫 여행은 서로의 믿음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을 했다.
월정사 입구에 주차하고, 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서 합장을 했다. 석탑 주변을 몇 바퀴 돌고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천장에는 연꽃이 가득히 걸려 있었고, 정면에는 석가모니불이 협시불도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삼배하고, 자리를 잡아 가부좌했다. 조용히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릿속으로 아내와의 과거 흔적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S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의 도서관에서였다. 여름 방학에 졸업 논문 준비를 위해서 후배들이 매일 아침 일찍 잡아놓은 고정석으로 향했다. 도서관 끝 창가에 있는 그곳은 캠퍼스가 내려다보였다. 아침 일찍 해가 뜨면 저녁 무렵까지 가장 밝아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를 잡아주는 후배들에게 가끔 홀가분한 금요일 저녁에 술을 사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은 항상 옆에서 같이 공부하는 K 자리에 여자 학생이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미 와 있던 후배에게 곁눈으로 힐끔 쳐다보면서 잠깐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누구야?”
후배에게 커피를 자판기에서 꺼내주면서, 턱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물어봤다.
“K형이 어제 가면서 내일 여학생이 내 자리에 올 테니 잘 모시라고 했어요.”
그는 K가 대학연합서클에 같이 활동하는 후배인데. 집이 도서관에 가까워서 여름 방학 동안 K 자리에서 공부할 거라고 하면서, K도 가끔 도서관에 나와서 빈자리에서 공부하겠다는 말도 해줬다.
K가 도서관에 온 날, 그녀와 학교 식당에서 처음으로 점심을 같이했다. 그녀의 이름이 J라는 것을 알았다. J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에 차가움을 느꼈다. 남자들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웃음기가 없는,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목소리도 차분하면서,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J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누면서 목소리는 명랑해졌고, 얼굴에 간혹 웃음도 보였다. S는 그런 J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S는 주말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대학원 진학을 위한 공부를 했고, J도 취업 준비를 위해서 게을리 보내지 않았다. S가 그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의 내면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주로 이야기하는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30분 정도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 가 전부였다. J는 저녁 6시가 되면 인사도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러 갔다.
S가 하루는 점심을 먹고 항상 가는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J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졸업 후 진로는 결정되었어요?”
J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S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외국계 은행에 들어가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
이미 목표가 뚜렷한 그녀에게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학 들어와서 외국어 공부에 전념한 이유는 외국회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영문학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죠. 아버지도 지금 일본 합작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S는 잠시 머뭇거리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진로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저는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입니다. 임상심리학 공부를 더 하고 싶기도 하고, 계속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못에 피어 있는 꽃을 응시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J의 집은 도서관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산 중턱에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이다. 오래된 집이어서 주변에는 많은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파른 골목길을 조금 올라가면 대문 옆으로 한강이 보였다. 그녀가 집 가까이 가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달려와서 그녀에게 보고 싶었다는 표정으로 긴 혓바닥으로 애정을 표했다. 그녀에게 집에서 유일하게 정을 주는 오래된 친구였다.
아래층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어머니처럼 그녀를 반겼다.
”아버지 들어오셨어요? “
J는 알면서 무관심하게 습관적으로 아주머니에게 물어봤다.
”일본 손님 때문에 늦으실 거라고 연락 왔어요. “
J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조용히 방으로 올라갔다.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 아주머니와 같이 식사했다. 원래 따로 했으나, 어느 날 아버지가 J를 불렀다.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은 아주머니와 같이 식사해라. 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주머니가 10년 가까이 집에서 도와줬으면 이제 한 가족 아니겠니. “
40대의 아주머니는 아래층 식당 옆에 있는 방에서 지냈다. 가끔 늦은 밤에 아래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지만, 내려가 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나이 차이가 있어서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J는 방으로 올라와서, 이어폰으로 핸드폰에 녹음된 음악을 들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d 단조가 흘러나왔다. ‘주여, 영원한 안식을 그들에게 주시옵소서. 끝없는 빛을 그들의 머리 위로 비춰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라는 합창이 흐르고 있었다. 강에서 흐르는 불빛이 유난히 밝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하루의 피곤을 풀었다. 그리고 새벽 일찍 일어나 운동을 했다. 그녀의 루틴이었다.
J의 아버지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부산에서 화장품 노점상을 하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두 분이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열심히 장사해서 화장품 가게를 차렸다.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을 팔면서 일본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와 한국에 공장을 차렸다. 원료는 일본에서 들여와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회사는 급성장했다. 어머니는 그 회사에 경리로 일했다.
어머니는 J를 임신하면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결혼 후 10년 넘어서 낳은 J에게 어머니는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J는 그런 어머니에게 하루종일 붙어서 곁을 떠나지 못했다. 유치원에 들어가서도 처음에 적응하지 못해 어머니가 옆에서 지켜봐야 할 정도였다. J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여느 아이들처럼 어머니의 존재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J는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변화를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어머니와 말싸움을 자주 했다.
”엄마! 나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어. “
어머니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하는 소리였다.
”엄마는 네가 변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 “
혹시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변화를 불안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어서하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J가 학교에 가면 가끔 시간을 내어 다녔던 회사를 갔다. 그녀의 손때 묻은 사무실을 들러서 같이 일했던 직원들과 인사도 하고, 남편이랑 점심 식사도 했다. 그녀는 그날도 집에서 멀지 않은 회사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고생했던 옛날을 회상했다. 차창 가로 지나가는 활짝 핀 봄꽃들을 보면서 J가 빨리 철이 들어서 같이 재미있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이 J가 어머니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S가 도서관에 도착하면서 늘 먼저 눈길이 갔던 J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순간 당황도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자리에 앉아서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면서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녀의 연락처도 없고, 마냥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J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녀를 종일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S는 다음날 그녀의 걱정으로 잠을 설쳤지만, 일찍 도서관으로 갔다. 그녀의 책상은 비어있었다. 도서관 오다 꺾어 온 보라색 나팔꽃 세 송이를 그곳에 놓았다. 보라색이 그녀의 차고, 냉정한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기쁜 소식’과 ‘당신에게 얽매이다’라는 꽃말이 생각이 나면서 야릇한 미소가 입가에서 떠올랐다. S는 그녀에게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의 발자국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J가 오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기색에도 표정 없이 S에게 인사만 하고 자리로 갔다. 그녀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가끔 쳐다보는 그 시선은 그녀에게 닿지를 않았다. 시계를 보면서 점심시간만 애타게 기다렸다.
S가 J와 말을 건넨 건 식사를 마치고 나서였다. 어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나팔꽃 좋아하세요? “
누가 갖다 놓은 지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었어요. “
그녀에게 어머니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실, 어제가 어머니 기일이어서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
J는 조용하지만,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10년 전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죠. 그때는 제가 나이가 어려서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
그녀의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했고,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데, 어머니와 많이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유도 없이 그랬죠. 어머니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
중간에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옛날 기억을 해나갔다.
”아침에 나팔꽃을 보자 어머니 생각이 더욱 많이 났습니다. 집 정원에 나팔꽃을 심어놓고 매일 한 번씩 물을 주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
조용히 듣고 있던 S가 잠시 말을 끊었다.
”제가 그런 사정도 모르고 도서관에 올라오다 예뻐서 세 송이를 자리에 놓아드렸습니다. 어머니가 그 꽃을 보았다면 좋아하셨을 겁니다. “
그녀는 고맙다는 말 이외에 어머니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S는 월정사를 다녀온 후, Q가 보낸 메일을 자세하게 다시 한번 읽어봤다. Q에게 진행 상황에 대해서 몇 가지 부가적인 질문을 보냈다.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빈틈없이 사전에 준비해야 했다. 경험이 없는 일은 항상 걱정이 따랐다. Q에게 요청한 처리 결과는 최종 확정 후, 확인이 불가했다. Q는 S가 K에게 부탁해서 소개받았다. S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한동안 K와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내가 없으니 너무 허전해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네. “
S는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힘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힘을 내고, 외국에 있는 아이들 걱정도 해야지. “
K가 S에게 한 말이지만, S는 의례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S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다. 둘 다 외국으로 중학교 때 유학 보내서, 현지에서 살고 있다. 딸아이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고, 둘째 아들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아내가 아이들과 현지에 같이 있었으나, 아이들이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S는 그런 애들에게 아버지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학 생활 뒷바라지해 준 엄마가 죽고 나서, 아이들의 마음도 점점 한국에서 멀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이 한국으로 오지 않는 한, S가 현지로 가서 아들이랑 같이 살지 않으면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그런 S는 아내를 빨리 따라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야 이제 한국에 와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내가 현지에 가서 살기에는 답답하겠지. 내 생활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
S는 넋두리처럼 이야기했지만, 이미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가 되었다. K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S에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K가 S의 결정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S의 부탁을 받고, K는 해외에 사는 친구에게 시간이 확정된 것이 아닌 만큼 세밀하게 조사해 달라는 메일 보냈다. 그 친구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회신을 했다. K는 S를 몇 번 만나서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지만, 그의 확고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K의 친구에게 자세한 내용과 함께 전문가인 Q의 연락처를 받았다. 요청사항은 S가 직접 Q와 연락하기로 했다.
J가 S와 가까워진 것은 그녀가 외국계 은행에 취업하면서였다. J의 직장이 S가 대학원에서 조교를 하는 학교와 가까이에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바쁜 일로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S가 J에게 회사 퇴근 후 저녁을 같이하자고 연락을 했다. 그들은 서로의 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그런 관심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일은 재미있어요? “
S가 저녁을 먹으면서 J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어봤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은행 일이 시스템으로 진행되어 아직 서툽니다. 옆에서 많이 도와주는데, 빨리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아요. 기획 업무를 맡고 있어 본사에서 온 외국 직원들과 영어로 업무 협의를 하고 있어요. 다행히 전산 관련 업무는 별로 없습니다. “
J는 신입사원처럼 업무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해 줬다. 아직은 정신이 없지만, 조금씩 조직에 적응해 가는 것 같았다.
”본사에서 온 외국인들과 문화적 차이로 조금 힘들겠네요. “
J의 성격으로 봐서는 그들과의 문화적 차이보다 합리적인 업무로 오히려 편할 것 같았다.
”학교에 신입생들이 들어와서 매우 바쁘겠어요? “
S는 J가 과거보다 매우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와 살면서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부담감이 회사 다니면서 많이 줄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표정도 상당히 밝아졌고, 말도 많아졌다. 옷도 학교 다닐 때와 달리 정장을 하면서 더욱 성숙해져 보였다.
”이제 정리되어서 대학원 강의 준비만 하면 됩니다. 요즈음 신입생들은 자기 관리가 철저해서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어요. 담당 교수와 외부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게 힘듭니다. “
S는 J를 유심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우수에 찬 눈빛도 많이 달라졌고, 의젓한 여성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난 2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그녀와의 추억을 만들지 못했다. 서로 바빠서인지 서울을 벗어난 여행도 없었다. 가끔 만나서 영화를 보거나 음악 연주회 간 기억이 전부였다. 그녀가 가끔 맛집을 찾아서 연락 오면 같이 가는 정도였다. S가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 머리도 식힐 겸 해서 J에게 가을 여행을 제안했다. 그녀는 흔히 좋다고 했다. 그녀도 틀에 박힌 직장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J에 대해서는 가족이 다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아직 소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은 그런 가족의 기대를 만족시킬 기회가 되었으면 했다. 그녀의 집 근처에서 태우고 월정사로 향했다. 일정은 이미 그녀에게 알려주고, 동의를 구했다. 영동고속도로에는 주말이라 많은 차들이 밀리고 있었다.
월정사로 가는 주변에는 단풍이 들면서 울긋불긋한 산들이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길옆의 개천에는 그녀의 모습이 흐르고 있었다. J에게 월정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가족과 자주 오는 곳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10여 년을 살면서 가족이라는 말이 조금은 어색했을 것이다.
”부모님이 불교 신자이신가 봐요? “
J는 종교에 관한 관심은 많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녀를 어릴 적 집에서 가까운 절에 데리고 다녔고, 절 입구에 사천왕상을 보고 울면, 어머니가 품속으로 껴안았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집안이 대대로 불교 집안이라 자연스럽게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
J는 월정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어머니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을 기억하려고 애쓰는지 간혹 먼 하늘을 보았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J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입니다. “
J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S를 쳐다보았다.
”가족이 J 씨에게 관심이 많아서, 집으로 같이 인사드리러 갔으면 합니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J는 ‘부담’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제대로 저를 보살펴주지 못해서 항상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빨리 좋은 남자 만나서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죠. “
J는 S의 가족에 대한 부담보다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부담으로 말을 돌렸다. S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S는 그녀의 ‘부담’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오히려 S가 그녀를 기다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J는 아무 말 없이 S의 손을 꼭 잡은 채 월정사 대웅전을 바라보았다.
아내인 J와의 결혼 생활은 순조로웠다. 아이들이 잘 커 줘서 걱정 없는 부부로 살았다. 10여 년 다녔던 직장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그만뒀다. S 역시 대학의 조교수로 승진하면서, 교환교수로 해외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S 혼자 가기로 했으나, 아내가 아이들도 이번 기회에 외국에서 교육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말에 가족과 함께 가게 되었다.
1년 후, S는 홀로 귀국했다. 아이들이 현지 학교에서 적응도 잘하고,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을 했다. 아내는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 남았다. 가족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그들의 선택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주변 환경은 바닷가 근처라 아이들 교육에 더없이 좋았다. S는 학교가 방학이 되면 현지로 가서 가족과 함께 지냈다.
여름이면 그곳은 바다와 하늘이 같은 색이 되었다. 어디가 구름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과 캠핑하면 각자의 맡은 일을 알아서 했다. 아이들에게 이제는 간섭할 일이 없다. 저녁에는 하늘에 가득한 별을 보면서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줬다. 그녀가 말이 많아진 것은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덕에 이곳에 와서 아이들이 공부도 재미있어하고, 명랑해져서 좋아요. 당신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게 미안하고, 아쉬워요. “
아내와 결혼 생활이 벌써 10여 년이 지났지만, S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S는 그녀와 처음 손을 잡았을 때, 따스함과 포근함이 S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것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내의 사랑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행복하다면 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도 괜찮아.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한국으로 와야겠지.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네. “
아내는 잠시 조용해졌다. S는 그녀가 잠이 들었는지 보려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S는 그녀를 팔로 감싸며, 볼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녀도 아이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S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가 말을 하지 않지만, S에 대한 그리움과 그로 인한 고독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했을 것이다. 차라리 S가 휴직을 하고 옆에 와 있었으면 했다. S는 아내를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S가 학교에서 강의 중에 급한 일이라고 조교가 쪽지를 건네주었다. 강의 중에는 항상 핸드폰을 꺼놓았던 S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응급실에 있다는 큰애의 메시지였다. 건강했던 그녀가 응급실로 갔다면 심각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애와 통화를 해보니, 학교 마치고 집에 왔을 때 복부 통증으로 어머니가 실신해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안정을 찾아서 지금은 집에서 잠이 들었다고 했다.
S는 아내에게 한국으로 들어와 종합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이들도 이제는 알아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했던 아내에게 걱정이 되어서인지 들어오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S는 같은 대학의 후배 의대 교수에게 아내의 증상을 이야기해 주고, 담당 의사를 소개받았다. 아내가 공항 출국장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S는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집으로 들어오자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S가 항상 현지로 왔기 때문에 그녀는 5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집은 모든 게 그대로인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변한 모습을 보았다. S는 그녀를 위해서 준비한 저녁을 차리면서, 아내가 좋아하는 ‘카베르네 소비뇽’ 한 병도 식탁 위에 놓았다. 아내는 S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과 함께 와인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S는 아내가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며칠 후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가족과 자주 갔던 월정사로 향했다. S는 아내와 함께 석탑을 몇 바퀴 돌고,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S는 그녀의 검진 결과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기도했다. 아내는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좋아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옆에 흐르는 물소리가 모든 것을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S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아이들이 엄마 없이도 잘 지내겠지? 옆집 아주머니에게 가끔 들여다봐 달라고 부탁은 했는데,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 “
아내는 대학 갈 준비를 하는 애들 뒷바라지 못 해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애들이 다 커서 이제는 독립해서 살아가야 할 나이니까 잘할 거야. 어제 전화했을 때도 애들 목소리가 밝고 좋아 보이던데. “
아내의 계속되는 말을 들으며, S는 앞만 보고 걸었다. S는 검진 전에 의대 교수에게 들은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S는 아내가 오랫동안 아이들과 힘들었을 일상에서 벗어나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S는 그런 충분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질까 걱정되었다. 월정사에 온 이유는 아내에 대한 건강과 우리 앞날의 행복을 염원하기 위해서였다.
가을이 몇 해 지나갔다. 하늘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내는 병실 밖에 쌓여가는 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제 담당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르는 듯했다. 몸속에 암이 이미 다른 곳으로 많이 전이된 상태라 항암치료를 지속해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의 머리에는 ‘죽음’이라는 단어만 득실거리고 있을 것이다. 가끔 아이들과 S의 얼굴이 교차할 것이다.
평생 아파보지 않았던 아내가 하얀 병실에서 하얀 눈을 보며,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겠지. S는 이런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담당 의사가 5년 생존 확률이 10% 정도 된다고, 마음의 준비하라는 말을 기억했다. S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파묻혀 살았는데, 아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 모르게 흘린 눈물도 이제 마르기 시작했다.
S는 강의가 끝나면 학교 근처에 있는 아내가 입원한 대학병원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제는 그녀에게 해줄 말도, 그녀의 눈동자를 볼 수도 없었다. 아내는 S가 들어와도 반응하지 않았다. S는 점점 무뎌져 가는 그녀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그녀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티라미수 롤케이크를 건넸으나, 입에 대지도 않았다. S는 고민 끝에 담당 의사와 협의해서 아내를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S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아내 병간호에 전념하기로 했다. 아내의 우울증세를 완화해 주면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가끔 잠을 자다가 통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면, 처방해 온 진통제를 주면서 진정시켰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체중이 점점 줄어 갔다. 아이들이 걱정할까 봐 아내에게 전화로 연결해 주면, ‘엄마는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고통과 괴로움으로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아내의 절규에 S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S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같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S는 수면제를 처방받아서 조금씩 모아놓았다. 그녀를 끝까지 지키고 싶었지만, 힘든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편하게 보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유혹을 받았다. S도 이제는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여보! 당신이 내게 보내준 사랑을 항상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았어요. 그런 당신의 마음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지요. 난, 정말 행복했던 여자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아찔한 느낌을 받아요.”
아내는 가끔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제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그곳이 보이기 시작해요.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줘요.”
아내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겠소. 영원히 함께합시다. 당신이 있어서 너무 행복했고, 다음 생애에도 당신과 함께 할 거요,”
S는 아내와 마지막 눈인사를 했다. 따뜻했던 그녀의 손길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생생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S는 아내를 위해서 마지막 결정을 했다. S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옆에 약을 놓았다.
S는 Q로부터 받은 메일을 확인하고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회신을 보냈다. 지난 1년간 S는 신변 정리부터 외국에 있는 아이들의 문제까지 준비해 뒀다. 이번 학기 강의를 마지막으로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집에 보관해 두었던 아내의 납골함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S는 아내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해졌다. S는 K에게 부탁할 말도 있고, 마지막 인사도 할 겸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K가 회사에 늦게 끝나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허겁지겁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오랜만이야. 얼굴이 많이 여위었네. 표정은 밝아 보이는데, 뭐 좋은 일이 있나? “
K는 S의 얼굴을 반갑게 쳐다보면서, 비즈니스맨답게 늦은 게 미안해서 기분 나쁘지 않은 멘트를 했다. K는 S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제 무엇을 할 건지도 다 알고 있었다. 그가 S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신문에서 보니 회사 몇 개를 인수하려고 하던데, 너무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닌가? “
S도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S가 다시 입을 열었다.
”Q와 메일로 마지막 협의를 끝냈네. 이제 자네가 해줄 일은 나를 편하게 보내주는 일만 남았네. 몇 가지 부탁은 메일에 필요한 서류 첨부해서 보내줄 테니 회사 변호사에게 뒷정리 부탁하네. “
S의 진지한 말에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서로 주고받는 술잔 속에 그들의 마음이 이미 전해지고 있었다.
S는 수없이 다녔던 인천대교를 지나면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짐을 부치고 편도 티켓을 받아 출국장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아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데, 마중을 나왔나?’ 잠시 머뭇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다시 쳐다보자, 아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체가 뜨면서 흔들렸지만, 몸은 그런 현상에 익숙해 있었다. S의 몸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승무원에게 와인 한잔을 부탁했다. 기내는 완전 소등으로 적막감이 흘렀다. S는 이어폰을 끼고, 준비해 온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었다. 도착지가 가까워지면서, 창가에 높은 산에 있는 하얀 눈이 보였고, 그 옆으로 작은 호수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S는 아내를 곧 만난다는 생각에 얼굴이 밝아졌다. 아내와 오래전 여행했던 레만호가 창가 아래로 지나가고 있었다. 아내는 여러 번 레만호의 기억을 생생하게 이야기했었다. 알프스산맥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호수 안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곳에서 S와 영원히 살고 싶다고 했다. 투명하고, 아름다움이 아내를 행복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S는 지금 베드에 누워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가고 있다. 액체가 몸속으로 들어오면, 레만호에 두 사람의 영혼이 함께 뿌려질 것이다. S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같이 할 수 있다는 행복감으로 서서히 눈을 감았다. 처음 J를 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아내가 저 멀리서 S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다. S도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S는 영원히 함께 할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