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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13. 2021

회의주의의 원조 피론의 돼지

20대에게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 고대 철학

밴스, 우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간다. 낙심되고 지치고 좌절하고 우울할 때가 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이 땅에 태어날 때 이미 치열한 경쟁을 뚫고 태어난 승리자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용기를 갖자. 지구가 존재하는 우주의 공간은 놀라울 만큼 생명체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안전하고 평온한 우주의 공간 안에 우리가 생존한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이 생각을 하면 감사하다. 가상 망원경으로 블랙홀을 관측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적어보았다.



회의주의의 시작, 피론(Pyrrhon)


오늘은 회의주의의 원조라고 불리는 엘리스의 피론(BC.365~270, 퓌론이라고도 부른다)을 만나보자. 그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의 시대에 태어났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신 뒤 혼란스러운 시절에 태어났다. 아테네가 몰락한 뒤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철학 사조가 유행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We know Nothing.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피론의 입장은 소크라테스의 '우리는 모른다(무지)'는 입장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회의주의적 입장을 가졌는데, 피론은 이 정신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피론도 아무 글도 쓰지 않았으나 400년 후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AD 160~210)가  《피론주의 개요》라는 책으로 출간하여 피론의 사상을 알렸다. '경험적(empirical)'이라는 단어가 이 엠피리쿠스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회의주의란(skepticism)? 독단주의(dogmatism, 확정주의)에 반대하는 말인데,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당시 그리스의 신중심의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상이다.


흔히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감각으로 어떤 사실이 진짜인지를 믿으려고 하는데, 피론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도 우리를 속일 수 있기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주장한다. 피론이 추구한 행복은 혼란스러운 정치적 시대적 상황 속에서 흔들림 없이 마음의 평정(tranquillity)이었다. 피론이 알렉산더 대왕을 따라서 동방 원정길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알렉산더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세계를 통일하는 꿈을 원대한 꿈을 가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과 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원정 때 동방을 연구할 학자들을 데려갔다. 그때 피론이 30세로 이 동방원정에 참여해서 인도에 가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인도에서 나체 상태에서 수행을 하고 속세의 무상함을 잊어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고승들을 만나서 느끼고 깨달았던 게 많았다. 원정에서 돌아온 피론은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화(평정심, 아타락시아 Ataraxia)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피론주의의 키워드는 판단중지(에포케, epoche)와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 Ataraxia)이다.


'판단중지(에포케) =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피론이 선택한 해결책은 '판단중지(에포케, epoche)였다. ※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9)이 '판단중지'를 말한 줄 알았더니 놀랍네, 그 원조가 피론이라니. 재미있는 발견이야.


회의론자가 행복하게 사는 법은 판단중지이다.

판단하지 말아야 행복할 수 있다. 판단을 중지하라!


소크라테스가 진리에 목말랐기 때문에 배고팠다면, 피론은 진리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배부른 돼지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글쎄,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진리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회의주의도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부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다만 피론의 주장은 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확실한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아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의 오감도 불완전하기에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피론에게 있어서 삶을 대하는 유일한 자세는 모든 판단을 중지한 채 모든 것에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지나친 확신주의를 깨는 것이다. 어떻게 회의주의의 판단중지가 마음의 평안을 찾는 과정인지 도식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어떤 객관적인 진리도 알 수 없다. 인식 기관을 통하지 않고 인식 기관 밖의 객관적 진리를 직접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주관적 인식을 객관적 진리와 비교할 수 없다.
3. 확인할 수 있더라도, 전달할 수 없다. 주관적 인식을 객관적 인식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4. 전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 객관적 인식에 담긴 주관적 인식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 없다.  
5. 최선(또는 차선)의 행동은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다.
6. 판단을 중지하면 찾아오는 편안한 마음이야말로 최선의 행복이다.



피론의 돼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택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이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한 말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돼지를 예찬하는 고대 철학자가 있다. 그가 피론이다. 이런 일화가 있었다.

피론(Pyrrhon)의 돼지. 피론, 회의주의의 시작

피론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심한 폭풍우 때문에 금방이라도 배가 부서질 것 같았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공포에 떨며 야단법석이었다. 탈출을 시도하려는 사람, 물을 퍼내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등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새끼 돼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사람들이 좌충우돌하며 떠들어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밥을 먹고 있었다. 이때 피론이 말한다. "현자는 언제나 이 새끼 돼지처럼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 속에 피론의 회의주의 사상이 다 들어 있다. 피론의 돼지는 피론이 주장한 '마음의 평정'을 이미 체득했다.  


돼지를 우습게 보지 마라. 피론의 돼지에게 아타락시아를 배우라. 생각하는 돼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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