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게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 고대 철학
밴스야, 글쓰기를 추천한다. 글쓰기는 최고의 공부다. 마구쓰기(messy writing)를 배워라. 글 쓰는 두려움이 사라진다. 마구쓰기란? 처음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마구 써보는 것이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문법을 의식하지 말고 쓰는 자기만의 글이다. 그러면, 글의 나아갈 방향이 잡힌다. 연구를 많이 한다고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가 더 힘들어진다. Write, Write, Write!
아우구스티누스는 문(door)이요 저수지(reservoir)이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외래어 표기법임, 이하 영어식으로 어거스틴으로 표기)는 고대를 닫는 문이고 중세를 여는 문이다. 그는 고대 헬라철학의 사상의 물줄기를 저장한 저수지이다. 그 저수지에서 서구 사상과 기독교 사상이 흘러나왔다. 어거스틴은 철학이 현실을 인식하고 파악하는데 유용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앞에서 만났던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서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계기로 5세기부터 15세기의 중세에는 신학과 철학은 사이좋게 지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통하여 신학을 전개한다.
어거스틴은 수많은 물음을 가졌다. '내가 뭘 하면 되나? 어떻게 살까? 무엇을 믿어야 하나?' 이런 질문을 가지고 어거스틴(354-430)은 많은 책을 저술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만일 그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다면 지옥으로 인도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과 긴장을 가지고 글을 썼다. 그는 신정론에 관하여 글을 썼다.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왜 하나님은 악을 이 세상에 허용하시는가?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대한 두 가지 거부감이 있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첫째는, 신은 전능하고(omnipotent) 선하시다는데(good) 어떻게 악이 있을 수가 있는가? 신이 선하다면 악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받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악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신은 선하신지는 몰라도 전능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을 '신정론'(Theodocy, 신은 옳은가? 왜 악이 있는가? 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 이 신정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쾌락주의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이다. 에피쿠로스는 방탕한 사람이 아니라 철학자요 지혜자였다.
둘째로, 어거스틴이 기독교를 거부했었던 이유는 구약성경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격이 난폭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보복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벌하시는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저히 선하신 신이라고 여길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 하면 전능하고 선한 속성을 가졌다고 본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신데,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할까? 지진과 질병과 같은 자연적인 악이 존재하고, 살인과 고문 같은 도덕적인 악이 존재한다. 쾌락주의의 원조인 에피쿠로스는 이 악의 문제를 깊이 인식했다.
선하고 전능한 신이 왜 악을 관용할까? 만일 하나님이 악한 일을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이런 하나님은 전능하다(all-powerful)고 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한데 악한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런 하나님을 어찌 선하다(all-good) 하겠는가?
어거스틴은 도덕적 악의 문제에 집중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아실 텐데 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셔." 이런 설명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가령 한 강도가 누군가를 죽이려고 한다고 상상해보자. 날카로운 칼을 들고서 사람을 찌르려고 한다. 하나님은 전능해서 이 강도를 능히 막을 수 있다. 강도의 뇌신경을 바꿀 수도 있지 않는가. 강도가 도둑질하려고 사람을 칼로 찌를 때 그 칼을 고무로 바꾸실 능력도 있지 않나. 칼로 찔러도 사람에게 들어가지 않고 튕겨져 나오게 할 수도 있지 않나. 왜 사람이 무고하게 칼에 찔려 죽어야 하나.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이런 일을 원치 않으실 것이 아닌가. 왜 하늘에서 천둥을 치고 벼락을 내려 강도가 칼을 놓치게 하지 않을까.
왜 하나님이 그런 악한 일을 허용하실까?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악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악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한단 말인가?
젊은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악이 발생하기 원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니교도(Manichaean)가 된다. 마니교는 오늘날 이란인 당시의 페르시아에서 온 종교이다. 마니교 사상은 이원론적이다.
마니교는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마니교는 선한 힘과 악한 힘이 끊임없이 싸운다고 보았다. 선신과 악신, 둘 다 대단히 강하다. 둘 다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 어떤 때 어느 장소에서는 악신이 강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선신이 돌아와 악을 물리친다. 마니교는 세상에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설명했다.
악은 어둠에서 오고 선은 빛에서 온다. 선은 영혼으로부터 나오고, 악은 육체의 연약함과 욕망 등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마니교는 신이 전능해서 현실의 모든 문제를 다 통제하고 있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신이 세상을 다 주관하는 게 아니니까, 신은 악의 존재에 대하여 책임질 필요가 없다. 마니교의 신은 악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 문제가 있다고 신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 살인이 일어나는 것은 그 살인자 안에 있는 어둠의 세력이 그를 범죄하게 한 것이다. 빛의 세력이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마니교의 설명은 어거스틴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신이 둘일 수 있는가? 신은 하나여야 하지 않나?' 어거스틴은 마니교 최고 지도자를 만나면 그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마침 최고지도자가 어거스틴이 있는 지역을 방문해서 물었다. 그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어거스틴의 양에 차지 않는다. '왜 선과 악의 싸움은 끝이 없을까? 왜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까? 과연 선신이 악신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에서는 악의 세력이 크지만, 하나님의 능력보다 결코 강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여전히 악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실까? 왜 이 세상은 이토록 악이 많은 걸까?'
어거스틴은 이 문제로 깊이 오랫동안 골몰했다.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에서 답을 찾는다.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이 글을 계속 읽을 것인지도 너의 자유이지. 어떤 사람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인간은 자유를 버거워하고 부담스러워한다고 썼다. 그래서 독재를 허용하고 누군가 강한 사람이 군림해주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자유가 분명 좋은 것이지만, 자유에 따른 책임은 무겁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좋게 생각했다. 도덕적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 십계명(하나님을 섬겨라, 우상숭배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등) - 을 따라 좋은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준 결과 악을 선택하고 말았다. 거짓말, 도둑질,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살인 등이다.
어거스틴은 383년에 수사학 교수로 로마에 갔다가 로마 학생들이 어거스틴을 잘 따르지 않자 마침 밀라노의 교수직에 지원했다가 합격하여 384년에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를 하는데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만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다음의 해석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감정(정서, emotions)이 이성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물욕이나 재물욕 그리고 육체적인 욕심에 빠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플라톤처럼, 어거스틴도 인간의 이성이 감성을 다스려야만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적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선을 행하도록 만들었다면 아무런 악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여 선택하고 결단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조정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막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졌다. 그런데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직접적인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 악은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인간의 선택의 결과이다.
'원죄(Original Sin)'란 아담의 범죄를 말한다기보다는 그 결과로 인하여 인간이 가지는 죄의 본성을 말한다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원죄를 아담의 범죄에 국한시킨다면, 사람들이 왜 아담의 범죄 때문에 내가 형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억울해한다. 우리는 아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최초의 인류인 아담에게 주었다. 모든 과일을 다 주셨다. 단 선악과는 예외였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뱀은 하와를 통해서 아담까지 무너뜨렸다. 참으로 놀랍다. 자기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준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믿다니. 인간의 어두운 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무튼 선악과 범죄 사건은 단순히 과일 하나 따 먹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운더리를 침범한 사건, 하나님을 배신한 사건이다. 어거스틴은 이 죄성(원죄)이 부모의 성행위를 통하여 출산된 자녀에게 전수된다고 보았다. 성행위를 통하여 전수된다는 표현은 성행위를 '죄악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이는 순전히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삶에 대한 개인적 성찰에서 나온 것일 뿐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어거스틴의 원죄 교리는 아담의 범죄 때문에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는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악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사상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에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지하고, 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하나님으로 남는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교수직 생활에 불만을 느끼다가 384년(30세)에 밀라노 시의 수사학 교수로 선발되어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밀라노에 오자마자 그곳의 감독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찾아갔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그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이상하게도 어거스틴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그 감독에게 끌려갔다. 특히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친절함, 그의 권위 있는 설교와 성서 해석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철학적인 회의론을 극복하게 도와주었다. 즉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하는 어거스틴에게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한다.”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이때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넘어 밀라노에 왔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도움으로 기독교 신앙에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 기뻐했으며, 매일 조석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아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다.
한편 어거스틴은 밀라노에 온 후 신플라톤주의자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몇 권의 플라톤파의 철학서적을 읽게 되었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하여 악의 근원에 대한 마니교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었고 기독교 신앙의 합리적 근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는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특히 바울 서신을 탐독했고, 그가 이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성서의 많은 문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할 수가 있습니까?' 그때 암브로시우스의 대답은 어거스틴에게 만족스러웠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신인동형론적'이란 거다. 하나님을 설명할 때 인간들이 이해하는 표현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때 은혜가 되었다.
어거스틴의 스승인 성 암브로시우스. 그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에 돌입시킨 분이시다. 그는 설교를 통해 이단에 빠져있던 성 어거스틴(Augustinus, 8월 28일)을 이끌어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도록 했으며, 387년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놀라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