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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13. 2021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20대에게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 고대 철학

밴스, 너에게 서양 철학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생각을 하기에 글을 쓰는 동기부여를 받는다. 함께 해주어서 고마워. 



보에티우스는 누구인가?


에티우스라는 이름과 그의 저술인 듯한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524년)이라는 책의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다. 평소 '이 책이 뭐지?' 하는 궁금증을 가졌다. 그 책을 사서 읽으면서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다. 쉽고 유익하고 유익하다. '철학'이란 여인(의사)이 감옥에 있는 자신을 '철학적 병'을 치유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죽음을 준비하고, 철학의 지혜-기독교 사상-를 후대에 남기고 있다. 


인생에서 최고로 잘 나가다가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급격한 불행을 겪는다. 간신들의 시기와 질투로 왕을 죽이려 한다는 역모에 걸려들어, 누명을 쓰고 말년에 감옥에 가서 거기서 고문당하고 매 맞아 죽게 된다. 거기서 인생, 참된 행복, 선과 악의 문제, 신과 인간의 자유 등에 대한 글을 썼다. 감옥에서 쓴 책 중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책이다. 


보에티우스(Boethius, 475-525)는 "최후의 로마인이자, 최초의 스콜라 학자"로 불린다. 그는 그리스 철학자들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기독교 철학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동고트(Ostrogoth)의 데오도리쿠스 대제가 그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하여 그를 집정관으로 채용했다. 모든 일이 형통해서, 부유하고 좋은 결혼생활을 하고 세상에서 칭찬세례를 받았다. 정부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는 철학 공부를 틈틈이 했다. 그에게 철학은 구체적이며 실용적인 삶의 지혜였다. 스콜라철학의 목적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합리적으로 변증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최고의 행복에서 최고의 불행으로 떨어졌다. 가장 비참한 이 상황에서, '철학'이란 여인이 보에티우스를 위로하고 치료하는 형식으로 책이 구성된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자서전이라고 할까.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은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이 책은 중세에 성경 다음으로 많은 사본을 가진 베스트셀러였다. 감옥에 갇혀서 죽기 2년 전에 쓴 책으로, '철학'이라는 여인 - 자신을 길러준 '나의 보모'라고 소개함 - 이 감옥 있는 갇혀 절망하고 있는 자기와 대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짧고 간결하고 교훈적인 글이다. 보에티우스가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며, 지난날을 곰곰이 생각하며 눈물겨운 한 탄을 할 때, 한 여인 - 자신의 보모, 철학이란 여인 - 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한다. 감옥에 있는 보에티우스의 탄식과 의사로 등장하는 철학이란 여인의 말을 들어보자. 《철학의 위안》은 역모에 걸려 파비아 감옥에서 사형수로 처형되기 전 2년 동안에 감옥에서 쓴 책이다. 보에티우스의 지혜와 기독교 신앙이 빛을 발하고 있는 불후의 명작이다.



모든 행복이 한순간 무너졌을 때


지금 세간에는 나의 일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온갖 얘기들과 소문들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신경 쓰는 일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어서, 딱 한 가지만 말해 두고 싶은데, 그것은 무죄한 사람들이 날조된 누명을 쓰고 고통당하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시한다면, 당사자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가 가장 큰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날조된 누명을 쓰고 박해를 당해 왔고, 모든 재산을 빼앗겼으며, 명예를 잃어버렸고, 나의 명성은 영원히 더럽혀졌습니다. - 감옥에서 번민하는 보에티우스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악한 것들과 대립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의사에게서 고침을 받을 때야. 《철학의 위안》

보에티우스가 역모에 걸려 하루아침에 사형수가 되어 파비아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자신의 보모인 철학이란 여인이 보에티우스를 찾아와 병을 치료하기 시작한다. 2년 정도 복역한 후 처형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철학이라는 여인은 병에 걸린 보에티우스의 상처를 닦아주고 점차로 정신적인 질병을 치료한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의 꼭대기에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 반드시 도움을 받으리라. 철학이란 여인은 변덕스러운 행운의 여신(Lady Fortune)을 상대하는 법, 참된 행복이 아닌 것과 참된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면서, '철학의 병'에 걸린 보에티우스를 치유해간다. 



행운의 여신은 변덕스럽다


배신을 당하면 그 자체보다도 '내가 배신당했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기 생각이 자기를 비참하게 만든다. 《철학의 위안》은 우리에게 말한다.


"네가 배반[유배]당했다는 생각을 버려라. 네가 유배당했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너 때문에 네가 유배생활[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일단 위기 앞에서 평정심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인 중병을 치유를 받을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유배될 수 없다. 너를 유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불운은 거짓 친구를 데려가고 참된 친구를 남겨 놓는다. 그러므로 네가 잃어버린 재물을 생각하고 탄식하고 불평하기를 그치라. 너는 온갖 금은보화보다 더 귀한 너의 참된 친구들을 얻지 않았느냐. 지금으로서는 네가 너 자신을 불행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누려온 행복과 불행을 비교해보면, 너는 결코 전체적으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네가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최고의 행운을 누린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참된 행복은 빼앗길 수 없는 것


운명의 여신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언제 또 빼앗아 갈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행복은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치유하는 의사(철학)는 참된 행복을 말한다. 참된 행복은 운명의 여신이 빼앗아갈 수 있는 외적인 조건들 - 물질, 권력, 명성 등 -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행복은 인간이 자신을 다스리는 내면에 있다. 여기서 스토아학파의 지혜를 말한다. '철학적'이란 것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날씨와 가족 배경과 같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철학이란 여인은 비록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와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여기서 말하는 참된 행복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행복을 말한다. 세상의 행복은 모두 죽음에게 빼앗기지만, 참된 행복은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의 명예와 성공과 부요함의 한계를 인식하고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on pleasing God)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친다. 세상에서 자유를 잃고 명예를 잃는 것을 염려하지 말아라.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 우리가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질 것인지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면, 너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 즉 운명의 여신이라도 결코 네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잠시 왔다가 가버리는 덧없는 것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오, 언젠가는 죽게 될 인생들아, 행복은 너희 안에 있는데, 어찌하여 밖에서 찾는 것이냐. 악으로 인한 이 세상의 고난은 내세에 보상받게 된다.


《철학의 위안》에서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영원이 있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고난과 질고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으며, 참된 행복을 모든 상황에서 누릴 수 있다.



보에티우스 고민: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왜 착한 사람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고, 악한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오는가? - 선과 악의 문제에 관하여 -


《철학의 위안》 5권에서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의 주제를 다룬다. 5권 3장에서 신의 예지와 자유의지가 어떻게 조화할 수 있나? 하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것을 미리 다 아신다면, 인간에게 무엇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보에티우스의 진짜 고민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예지(foreknowledge) 하신다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내 인생의 세부적인 것까지 다 계획해놓으셨다면, 나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고 자유도 없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획하셔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상을 주거나 심판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인간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다면, 무슨 근거로 하나님은 인간을 보상하거나 심판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에 관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 인간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 이 둘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충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전자하심을 믿는다면 이 둘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역설이다. 역설은 모순이 아니다. 역설은 진리이지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한다. 


철학의 답은 이렇다. 인간은 자유를 가졌다. 인간의 자유는 결코 환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아시지만, 인간의 삶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사상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다. 영원과 시간, 여기에 열쇠가 있다. 하나님은 시간밖에 계시다. 인간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차원이 다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미래를 알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파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미래를 프로그래밍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유가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시간 속에 있어서 서로 차원이 다르다. - 보에티우스의 역설 -


보에티우스, 마르케 국립미술관; 《철학의 위안》(박문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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