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사람인 줄 알았는데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낳은 지 9일 만에 어머니가 고열로 숨지고, 10세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불우한 홀로서기를 하며 살았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떠돌았다. 철학자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철학자로는 여기지만 그 스스로는 철학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글을 썼을 뿐이고 그 글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며, 당시 계몽주의에 반대했고,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되어서 프랑스 귀부인들의 환호를 받았다. 자연상태를 강조하며 사유재산제도를 인간 불평등의 기원으로 보아서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역발상이다. 역설적으로 말한다. 1749년 37세에 디종 아카데미 현상 논문 공고에 응모하며 글을 썼다. 주제는 '예술과 학문의 발전이 도덕의 향상에 기여하는가?'였다. 루소는 근대과학 시대였으므로 예술과 학문을 옹호하는 것을 기대했을 이 논문주제에서 루소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다. '예술과 도덕은 인류에게 해악만 끼쳤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이 1750년에 출간된 <학문 예술론>이란 책이다.
1753년에 41세의 루소는 또다시 디종 아카데미가 내놓은 논문공모에 응모했다. 주제는 '인간 사회의 불평등은 왜 상기며 이는 자연적인가?'였는데 이에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출간되었다. 수상은 못했지만 사회가 격렬하게 반응해 주었다.
<사회 계약론> 역시 1749년에 디종 아카데미 논문에 응모하여 나온 책이다. <사회 계약론>은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스에서 민중에 의한 혁명을 주장했다. 1761년에는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로 꼽히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던 연애 소설 <신 엘로이즈>를 출간했다. 1762년에는 교육 성장 소설 <에밀>을 출간했다.
루소는 13살 연상인 바랑부인의 집사로 일하다가 그녀와 연인관계가 되었다. 바랑부인이 새로운 남자가 생긴 후에 루소는 1745년 파리에서 테레즈 르바쇠르란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파리에서 묵었던 여관의 세탁하는 젊은 하녀 테레즈 르바쇠르 Thérèse Levasseur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낳았다.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따르면, 왜 루소가 배우지도 못하고 잘 생기지도 않은 이 여인을 만났느냐는 것에 대하여, '상대가 무식하여 상대적인 우월감을 누렸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생각이다. <에밀>이란 교육성장소설은 5명의 자녀를 고아원에 맡겨 둔 후에 죄책감에서 썼다고 한다. 그의 <고백록>에서 철저하게 이런 사실들을 밝히고 양심의 가책을 노년에 내려놓고 싶었으리라.
이렇게 루소와의 첫 대면을 하였다. 그의 주요 저술, 그의 삶의 정황을 간단히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