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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May 21. 2022

<위기 및 여배우의 삶에서의 위기> 비평과 반론

심영보 박사의 비평과 이창우 역자의 반론

심영보 박사의 <위기 및 여배우의 삶에서의 위기> 비평에 대한 역자의 반론(이창우)


여배우와 피스터에 대하여

이 작품도 저는 간단하게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역사적인 정황, 또한 생전에 여배우의 남편과의 적대적 관계, 그런 상황에서의 작품에 대한 해석도 중요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논한다면, 키르케고르는 처음부터 남편과의 적대적 관계에서 글을 써서 공격할 때는 언제나 그 도구가 "아이러니"였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하이베르그와의 관계를 다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작품의 해석에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키르케고르는 언제나 종교적 저작을 내놓을 때면, 가명의 심미적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이 역시 남편과의 적대적 관계에서 이 작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측면은 있습니다. 또한 그 부분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작품에 내재된 "아니러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키르케고르의 작품에, 심지어는 일기에조차 이런 요소들이 숨어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작품을 번역해온 역자로서 각 작품마다 일관되게 등장하는 면을 발견해서 말씀드립니다. 이런 점을 놓진다면, 키르케고르는 '정신병자'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시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가 어떤 시점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다가 어떤 시점에서는 요하네스 크리마쿠스보다는 높지만 안티 클리마쿠스보다는 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자신을 하나님의 스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이것이 전부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낸 강화나 일기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입니다. 따라서 일기를 신뢰하든, 어떤 저작을 신뢰하든 그것은 언제나 해석학적 이슈의 문제라 생각됩니다.


여배우와 피스터에 대한 문제도 이런 부문이 얽혀 있으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여배우와 피스터의 작품 역시 그 당시에 작품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제대로된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비평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있으나, 작품 자체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1848년 기독교 강화를 출판할 당시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생각하기를 저는 더 선호함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 역시 관점이 동일한 "존재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지 여배우로만 읽으면 보이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분명 "여배우의 변모"가 주제입니다. 처음의 여배우의 모습과 나이들어서 여배우의 모습이 다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여배우의 모습이 아니고, 본질적 "변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 당시 대중들에 의해 변화된 여배우의 인기 없음과 상관 없이, 진정한 변모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어째서 존재론인가? 제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 강화 전체는 '기독교적 실존'을 주제로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이 작품은 심미적 저작일지라도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존재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이념"과 그 "이념"을 실현시키는 변모는 인기가 없어진 여배우가 오히려 더 그 이념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죠. 바로 여기에 "주관적 진리"문제가 내재되어 있습니다.여기 짦은 글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말씀하신 것들은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석이라기보다 작품과는 전혀 다른 주변적인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일기의 내용보다는 작품 자체에 대해 더 집중하는 편이 해석에는 더 나을 듯 합니다.



이름에 대하여

인터 엣 인터, 라틴어로 "사이와 사이"에 정도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이름이 마치 철학의 부스러기에서의 동시대 제자와 간접에 제자 사이의 '간주곡'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부분은 존재의 시간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존재론의 "시간성"의 문제를 풀어냈다고 저는 평가하고 있고, 따라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배우를 보는 것이 아니고, 여배우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존재를 본다는 점에서는 문학적 장치로는 "미장아빔"의 형태가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프로쿨"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물러가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부분도 여배우의 작품과의 공통점은 '외모'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방향은 다릅니다. 이 작품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술깸과 술취함의 변증법적 운동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스스로 판단하라!]에 나와 있는 지점과 굉장이 유사한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프로쿨은 무엇을 다루려는 것인가? 진리의 본질의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쿨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교의 훈련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훈련의 모토는 PROCUL O PROCUL ESTE PROFANI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역하면 "물러가라, 물러가라, 깨끗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여"입니다. 피스터가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저게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됩니다. 그런데 술취한 것처럼 보이는 자가 일종의 경찰입니다. 그가 범죄자들을 소탕하러 다닙니다. 그래서 이 작품도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술취했는지 안한 것이는 하나님만 아신다는 겁니다. 이 문제는 단지 외모를 다루는 문제도 아니고 어떤 페르소나를 다루고자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고,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지 이 세상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술에서 깨면 술취한 자 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술에서 깨면 정말로 본질의 상태를 보기 때문에 어지럼증을 느낀다는 것이죠. 결국 포로쿨은 비진리를 '물러가게' 하면서 참된 진리를 다루고자 했던 가명의 저자가 아닙니까?


저는 이처럼 주변의 정보, 역사적 정황, 일기와의 연관성을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당시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 또한 동시대에 다른 작품과의 관계에 무엇을 의미하려 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논점을 놓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서 없이 답변을 달았습니다. 학회때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비평 감사드립니다^^




<성찬의 위로> 부록: “위기 및 여배우의 삶에서의 한 위기” 심영보 박사


1. SK의 자기기만이다.

SK는 문학적 미스터리 창작 의도를 가지고 “어느 청년의 글들”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작성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플렉스 드 성 빈센트”(Felix de St. Vincent)라 칭한다. 이 드라마는 4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BJ., No. 6060.


1. 어느 여배우 인생의 위기

2. 가을예찬

3. 콧노래 하는 사람으로서 로젠킬

4. 글쓰기 견본 집


셰익스피어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s the Problem)와 같이, “출판하느냐/ 하지 않느냐"(To Publish or Not to be Publish),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위기 및 여배우의 삶에서의 한 위기 SK가 종교작가로서 신분에 걸맞지 않게 스스로 양심적 고뇌를 토로해낸 작품이다.SBK., 548.


1848년 여름, SK는 어느 여배우 인생의 위기 원고를 손에 쥐고 출판을 원했지만, 이 작품이 너무 미학적으로 보이며, 작가 생활에서 종교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847년 초, 헤이베르그 부인이 셰익스피어 쥴리엣의 역할을 공연했을 때, SK는 헤이베르그 부인을 기쁘게 해주는 동시에 그녀의 남편, 헤이베르그 교수를 짜증나게 만드는 전략을 시도한다. 여기에 SK는 조만간에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고정관념이 어느 여배우 인생의 위기 출판을 부추긴다. 이 기사의 출판을 생각만 하면, 각성시켜 주는 것과 출판업자 기죄드와드의 요청은 “섭리로부터 암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간지에 여배우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다면, 대중들은 공격해 올 것이다. 출판하면,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일 것이며, “N.B”에 “피할 수 없는 데미지를 입을 것”이라고 SK는 표기한다.


“하나님 앞에서” 변호할 수 있기 때문에 출판을 결정하고 패드리랜더지(역주: <조국>이란 신문?)에, 1848. 7/24-27일까지 Inter et Inter라는 익명으로 연재 기사화시킨다. 만약 이것을 출판하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들은 나를 “나는 사도였다는 취지의 일종의 난센스를 퍼트리고 끔찍할 정도로 무책임한 개념적 혼돈의 전형으로 나는 완전히 망했을 것이다.”라고 SK는 고백한다. 후에 SK는 여배우의 위기는 반전된 간접 의사소통이다라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라무스 니엘슨(?)을 비판한다. 순진무구한 구경꾼에 대항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분명한 사건이다. 여배우의 위기는 SK가 의도한 방법 중의 하나로써 니엘슨의 변증법적 능력을 시험해보는 리트머스 테스트와 같은 기능이었다. “미학이 어떻게 유혹과 변명, 익명(incognito)으로 이용되는가?”를 주장하는 니엘슨은 오해했으며, 그는 본질적인 변증론자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종교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라고 SK는 비판한다.SKB., 584.


이 20쪽의 작은 글을 읽게 되면, 실제적으로 그 저자를 죽인다. 매우 미학적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 당시 자신의 비평 선언을 위한 도구로서, 초기에 SK가 길렘보우그의 작품에 대한 그의 비평을 이용했다.SKB., 548-550. 여배우의 위기에서, SK는 유사하게 시대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기회로서, 헤이베르그 부인을 이용한다. 여배우의 위기의 진정한 독자로서, 그녀에게 편지와 함께 책을 보내며, 그녀의 남편, “덴마크 미학자, 작가인 헤이베르그 교수에게 헌사”한다. 그 결과 헤이베르그 교수는 “연극에 관한 키에르케고르의 지식에 공헌”한 것으로 SK의 여배우의 위기를 추천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SK의 성공적 전략이었으며 여배우의 위기에 만족한다.


헤이베르그 교수의 와이프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여배우, 니엘슨 부인에 관한 글 때문에, 부분적으로 덴마크 최고의 여배우, 헤이베르그의 와이프에게 SK는 빚을 졌다. 그러나 SK는 헤이베르그 교수를 (포크로) 찌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오직 종교성에 관한 책을 써 왔는데, SK의 문학적 공격은 그로 하여금 신앙이 깊은 체하는 위장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변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해 줄 것이라는 것이라고 믿으며, 나의 종교성이 사람들을 옛날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냐/저것이냐E/O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으로 작가로서 전 작품의 신경은 종교성이었는데, 여배우의 위기는 내가 매우 본질적인 것, 즉 종교성과는 반작용으로 지향하는 이단이다. 세상은 매우 재미없기 때문에, 종교성을 선포하는 사람은 미학을 생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세상은 종교성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 중상하고 비방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진지하다. 약간의 변증법적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입힐 수 있다. 헤이베이그 부인에 관한 신문기사는 큰 책들보다는 더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다. 사실 기사 자체는 훨씬 구식이다.”


SK는 “NB: 주의”라고 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 한다: 전체적인 문제는 자만심의 문제이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와 인격보다는 나를 매우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기를 원하는 사색이다. 이 사색을 중단하면, 나는 심하게 후회할 것이다.BJ., No.6209. 이 같은 SK의 고백은 필자가 보기에 자기기만으로 들린다.



2. 섭리로부터 암시인가?

우울증 사색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서 내가 원했던 많은 기쁨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내가 마치 스캔들을 만든 것처럼, 마치 하나님은 나를 포기한 것처럼, 되었다. 그것은 마치 게으름, 우울증 이상, 이하도 아니다. 출판의 불편함이나 문제야기를 피함으로써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글쓰기를 정당화시켜 왔다. 그것이 잘못이다. 그러나 사색을 중단한다면, 나는 실패할 것이다. 출판할 것이다. 정직해야만 한다. 사소한 문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 나 자신이 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BJ., No.6211. 이 기사를 출판함으로써 몇몇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BJ., No.6212. 


SK는 여배우의 위기 출판으로 긴장은 했지만, 유익한 것으로 주장한다.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과거의 산파법적(maieutic structure) 구조를 확실하게 수용하는 것이며,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성격상 추진해 나아가는 것이다. 출판하지 않했더라면, 나는 간접소통의 미래사용에 관하여 모호성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각성시키는 효과는 하나님이 나에게 수수께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힘을 주신 것이 근본이 되었다. 더 이상은 아니다. 내가 당당하게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한, 그 사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며, 하나님의 처벌로서 이해한다.BJ., No. 6231, 6238, 6242.


출판업자 기죄드와드(Giødwad)의 요청은 “섭리로부터 암시”라고 생각한다거나, 자신이 정체성에서 벗어난 것은 약간의 변증법적 실수로 포장한다거나, 출판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자만심의 문제이거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처벌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등등은 자기변명,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SK는 관점에서, 심미적인 것은 마지막 순간에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2년 동안 오직 종교적인 것만을 출판한 후, 심미적인 소논문-“위기 및 한 여배우의 생애의 위기”-이 1848년 7월에 잡지 조국에 게재되면서, 심미적 저술가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변해서 종교적 저술가가 되었다는 현상설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경악스런 결론이다.) 그 이유는 애초부터 종교적 저자였지만,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심미적 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3. 영적 에로티시즘이다.

두 개의 건덕적 강화(Two Edifying Discourses)와 작은 소논문은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상응관계이기 때문에 SK의 이중성이 처음에나 나중에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거꾸로 증명한 셈이다. 모든 심미적 저술에는 가명 사용했으나, 두 개의 건덕적 강화는 SK박사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소논문은 저자의 전체 저술활동의 변증법적인 구조가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소논문의 이 같은 의의를 깊은 의미에서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고 SK는 불평한다.


SK의 심미적 저술들과 마지막 종교적 저술들 사이에, 1846년 2월 27일 출판한 후서가 등장한다. 이 후서는 전환점과 같은 역할을 하며 그 목적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해 있다. 익명의 저서들과 18개 건덕적 강화를 한결같이 염두에 두고 이 모든 저술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기여한다. 그러나 익명의 저술들이 바로 그 목적에 부합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저술의 목적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제3자인 익명의 인물이 그런 목적을 알 수가 없다. 후서는 심미적 저서도 아니며,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 저서도 아니다. 후서가 익명으로 출판되었지만, SK는 자신의 이름을 편집자로 올렸다.


처음부터 그 어떤 심미적 저서와 관점에서, SK는 문학평론과 시 창작에서 비판적 논평을 한 적이 없었다. 종교적 저술을 한지 2년이 지났으며, 익명이나 가명을 쓴 시기도 지났다. 그러나 SK는 다시금 그 증거를 남기기 위하여, 그 심미적 소논문에 인테르 에트 인테르 프로쿨이라는 익명을 붙였다. 미학적 “변모”(metamorphosis)(235)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SK의 심미적 저자로서 위치에서 그 종교적 가면을 벗어버렸다.


SK가 이 “소논문은 전체적인 저술활동을 깨닫게 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며, 소논문은 두 개의 건덕적 강화를 상기시킨다.”라고 주장한다두 개의 건덕적 강화는 1843년 5월 16일에 출판했다. 이것은 SK가 서문에서 자신의 “영적 에로티시즘”(Spiritual Eroticism)을 너무나 잘 숨기고 있기 때문에, 쾌락을 포기하고 금욕을 주장하는 “자기포기”(self-abnegating gesture)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당당하게 세상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영적 에로티시즘”에 대한 공포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관성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저 단독자”(that single individual)라는 생각이 그에게 담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저 단독자는 자신의 정체성이 세상에 노출되는 것을 기꺼이 수용할 정도로 친절하다는 것이다. 두 개의 건덕적 강화를 열정을 가지고 포옹해 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레기네였다고 SK는 고백한다.SKB., 226-227. 이런 방식으로 SK는 “유혹자의 일기”(The Seducer’s Diary)를 레기네에게 보여주려고 생각했다. “유혹자의 일기”는 욕망의 실험실에서 전해주는 보고서처럼, 요한네스가 언급하는 “관음증 미학”(aesthetic of voyeurism)을 비롯하여 에로틱을 실험하는 악마의 성격, 육감적 미학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K는 종교적 의도를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SKB., 270-271. 위기 및 한 여배우의 생애의 위기 SK로 하여금 왜 두 개의 건덕적 강화를 상기시키는가에 대한 설명은 그의 인생여정을 고려해 볼 때, 자기변명으로 들린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극무대에 올려 졌을 때, 이 둘의 비극적인 사랑이 자신과 레기네의 관계성을 연상하면서 유비 문학적 비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4. 키에르케고르는 해커작가다.

SK는 1840년대, 낭만주의자이며 연애작가인 에밀 애레스트럽(Emil Aarestrup)과 수년간 지속적으로 교제하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자의식이 강하며 타협을 모르는 외톨이의 성격으로 SK와 유사했으며, 그룬드비히와도 친분을 나누면서, SK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크리스찬 윈터(Christian Winther)에 의하면, 그 당시 애레스트럽은 덴마크에서 미학의 최고 권위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SK는 그에 대하여 재판관의 책 이외에 다른 저서에서도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SKB., 311.


1847-1848년은 SK에게 경제적 위기를 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위기의 시절에, 표면적으로, SK는 심미적 글들을 통해서 수입을 고려해야만 했을 것이다. 필립센(Philpsen)이 18개 기독교 강화집들을 모두 구매하여 과거에 출판된 것과 합본으로 재출판해 준 것은 SK의 숨통을 열게 해주었다.SKB., 333. 고난의 시절에, SK는 종교적 저술가로서 미학적 저술가로 변신하여 '외도'를 한 것이다. 이러한 SK의 작가로서 정체성을 코펜하겐 시민들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비판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1847년 8월 2일, 사랑의 역사가 출판되었을 때, SK의 모든 책에 대하여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웃었다.BJ., No.6032. 이러한 비난 속에서, 여배우의 위기는 1848년 6월 24-27일에 패드레랜데트지에 최초로 게재된다.BJ., 551. SK는 “사람들이 나는 해커작가라고 말한다”라고 기록한다. 코펜하겐 사람들은 여배우의 위기가 신문에 개제될 때, SK는 적은 돈을 받고 저질 신문기사나 써대는 핵커 작가, 삼류다. 품팔이 작가이며 엉터리 작가라고 비난한다.SKB., 332-333. 


종교저술가가 왜 심미적 예술가로 변신했는가라는 문제는 SK의 정체성의 문제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또한 SK의 저서 출판 시간표를 살펴 볼 때, SK 자신의 변명은 물론 심미적 저술들을 신학적 해석으로 연계시키는 변증법적 과정의 문제로 보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1848년, “나는 종교적 작가가 되지 못했다”고 SK는 고백한다. E/O가 출판된 것과 동시에 두 개의 건덕적 강화가 동시에 출판되었다.BJ., No.6229. 2년 후, 문제의 여배우의 위기 기사가 세상에 등장한다. 이것은 SK의 외도와 스캔들이다. SK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에게로 도피하는 일이며 행동하는 것”(to flee to God and to act)이라고 고백한다.BJ., No.6212. 


1849년, “금요일마다 성찬식에서 3개의 강론들”에서, SK는 자신은 “새”(a bird) 같은 존재로서 "진리에 대한 증인"이나 "순교자"는 아니지만, 진리 수호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 한다: “나는 신성모독과 종교성의 영역을 세속적으로 혼돈 시키는 것에 대항하여 나 자신을 지킬 것이다. 혼돈과 거만한 사유에 의한 타락에 대항하여 안전을 지키며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BJ., No.6407. 그의 약속과 실천은 찾아 볼 수 없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대로, SK는 햄릿의 우유부단한 성격처럼, 자신의 결단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하는 ‘자기기만’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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