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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7. 2021

키에르케고어《공포와 전율》가장 위대한 사람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6


아브라함 찬사 Eulogy on Abraham


만약 인간 속에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일체의 것 밑바닥에 있는 것이 광포하게 들끓고 있는 힘이 있을 뿐이고, 이 힘이 위대한 것이거나 하찮은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모호한 격정 속에서 몸부림치며 일체를 생성해 내는 것이라면, 만약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밑창 없는 공허가 일체의 것의 밑바닥에 가로놓여 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인생이란 절망 이외의 그 무엇일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만약 인류를 맺어주는 성스러운 끈이 없다면, 만약 세대라는 것이 숲 속의 나뭇잎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번갈아가며 발생하는 것이라면, 만약 세대라는 것이 숲 속의 새들의 지저귐과도 같이 번갈아가며 다른 세대와 교체하는 것이라면, 만약 인류가 배가 바다를 건너고 폭풍이 황야를 스치며 불듯이 세상을 거쳐 가고, 인류의 활동이 어떠한 사려思慮도 없고 결실도 없는 것이라면, 만약 영원한 망각이 항상 굶주린 짐승처럼 그 먹이를 찾고 있고, 그 먹이를 망각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낼만큼 강력한 힘이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생이란 그 얼마나 공허하고 쓸쓸할 것인가! 


인생이 무의미하고 변화와 진보가 없다면 인생은 절망뿐이다. 인생이 무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웅과 시인을 창조하셨다고 요하네스는 말한다. 시인은 '기억의 천재(recollection's genius)'라고 그는 말한다. 시인은 영웅이 하는 바를 하지는 못하지만, 영웅을 찬미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한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위대하였던 자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위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각기 그들이 사랑한 대상의 위대성에 정비례하여 위대했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한 자는 자기 힘으로 위대해졌고, 남을 사랑한 자는 그 헌신 때문에 위대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위대해졌다. 그들 모두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공포와 전율》26쪽.



자기 자신을 사랑한 사람은 가능한 것을 기대하며 세상과 싸워서 위대하게 된다.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하여 자기 자신과 싸워서 위대하게 된다. 가장 위대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데, 그는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과 싸운 자이다. 바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때문에 가장 위대한 자가 되었다.


1. 가능한 것을 기대하며 세상과 싸운 자 by expecting the possible, and by struggling with the world 


2. 영원한 것을 기대하여 자기 자신과 싸운 자 by expecting the eternal, and byh struggling with himself


3.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과 싸운 자이다. by expecting the impossible, and by struggling with God


요하네스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재현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알지 못하는 장소로 가기 위해서 집을 떠났지만, 자기 운명을 애통해하지 않았다. 참고로, 오비디우스(Ovid)는 로마에서 추방될 때 자기 운명에 대하여 애통해 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약속했고, 그 아들을 통하여 혈통을 계승할 것이고 아브라함을 한 나라의 아버지로 만들어주리라고 약속했었다. 시간이 흘러서, 아브라함이 늙어서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욕망을 행복하게 포기하고 그의 운명을 받아들였어도 위대했겠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바램(이삭이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기에 더 위대했다그렇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했으나 이삭을 돌려받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후손을 주리라고 아브라함을 축복했었다. 그러나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었던 후손을 빼앗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조롱하는 것과 같았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었다. 가명저자 요하네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내세에 이삭을 만나리라, 얻게 되리라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었고 그것을 기대했다. 위대한 이름을 주시겠다, 이 땅에서 큰 가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소망은 현세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His hopes were firmly planted in this life). 그렇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에게 탈출구는 죽음밖에 없었다. 요하네스는 아브라함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의심했었더라면,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번제물로 대신 드려서 자신이 영원한 찬사를 받았을테지만, 번민하는 자들을 구원할 '안내하는 별'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삭이 진짜로 바쳐졌다고 하자.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는 어느 날엔가 저승에서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여기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공포와 전율》 56쪽. (임춘갑 역, 다산글방)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했을 때,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간결한 이 말은 순종의 자세를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애걸복걸하거나 동요하지도 않았고, 억지로 집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즐겁게 떠나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않았다. 누가 이런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많은 아버지가 자녀를 잃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첫째, 이삭이 그냥 아들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은 무수한 후손으로 약속을 받았던 100세에 얻은 불가능한 아들이 아니던가! 둘째, 아브라함은 단지 이삭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받은 것이다.


요하네스의 결론은 이것이다. 아브라함은 불멸의 시인보다 못하지 않고, 모든 영웅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다. 요하네스는 아브라함에게 합당한 찬사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에게 용서를 구한다.



심미적 삶 - 자신의 기대를 따라서 살아가는 개인적인 삶이다.


윤리적 삶 - 보편의 유익을 위해서 개인의 쾌락을 버리고 초월하는 삶이다.


종교적 삶 - 심미적 삶처럼 개인을 강조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하는 단독자를 말한다. 이는 윤리적 차원으로 설명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만일 아브라함이 윤리적 차원에 머물렀더라면,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거나 자기 자신을 아들 대신에 번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윤리적 차원의 삶은 가능성의 세계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렇게 했더라면 칭송받았을 것이고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윤리적 차원의 삶의 특징은 칭송받고 영웅이 되는 것이다. 윤리적인 차원, 가능성의 세계를 살려면 칭송받을 만한 용기와 체념을 해야하며, 운명에 완전히 굴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종교적 인간이어서, 윤리적 단계에 적용되는 표현이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침묵했으며, 소망을 지녔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다. 


《공포와 전율》은 윤리적인 삶과 대조되는 종교적인 삶을 보여준다. 종교적인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우리가 말로 종교적인 삶을 표현한 것은 모두 정확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것에 대하여 최선의 것은, 요하네스에 따르면, 종교적인 것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며, 윤리적인 것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다(the religious is not the ethical, but it is something higher and better). 아브라함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행동하지 않았다. 만일 아브라함이 윤리적 차원에서 행동했더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고, 후대에 칭송을 받았겠지만, '믿음의 조상'이라는 지위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결코 윤리적 차원의 영웅이 아니라, 믿음의 영웅이다.



상기(recollection) - 플라톤, 시인의 불멸성


매개(mediation) - 헤겔 철학


반복(repetition) - 키르케고르, 종교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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