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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7. 2021

키에르케고어《공포와 전율》단독자가 보편보다 더 높다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9

문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신적인 것이 보편적인 한, 모든 의무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다. 요하네스는 윤리적인 것은 보편적이라고 말한 후에, 보편적인 윤리성을 신적인 것과 연결시켰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연결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윤리적인 의무이고 또한 보편적인 의무이며, 하나니에 대한 의무이다. 이러한 의무를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는 이웃사랑을 직접적인 하나님 사랑으로 해석하지 않고 간접적인 하나님 사랑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헤겔은 '외적인 것이 내면적인 것보다 더 높다, ' '공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헤겔은 믿음과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해서 틀리게 말한 것이라고 요하네스는 지적한다. 믿음은 정열(passion)이다. 정열에서는 내면이 외면보다 더 높다믿음은 한 개인이 단독자로서 절대자와 절대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의무는 매개될(mediated) 수 없으며 보편적인 것으로 표현될 수가 없다. 만일 표현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며 영적 시련이 될 수 없다. 믿음의 기사(the knight)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다. 심지어 또 다른 믿음의 기사에게도 아브라함 자신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믿음의 역설이란 외적인 것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다른 내면성, 하나의 새로운 내면성이다. 이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근세의 철학은 ‘믿음’을 ‘직접적인 것’으로 무턱대고 분별없이 대치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놓고 나면, 믿음은 모든 시대에 현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다는 것이 우스꽝스러워지고 만다. 이리하여 믿음은 감정이라든가 기분이라든가 특수기질特殊氣質이라든가 허황된 생각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한갓 헛된 무리들 속에 끼어들게 된다. 그러는 한에 있어서는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철학의 말은 옳다. 그러나 철학이 이런 말투를 쓸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하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믿음에는 무한성의 운동이 선행한다


지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그는 무한성의 운동을 수행했다. 그의 무지無知는 무한한 체념이다. 이 과제가 오늘날에 있어서는 경시되고 있지만, 그것으로써도 이미 인간의 힘에 어울리는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가 완수되고 나서야 비로소, 개별자가 이 무한한 것 속에 자기를 배출해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믿음이 싹틀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 셈이 된다.


따라서 믿음의 역설은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 높이 있다는 것이고, 개별자가 절대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로써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지,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로써 절대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역설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의무관계에 있어서는 개별자는 개별자로서 절대자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공포와 전율》 109쪽


요하네스는 누가복음 14장 26절을 인용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개별자만이 믿음의 기사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 심지어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인가! 다른 사람을 잘 대하지 말라고 한다면 도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절대적 사랑을 요구하실 때,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시지 않는다. 아브라함도 여전히 이삭을 매우 사랑했지만,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준 윤리적인 표현은 혐오(hatred, 증오)였다. 


사람들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종교적 실존)이 쉽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보편적인 것(윤리적인 것)이 더 어렵고 더 칭찬받을 만한 목표로 여긴다. 개별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감시 밑에서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것이고, '두렵고 떨림으로'라고 말할 때, 개별자로 살아가는 것은 가장 끔찍하면서도 위대한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의 기사는 보편적인 것을 알고 가치있게 여기지만, 그러나 보편적인 것보다 더 높은 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홀로 있는 것이며 오해받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에게 영웅이 아니라,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믿음의 기사는 하나님을 2인칭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비극적인 영웅은 오직 3인칭으로 신을 언급할 뿐이다.


비극의 영웅의 운명은 믿음의 기사처럼 어렵지가 않다. "비극적 영웅은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체념한다. 믿음의 기사는 보편적인 것을  단념한다.(<공포와 전율> 119쪽)" 비극적 영웅은 행동하면 종결하게 되고 안식할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을 성공적으로 성취했기 때문이다. 반면, 믿음의 기사는 계속해서 시험을 치르게 되고, 보편적인 것(윤리적인 차원)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에 직면한다. 믿음의 기사의 특징은 계속해서 절대적 고립(isolation)에 머물려는 정열을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요하네스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있든지, 아니면 절대적 의무도 없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사라지고 누가복음 14장 26절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단독자 키르케고르 vs. 보편론자 칸트와 헤겔


키르케고르 시대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없다는 게 주류의 입장이다. 칸트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는 없다. 이게 주류이다. 칸트에 따르면, "하나님에 내게 말씀하셨다"라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서 자율적이고 책임있게 행동해야만 한다. 칸트에 이어서 헤겔도, 모든 도덕법은 보편적이라고 주장한다. 헤겔은 윤리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요하네스/키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보편적 윤리적 원리에 반하여 행동해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하나님을 절대 정신과 동일시했다. 절대정신은 보편적 진리를 구현한 것을 말한다. 진리에 도달하려면 개인성을 억압하고 보편적인 것에 참여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적인 관계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프라이버시(사적인 것)를 버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3인칭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개인성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기사에게 하나님은 3인칭이 아니라 2인칭이 된다. 믿음의 기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소유한다.



아브라함의 프라이버시


믿음의 기사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완전 고립된 상태에서 행동한다. 하나님과 그의 관계는 사적인 것이어서 보편적 신앙에 호소할 수가 없었다. 믿음은 역설이며, 역설은 단독자가 보편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보편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신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편적인 것(윤리적인 것) -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생각- 에 순응할 것이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시험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려는 유혹이었다. 아브라함은 도리어 자기 생각에는 틀린 것,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야만  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 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네게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두렵고 떨림'이란 지속적인 시험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윤리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넘어가야만 하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며, 윤리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가능성에 저항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과정에 불안이 담지되어 있다.


헤겔과  덴마크 사회는 지금 내면성은 사라지고, 믿음은 사라지고, 외면적이고 공적인 것이 더 가치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믿음에서 중요한 요소인 프라이버시와 불안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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