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Ohr Dec 07. 2021

키에르케고어《공포와 전율》단독자는 숨겨져 있다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10


종교적 실존의 단독자는 숨겨져 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기도를 사라와 엘리에셀과 이삭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던가? 


윤리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며, 여기에서 세번째 질문('아브라함이 윤리적으로 책임을 져야했는가?')이 도출된다. 윤리적 실존과 달리, 종교적 실존의 단독자는 숨겨져 있다. 


드러난 것(*윤리적인 것)


은폐된 것(*심미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 이야기


드러난 것(*윤리적인 것)과 은폐된 것(*심미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요하네스는 여러 일화를 말한다. 첫번째 이야기는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 이야기이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지만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는 둘만의 사랑을 비밀로 했다. 이 숨김(hiddenness)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심미적인 것이다. 심미적인 것은 은폐(숨김, hiddenness)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심미적 단계의 은폐성은 우연히 모든 일이 두 사랑하는 남녀에게 유리하게 진행함으로 보상을 받는다. 반면, 윤리학에서는 우연(coincidence)의 여지가 없다. 윤리학은 폭로(드러냄, disclosure)할 것을 요청하고, 두 남녀가 그들의 사랑을 비밀로 한 것에 책임을 질 것을 요청한다. 


미학은 숨어있는 것을 요구하고 그것에 보상을 하지만, 윤리학은 나타나 있기를 요구하고 숨어있는 것을 벌한다. 《공포와 전율》 136쪽.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a at Aulis)


두번째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a at Aulis)》 이다.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쳐야만 한다는 내용이다. 심미주의에 따르면, 아가멤논은 한편으론 침묵(silence)을, 다른 한편으로는 누설(disclosure)을 해야만 한다. 자신의 슬픔을 나누어보았자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침묵해야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희생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소식에 눈물 흘리는 딸을 보는 영적 시련을 견디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피게니아가 희생제물로 드려져야만 한다는 소식을 늙은 종이 그녀에게 전달하게 하는 방식으로 심미가들은 출구(outlet)를 마련했다. 윤리가들은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비극적 영웅 아가멤논은 보편적인 것을 추구해야하고 아무것도 숨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프시케와 에로스


비극적 영웅과 윤리적인 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이다. 요하네스는 세번째 이야기 프시케와 에로스(큐피드, 아모르)의 사랑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에로스(아모르)가 프시케를 임신시켰다.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말하기를, '이 임신 사실을 비밀로 지키면, 태어날 아이가 신이 되지만, 비밀을 말하게 되면 인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누설하는것(Disclosure)과 비극적 영웅은 둘 다 인간적인 현상이다. 숨기는 것(Hiddenness)은 마귀적이며 신적인 영역이다. Hiddenness is the realm of the demonic and the divine.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


네번째 이야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는 델피의 신탁을 의뢰한 신랑의 이야기를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결혼하면 재앙calamity을 당하리라고 말한다. 요하네스에 따르면 신랑은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째 선택권은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침묵한 채 약혼녀와 결혼하는데, 그녀도 그 재앙에 일부 책임이 있게 만들어서 그 남자의 재앙에 그녀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둘째 선택권은 그가 침묵한 채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 선택이다. 심미가들도 이 선택을 선호하는데, 이것은 약혼녀를 실족시키며 그녀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현실에 충격을 줄 것이다. 셋째 선택권은  그 남자가 이 신탁의 내용을 다 밝히는 것이다. 이렇게 밝히는 것은 윤리가들이 선호하는 것이다. 윤리가들은 약혼녀에 대한 배려에서 그 남자의 운명을 숨기려고 하는 것보다는 밝히는 것을 더 가치있게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번째 선택을 하는 비극적 영웅, 즉 결혼하면 재앙이 닥칠 것이므로 약혼녀의 미래를 위해서 결혼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이 비극적 영웅보다 더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예언은 그 신랑과 (아폴론) 신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신랑이 신탁을 말하면, 그는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만일 그가 침묵한다면, 그는 단독자(a single individual)로서 보편적인 것(신)과 절대적 관계를 맺기 원하기 때문이다. 예언이 개인사였더라면, 그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기에 말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믿음의 기사는 내적 평강을 발견하지만, 심미적 영웅은 윤리의 요청때문에 지속적으로 번민한다.



아그네스와 인어남자 이야기


다섯번째 이야기는 덴마크의 동화와 아그네스와 인어남자 이야기이다. 인어남자가 아그네스('순수한'이란 뜻)를 유혹하고 그녀를 바다세계로 데려가려 하고 있지만, 아그네스의 눈에서 겸손과 믿음을 보게 되었다. 아그네스의 순수함을 망칠 수가 없어서, 인어남자는 아그네스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다른 예들에서 보면, 인어남자는 숨김과 밝힘 사이에 선택권을 가졌다. 만일 숨긴다면 회개를 해야하고, 이런 후회와 회개는 인어남자에게나 아그네스 둘 다 불행할 뿐이다. 아그네스는 진정으로 인어남자를 사랑해서, 인어남자가 떠나가면 불행하게 되리라. 인어남자는 아그네스를 사랑함으로 불행하고, 아그네스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새로운 죄책감에 짐을 지게 될 것이다.


인어남자는 회개 속에 악마적 요소에 굴복할 것이고 아그네스를 속여서 그 남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만듦으로써 아그네스를 구해주려고 한다. 인어남자는 악마적인 것에 굴복하여 단독자가 된다. 단독자는 보편적인 것보다 더 높이 있다.


인어남자가 회개함으로 악마적인 것으로부터 구출됨에 따라서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 인어남자가 비밀인 채로 남을 수 있고 신이 아그네스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어남자는 아그네스에게 구원되도록 자신을 허용하고 아그네스와 결혼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아브라함의 시험과 비슷한 역설을 가진다. 인어남자는 죄책감으로 인해서 회개의 운동을 하게 되고, 이 회개의 운동은 그를 보편적인 것보다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보편적인 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는 불합리에 의한 운동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힘으로 보편적인 곳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와 결혼하는 토비아 이야기


여섯번째 이야기로 요하네스는 <외경> 토비트 7장에 나오는 사라와 결혼하는 토비아 이야기를 다룬다. 사라는 7번 남자와 결혼했지만, 모두 결혼 첫날밤에 그녀를 사랑하는 귀신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었다. 요하네스는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토비아(Tobias)가 아니라고 본다. 토비아는 비록 그런 과거가 있는 여자와 결혼하는 용기를 가졌지만 주인공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요하네스는 사라(Sarah)를 주인공이라고 본다. 사라는 자신의 과거가 치유되도록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라는 토비아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만일 토비아가 살아남는다면, 그에게 빚을 진 것에 대하여 그에게 미워하거나 화를 낼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입장에 처한 여자라면, 상당한 동정을 견뎌내야만 하고, 그 동정은 굴욕humiliation과 같은 것이다.


사라는 독특한 상황에 처함으로써 보편적인 것 바깥에 자연히 있게 되고, 그래서 자연스레 역설 가운데 있게 된다. 그녀는 악마적이거나 신적인 것을 택일해야만 한다. 악마적인 것은 타인에 대한 경멸과 동정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는 것이다(셰익스피어의리차드 3세(Richard III)처럼). 신적인 것은 사라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파우스트의 이야기


마지막 일곱번째로 요하네스는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요하네스의 설명에 따르면, 파우스트는 의심하는 사람이지만, 또한 동정적이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의심이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갈 것을 알고 있지만, 침묵한 채로 있는다. 윤리학은 이런 침묵을 비판하면서, 파우스트는 자신의 의심이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것을 말했어야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단독자가 절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관계속에 서 있으려면, 이 침묵을 승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의심은 죄책감이 되고, 파우스트는 자신이 역설 가운데 있음을 발견한다.


때로는 침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심의는 경우에, 요하네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을 언급한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이 금식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서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명하신다. 때로는, 개인의 사적인 생활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 때(incommensurable)가 있고, 그러한 경우에 속일 필요가 있다. 


요하네스가 위의 일곱 가지 이야기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단독자는 때때로 보편적인 것과 고립될 수 있으며 보편적 원리에 반대되게 행동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키에르케고어《공포와 전율》단독자가 보편보다 더 높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