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Ohr Dec 08. 2021

최정성의 《믿음, 그 전율에 관하여》를 읽으며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11

최정성의믿음, 그 전율에 대하여를 통하여 믿음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정열과 야성을 상실한 한국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된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합리주의 때문이다. 신앙은 이성적이며 상식적인 동시에 계시적이며 신비적이다. 합리주의의 폐단은 신앙을 이성의 영역에만 머물게 한다면, 믿음은 사라지고 지식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의 역동성과 정열은 사라지고 지식만 남거나, 맹목과 광신적인 요소만 있고 지식이 없는 것이 문제다.   


키르케고르 사상의 가장 큰 공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며 영의 양식으로 먹게 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사상이 도래하여, 성경을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현대인에게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성경이 여전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며, 구원의 도구임을 확신하게 해 준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 중요한 용어는 '전유(appropriation)'이라는 말이다. 수박 겉핥기가 아니라 충분히 내 것으로 씹어서 소화한다는 뜻이다. 최정성의 믿음, 그 전율에 대하여는 키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을 완전히 소화해서 쉽게 독자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다루면서,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에서 발생하는 불안이 왜 유익한지, 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그리고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을 도로 받는다'는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게 되는지(expecting the impossible)를 중학교 2학년 학생에게 말하듯이 이야기해주고 있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소화해서 자기 말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는 저자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지성적이며, 독자에게 친절한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회의가 들고 심지어 조롱당하는 현실에서, 최정성의 믿음, 그 전율에 대하여는 믿음이 하나님의 값진 선물인 것과, 믿음이 이성보다 더 탁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해 준다. 


1848년은 사상사적으로 혁명적인 해이다.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쓰는 때에,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출판했다. 키르케고르는 소외된 인간을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복음으로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마르크스는 유물론적인 사관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소외된 노동자(프로레타리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차별을 철폐함으로써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집단주의를 꿈꾸었던 반면, 키르케고르는 외적인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영원한 평등성인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기독교적 구원이고, 후자는 사회주의적 구원이다. 전자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이며, 후자는 물질적이고 집단적이다. 개인의 발견과 개인의 주체성과 자유는 마르크스와 구별되는 키르케고르 사상의 특징이다.


최정성의  믿음, 그 전율에 대하여는 믿음을 회복하는 프로젝트를 꿈꾼다. 믿음의 회복은 야수성의 회복이며, 말씀에 대한 신뢰와 기도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며, 복음의 충만한 영광을 삶 속에서 누리며 실천하는 것이다. 믿음에는 역전과 전복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포기한 모든 것을 도로 되찾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묘미이다. 합리주의는 신앙의 딸일 뿐이지, 신앙의 부모가 아니다. 신앙이 합리주의를 이끄는 것이지, 합리주의가 결코 신앙을 이끌 수 없다. 이 책을 집어 읽으라! 이 책을 덮을 즈음에 상실했던 신앙의 정열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우리의 신앙이라는 행위 자체가 신앙이 없는 이들에겐 의문이자 때로는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처럼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전과 시대의 물음에 우리는 응답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위해 신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먼저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에 답을 했던 선구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쇠얀 키르케고르입니다.

합리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믿음이란 무엇일까? 기독교는 지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므로 합리주의를 환영하지만, 이 책은 합리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교정을 시도했다. 저자는 합리주의와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합리주의는 우리의 이성을 충족시키지만, 우리의 믿음을 축소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합리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앎은 있으나 삶이 없다는 것이다. 신앙이 마치 그림의 떡과 같아서, 신앙의 역동성이 없고 신앙의 정열(passion)과 기쁨도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야수성의 상실'이라고 진단한다.

이 책은 믿음의 회복 프로젝트이다. 야수성의 회복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야수성이 없다는 것은 소금이 그 맛을 잃고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목도하고 있는 바이다. 야수성 회복 프로젝트를 위해서 저자는 키르케고르의 실존변증법을 소개한다. 신앙의 출발적은 불안이다. 불안은 신앙의 종착역이 아닌 출발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서 걸려 넘어질 필요는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바치듯이, 믿는 자는 먼저 인간의 이성과 윤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성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신뢰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믿음의 역동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체념과 믿음이라는 이중 운동이다. 이삭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듯이, 내 생각과 내 이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무한한 이중 운동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기하고 바친 결과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잃었는가? 잃지 않았다. 믿는 자가 이성과 윤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바쳤다고 그것을 상실하는가? 아니다. 새로운 이삭을 얻듯이, 새로운 이성과 윤리를 도로 되찾게 된다. 우리가 돌려받는 것은 이전의 것과 같지 않고 전혀 새로운 것을 돌려받게 된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경험한 믿음의 기쁨이며 부활의 체험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되찾는다." 신앙에는 역전 현상, 또는 전복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이 믿음의 묘미이다. 포기한 모든 것을 되찾는다는 믿음이다. "합리주의가 중심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앎과 믿음을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신앙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닌 지식이 됩니다.' 합리주의는 신앙의 신비를 다 포함할 수가 없고 다만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쓰임 받을 뿐이다. 그래서 합리주의는 신앙의 딸이지, 신앙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이 책을 덮을 즈음에는 신앙의 정열이 솟아오르게 되고 신앙의 역동성이 발생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신앙의 정열을 상실하고, 신앙의 선물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우리는 믿음의 운동이 무엇인지 이번 여행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얻는 운동, 이 믿음의 운동은 보편성의 포기를 통해 보편성의 모든 것을 다시 되돌려 줍니다. 그리고 이 되돌려 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진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돌려주는 보편성, 즉 절대성을 얻게 되는 샘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키에르케고어《공포와 전율》단독자는 숨겨져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