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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과 카뮈의 부조리

by 오르 Ohr
부조리란 반복되는 충돌이다

누군가 세상을 향해 말을 건네지만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세상은 단지 패턴으로만 존재한다. 세상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춤추듯 표현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혼란 속에 머문다. 이것은 부조리의 풍경이다. 대립의 대립이라는 논쟁, 둘이 존재하지만 결코 이중성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분(인간 조건과 우주)의 장이다. 부조리란 반복되는 충돌이다. 인간은 목적과 의미, 명확함을 찾고자 하지만, 우주는 그저 꼿꼿이 서서 침묵한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라는 책을 썼다. 이는 인간이 의미를 갈망하지만 끝내 무의미함만이 드러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부조리함을 다룬, 많은 이들이 ‘지극히 우울한’ 작품이라 여기는 저작이다.



자살, 그리고 신앙의 도약


부조주의(Absurdism)는 존재의 특성, 즉 물질적 존재의 세계에 드러나는 실체를 다룬다. 부조주의는 신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카뮈는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부조리의 현실을 보았고, 그렇다면 이런 진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를 고민했다. 그는 인간이 부조리와 마주했을 때 가능한 선택지를 세 가지로 보았다: 자살, 신앙의 도약, 인식. 이 가운데 단 하나만이 정당한 해법이라고 본다.


카뮈에게 자살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고백이다. 삶이 “너무 무겁다”는 선언이며, 가장 단순한 탈출 방법이지만, 존재와 우주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철학적 문제들을 고스란히 외면하는 행위다.


또 하나의 반응은 ‘신앙의 도약’이다. 이 용어는 키르케고르가 『두려움과 떨림』에서 사용한 것이다. 신앙의 도약을 하려면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을 중지시켜야 하며, 반성적인 성찰을 중단하는 순간에 도약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신앙은 어떤 기대나 요구,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 본능과 열정, 욕망의 유연한 힘이며, 그 출발점은 부조리 자체를 인식하는 데 있다.


마지막은 ‘인식’이다. 부조리한 조건을 객관적인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더 깊은 절망이나 고통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이 된다. 다시 말해 “어떠한 호소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며, 보편적인 절대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오직 자신의 자유로 주관적인 목적과 의미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카뮈가 유일하게 옹호할 수 있다고 본 입장이었다.



키르케고르의 부조리는 윤리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이다.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


한편, 키르케고르의 부조리에 대한 설명은 카뮈와 다소 다르다. 키르케고르에게 부조리는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상태 혹은 사건이다. 그에게 있어 부조리는 정당한 이유 없이 벌어지는 모든 행동이다. 즉, 윤리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라는 두 힘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부조리는 발생한다. 이는 결국 윤리에서 종교로 도약하게 만드는 “신앙의 도약”을 유발한다. 두 상반된 영역(이성과 신앙)의 중재가 불가능할 때, 인간은 부조리한 상태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과 떨림』에서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부조리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행동을 신앙으로 감행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살릴 것이라 믿는다. 이는 이성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행동이며, 그 자체로 부조리한 신앙의 전형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이성적인 존재임에도, 나의 이성과 반성이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하거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할 때, 다시 말해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나는 여전히 행동해야만 하는 상태다. … 나는 행동해야만 하며, 부조리의 덕으로 행동한다. 반성이 모든 길을 닫아버렸기에, 나는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를 잡고 ‘이것을 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으며, 나의 반성의 힘은 나를 막다른 길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도약이 어떻게 부조리를 ‘변형’시키는지 설명한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부조리는 더 이상 부조리가 아니다—믿음은 그것을 변형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약한 순간마다 그것은 다시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믿음의 열정만이 부조리를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지식일 뿐이다.”


이처럼,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도약이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신앙의 도약이 과연 부조리한 삶의 실상을 정화해 줄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 단지 부조리를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눈가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불가해한 것 위에 아무것도 세우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


카뮈에게 있어 죄란, 존재의 깊이를 바라보는 눈앞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현실은 인간의 존재만큼이나 무한하며, 무한한 절대자를 향한 항복은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이며, 현실에 대한 배신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세계가 초월적 의미를 가지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 지금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만은 안다. 내 조건을 넘어선 의미가 내게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만지고, 나에게 저항하는 것—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확실성, 즉 절대와 통일에 대한 갈망과 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사이에서, 나는 그 간극을 메울 수 없다. 이 조건 안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 외에, 어떤 진실이 나를 속이지 않고 존재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주관적 진리’의 옹호자였다. 그것은 내면화된 감정과 가치이며, 인생 속에서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도약은 바로 이러한 주관적 진리를 얻는 데 있어 결정적인 행위라 보았다. 이를 통해 인간은 그 진리를 외적 실재 속에서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카뮈는 말한다. 신앙의 도약이 이루어질 때, 부조리는 더 이상 부조리가 아니다. 신앙과 영적인 세계는 그 현실을 감추고, 이성적인 인간의 판단 능력을 흐리게 한다. 신앙에 담긴 열정은 오히려 이성을 흐리게 하고, 그로 인해 인간은 부조리를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세상은 다시 부조리해지고,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것을 철학적 자살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는 부조리한 현실과 자살 양쪽을 모두 거부하면서도, 추상적 신념에 자신을 내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개인의 부정을 뜻하며, 신앙이라는 비합리적 기대를 쫓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신앙의 도약은 부조리 앞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신앙과 희망은 인간이 자신의 주관적 자아를 재확인하고, 존재의 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다. 인간이 주관적 진리를 본질로 구체화하려면, 세계를 바라보는 열정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이는 결국 자신만의 신앙과 희망을 통해 시작되는 것이다. 이 희망과 신앙은 자신만의 의미를 탐색하려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관적인 인생의 깊이를 파헤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이 신앙이 맹목적이고 교조적인 추상으로 흐를 때, 부조리한 현실은 흐려지고 만다. 이 점을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고고학자가 알려지지 않은 보물을 찾기 위해 발굴을 시작할 때, 그는 희망과 신념 없이 발굴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과정과 같다. 이와 같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주관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신앙과 희망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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