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앙을 바라보는 까뮈와 키르케고르의 차이
까뮈의 <시지프 신화>와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에서 돈 후앙(Don Juan, 돈 지오반니)을 심도있게 다룬다. 두 사람의 해석의 차이를 봄으로써, 키르케고르가 돈 후앙을 심미적 인간이라고 비판하는 맥락과, 이에 반하여 돈 후앙을 예찬하는 까뮈의 주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지프 신화> 2장 '부조리한 인간'의 1절에서 돈 후앙을 "부조리한 인간"으로 정확히 묘사한다. 까뮈는 돈 후앙을 초월적 의미나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를 충만히 살아가는 인물로 재해석한다. 그의 연속적인 유혹은 각 순간의 강렬함에 헌신하는 것이며, 이는 까뮈의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더 높은 가치를 호소하지 않는 철학과 일치한다. 돈 후앙이 각 여성을 "순간적으로 영원히" 사랑한다는 점은 존재론적 태도를 강조하며, 영속성보다 현재를 중시한다.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 1부의 미학적 에세이에서 나온다. 키르케고르는 가명 A를 통해 돈 후앙을 모짜르트의 <돈 지오반니(Don Giovanni)>에서 감각적 즉흥성의 구현으로 묘사한다. "절대적으로 음악적"이라는 표현은 돈 후앙을 미학적 존재 단계에 위치시키며, 그의 행동은 본능과 감각에 의해 움직이며 윤리적 성찰과는 무관하다. 돈 후앙이 성찰 없이 유혹하므로 도덕적으로 죄가 없다는 점은 키르케고르가 그를 전형적인 악당이 아닌 원형적 인물로 보는 관점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
돈 후앙은 방탕자가 아니다. 그는 현재 순간의 열정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돈 후앙은 천 개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천 번 사랑한 것이다
까뮈는 돈 후앙을 도덕적 실패자가 아닌 부조리한 영웅으로 재정의한다. 그의 열정은 전통적 도덕 판단을 거부하며 삶의 덧없는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는 의식적 선택이다. 그는 쾌락의 반복이 아닌, 각 순간의 진정성 있는 몰입을 의미한다. 그는 한 여성에게 ‘영원’을 기대하지 않으며, 각 사랑이 하나의 절정임을 인식하는 부조리한 인간이다.
그는 속이지 않고, 약속하지 않으며, 단지 사랑한다
이 말은 돈 후앙이 도덕적 타락자라기보다는 절대적 사랑의 환상에서 벗어난 인간임을 강조한다. 자기기만이 없는 삶, 즉 ‘명료함의 윤리’를 실천하는 인물로 그린다.
돈 후앙은 질보다 양을 선택하지만, 매번 처음인 것처럼 자신을 바친다.
까뮈는 이를 존재론적 용기로 정확히 본다. 돈 후앙의 다중성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각 만남을 완전한 헌신으로 살아내는 능력이며, 이는 부조리한 영웅의 무의미에 대한 저항을 구현한다.
까뮈에게 있어 돈 후앙은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는 여성을 단지 유혹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매 순간 진심으로 사랑하되, 그 사랑이 영원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의 사랑은 온전하고 진실하다. 돈 후앙은 삶에 궁극적인 의미나 절대적 사랑이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며, 그러한 부조리한 조건 속에서도 순간순간을 정직하게 살아간다. 그는 구원이나 영원의 환상을 좇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그것을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반복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여성과의 사랑은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그 반복은 무의식적인 중독이 아니라 시지프가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리는 것처럼 자각 속의 행위이다. 돈 후앙은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고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서 예술가처럼, 배우처럼, 삶 자체를 표현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도덕적 규범이나 종교적 구원보다는, 부조리한 조건을 직면하고도 진실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인간의 한 전형으로 까뮈에게 제시된다.
돈 후앙은 절대적으로 음악적이다. 돈 조반니는 음악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악마적 인물이다
키르케고르의 실존 삼단계에 따르면, 돈 후앙은 첫번째 단계인 심미적인 실존에 속한다. 돈 후앙의 유혹은 즉흥적이고 선율적이며, 윤리적 틀 밖에 존재한다. 돈 후앙은 윤리적이지 않아며 자아가 정립되지 않았다. 그런 삶의 결과 권태가 찾아오고 나비가 이 꽃 저 꽃을 쫓아가듯이 방황하는 것이 특징이다. 키르케고르는 돈 후앙을 유혹자의 화신, 절대 미학의 구현으로 보면서도, 그의 삶이 결국에는 절망과 파멸로 이끈다고 본다. 그는 윤리적 삶과 종교적 삶으로의 이행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인물을 해부한다.
유혹자는 대상이 아니라 순간에 사로잡힌다
이는 돈 후앙이 한 인간을 깊이 사랑하기보다, 순간의 감정과 쾌락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비판이다. 그는 대상의 인격이 아니라, 사랑의 ‘경험’ 자체에 몰두한다.
까뮈와 키르케고르는 모두 돈 후앙을 단순한 유혹자 이상으로 격상시키지만, 그들의 틀은 다르다. 까뮈는 돈 후앙을 통해 초월에 대한 희망 없이 현재의 강렬함에서 의미를 찾는 부조리 철학을 보여준다. 까뮈는 돈 후앙을 부조리의 원형으로 본다. 반면 키르케고르는 돈 후앙을 미학적 실존 단계에 위치시키며, 감각적 즉흥성에 의해 움직이는 윤리 이전의 존재로 본다. 이는 그의 후기 윤리적, 종교적 단계와 대조된다. 까뮈는 돈 후앙을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응답으로 보지만, 키르키고르는 그를 음악을 통해 표현되는 미학적 이상, 거의 자연의 힘으로 간주한다.
까뮈: “삶은 그 자체로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
키르케고르: “미적 삶은 결국 죽음의 침묵으로 끝난다.”
까뮈는 부조리한 인간 돈 후앙을 현재를 충실히 사는 존재로 보면서 순간의 '반복'을 긍정한다. 까뮈가 주장하는 인간상은 신 없이도 충만하게 사는 실존을 내세운다. 반면, 키르케고르는 돈 후항을 심미적 실존에 속한 전형적인 인물로 보면서 그를 유혹자, 절망자라고 말한다. 심미적 삶은 허무하고 권태로우며, 참다운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절망을 자각할 때, 새로운 실존으로 나갈 수있다고 보았다.
반복은 까뮈와 키르케고르 사상에서 중요하다. 까뮈가 시지프를 통하여 말하는 반복은 수평적 반복이고, 현재에 충만할 것을 말한다. '부조리한 반복'을 받아들이고 반항적으로 긍정할 때 삶은 아름답다고 까뮈는 주장한다. 돈 후앙 역시 사랑을 반복하지만 각 사랑을 진지하게 시도한다. 무의미를 인식하되, 간 반복 속에서 의식적으로 충만하게 존재하는 것이 까뮈가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인간의 반항, 용기, 열정이다.
반면 키르케고르의 반복은 수직적 반복을 의미한다. 이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신을 향한 실존적 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기 회복이다. 예컨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다시 신을 신뢰하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반복이다. 존재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깊은 차원의 변화를 수용하는 내면의 운동이다. 키르케고르의 반복은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이중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