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는 까뮈가 제시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의 모습은 허망하고 쓸데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자신이 배당받은 삶을 퍼 올리는 인간 운명의 상징이자 늘 깨어 있는 의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비벼대는 뺨, 진흙으로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드는 어깨, 그 돌덩어리를 멈추려고 버티는 다리, 그 돌을 꽉 쥐고 있는 팔 끝, 흙투성이가 된 인간의 믿음직한 두 손이 보인다. 하늘이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이 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며, 다시 돌을 산꼭대기로 끌어 올려야만 한다. 그는 다시 들로 내려간다. 이때 까뮈는 시지프의 되돌아옴, 그 짧은 정지의 순간에 주목한다. 그의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시간, 그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시지프 신화>-부조리에 관한 시론, 이가림(옮긴이) 문예출판사 해설 가운데 인용.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삶의 무의미함 사이의 충돌을 다룬 철학적 에세이다. 까뮈는 이 책에서 "삶은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에 두며, 부조리(absurde)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과 세계 사이의 불일치를 조명한다. 인간은 세계의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침묵으로 응답한다. 이 간극에서 생겨나는 감정이 바로 부조리이다.
까뮈는 키르케고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종교적 초월을 통해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사상가들을 철학적 자살을 택한 이들로 비판한다. 그들은 인간 이성이 감당할 수 없는 모순을 신앙이라는 비이성적 수단으로 회피한다고 본다. 까뮈는 오히려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옹호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의 형벌을 삶의 은유로 제시하며,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시지프의 무의미한 행위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까뮈는 시지프가 반항하는 인간의 상징이며, 그가 바위를 굴리는 그 행위 자체가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시지프는 행복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문장이 이 철학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이에 반해, 키르케고르는 인간 존재를 신 앞에서의 절망과 불안의 존재로 규정한다. 그는 인간이 참된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절망을 경험한다고 말하며, 이 절망은 인간이 자기를 상실하거나 자기를 회피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러한 절망의 극복은 인간의 결단, 곧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을 통해 이루어진다. 키르케고르는 이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모순(paradox)을 신앙으로 수용하고 넘어서야 한다고 보며, 인간 존재는 오직 신 앞에서만 그 진실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후설은 철저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모든 전제와 판단을 괄호 치고, 순수 의식의 구조로 철학의 출발점을 삼는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나타나는 방식에 달려 있다고 본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을 통해 구성된다. 후설은 의미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활동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재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조리 역시 세계의 본질적 조건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지향이 왜곡되거나 단절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까뮈는 이러한 키르케고르와 후설의 접근을 각각 비이성적 도피와 의미의 과도한 내면화로 간주하며,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도약을 이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외면하고 초월로 도피하는 철학적 자살로 간주한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이 인간의 고통과 무의미함이라는 실존적 조건을 외면하는 추상적 사유라고 본다. 까뮈는 이러한 철학이 부조리를 해소하기보다 은폐한다고 비판한다. 대신 그는 초월을 거부하고, 현실 속에서 그 부조리를 끌어안으며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희망이 없는 조건 속에서의 반항, 그 수용이 곧 진정한 자유라고 주장한다.
만약 키르케고르가 이에 대해 반론한다면, 그는 까뮈가 부조리라는 한계에 직면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교만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진실은 오직 신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될 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는 신 앞에서의 복종 속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신앙의 도약은 도피가 아니라, 존재의 모순을 가장 깊이 껴안는 결단이라고 역설할 것이다.
후설은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가 일종의 객관적 현실처럼 기술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의식의 지향이 구성한 결과라고 반론할 수 있다. 그는 까뮈가 인간의 의식 구조와 지향성을 분석하지 않고 세계의 무의미함을 절대화한다고 비판할 것이다. 후설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세계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활동 속에서 형성되므로, 부조리도 의식의 전회와 성찰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까뮈, 키르케고르, 후설은 인간의 존재와 의미, 부조리와 자유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까뮈는 초월을 부정하고 현실을 긍정하며, 키르케고르는 현실을 초월으로 통과시키고, 후설은 의식을 통해 의미를 회복한다. 세 사상가는 인간 조건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공유하지만, 각각 다른 해답을 제시한다. 이들 간의 철학적 대화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오늘의 독자에게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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