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위기에서 새로운 신앙으로: 흑사병에서 COVID-19까지"
중세 유럽은 흑사병(The Black Death, 1347~1351)과 교황권의 쇠퇴로 인해 교회의 신앙과 권위가 근본적으로 흔들린 시기를 겪었다. 이 두 사건은 신학적, 사회적 변화를 촉발하며 종교개혁의 토대를 마련했고, 오캄의 유명론은 개인의 신앙과 경험주의를 강조하며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했다. 오늘날의 COVID-19 위기는 중세의 흑사병과 유사한 도전을 교회에 제시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 흑사병, 교황 분열, 오캄의 유명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이를 현대의 상황과 비교하며 교회의 위기와 변화를 조명하려 한다.
1347년 후반 이탈리아의 시칠리 섬에서 시작된 4년간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약 30~50%를 몰살시키며 중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전염병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성직자, 귀족, 평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교회의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당시 교회는 흑사병을 신의 징벌로 해석하며 회개와 기도를 촉구했지만, 성직자들 역시 대규모로 사망하거나 병자를 피해 도망치며 신뢰를 잃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는 성직자들이 병자들을 외면하며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흑사병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며 사람들이 교회의 중재 없이 직접 하나님과 소통하려는 경향을 강화했다. 이는 종교개혁의 씨앗이 되었으며, 개인의 신앙과 성경 묵상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교황권의 쇠퇴는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까지 약 100년간 이어진 서방교회의 대분열(1378-1417)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로마를 떠나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며 시작된 아비뇽 유수(1309-1377)는 교황권의 정치적 종속과 부패를 드러냈다. 아비뇽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고, 이는 교회의 보편적 권위를 약화시켰다. 1378년, 그레고리 11세의 사망 이후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선출되며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로마에는 우르바노 6세, 아비뇽에는 클레멘스 7세가 교황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피사 공의회(1409)에서 제3의 교황이 선출되며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 시기 유럽은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각 교황은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파문했고, 이는 신자들 사이에서 교회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마침내 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며 분열을 종결했지만, 교회의 권위는 이미 심각히 손상된 후였다. 대분열은 교황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켰고, 개인의 신앙과 성경 중심의 신학에 대한 갈망을 키웠다.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5~1347)은 중세 신학의 전통적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며 유명론(Nominalism)을 주창했다. 유명론은 보편(universals)이 실재하지 않고, 오직 개별자(individuals)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나 “선” 같은 보편적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개별적 실체를 묶어 부르는 이름(name)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과 토미즘(Thomas Aquinas의 신학)에 기반한 스콜라주의와 대립했다.
오캄의 유명론은 이성주의보다 경험주의를, 교권의 권위보다 개인의 신앙을 중시하는 신학적 변화를 촉진했다. 그는 신의 존재나 속성을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보며, 신앙은 이성적 논증이 아니라 성경과 개인의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교회의 중재 없이 성경을 묵상하고 성령에 의지하는 개인 신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오캄의 사상은 후에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개혁의 핵심 원칙을 예비했다.
흑사병과 교황 분열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고, 오캄의 유명론은 개인의 신앙과 경험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16세기에 이르러 마르틴 루터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와 부패를 비판하며 95개조 논제를 발표(1517)했고, 이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루터는 오캄의 유명론에서 영향을 받아 이성보다 성경과 개인의 신앙을 중시했으며, 교회의 중재 없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흑사병이 보여준 교회의 무력함과 대분열로 인한 회의적 분위기는 이러한 개혁 사상을 수용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중세의 흑사병과 유사하게, 2020년 발발한 COVID-19 팬데믹은 현대 교회에 심각한 도전을 제시했다. 교회는 예배 중단, 신자들의 신앙적 갈등, 그리고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며 위기를 겪었다. 흑사병 당시처럼, 많은 신자들이 교회의 권위나 전통적 예배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개인적 신앙과 온라인 예배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신앙 표현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위기는 동시에 교회의 변화를 촉진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예배, 소규모 가정교회,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은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는 중세의 흑사병이 종교개혁이라는 변화를 예비했던 것과 유사하게, COVID-19가 현대 교회의 혁신과 재편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흑사병과 교황 분열은 중세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개인의 신앙과 성경 중심의 신학을 촉진했고, 오캄의 유명론은 경험주의와 개인 신앙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교회의 위기가 새로운 신앙의 가능성을 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COVID-19는 현대 교회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디지털 예배와 지역사회 중심의 신앙 공동체와 같은 새로운 변화를 촉발했다. 중세의 위기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듯, 현대의 위기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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