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를 읽다가 발견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키르케고르의 『철학의 부스러기 』 5장 부록: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by 오르 Ohr

의심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 존재가 말을 시작한다


데카르트의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명제는 철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다. 그는 감각과 전통, 심지어 수학적 확실성까지 의심의 도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출발점을 찾고자 했다. 그 여정의 끝에서 그가 붙잡은 것은 잘 알려진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의심은 도구였고, 목적은 확실성이었다. 의심은 충분히 사용되었고, 그 다음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쇠렌 키르케고르는 『철학의 부스러기』 5장 부록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에서 이 멈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반복하지 않고, 그 명제가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집요하게 되묻는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간단하지만, 실존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요구가 아닌가. 키르케고르에게서 의심은 더 이상 인식론적 실험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삶 전체를 걸고 감당해야 하는 사건으로 변한다.


이 부록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키르케고르의 이 지점에서 연원한 저술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인식의 주체인 코기토(Cogito)가 아닌 시간 안에 유한한 존재인 현존재(Da-Sein)을 말했다. 의심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순간에 끝나지 않고, 반복되고, 지연되며, 삶의 리듬과 충돌한다. 의심하는 사람은 책상 위에서 중립적으로 사고하는 주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고 언어를 사용하며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때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생각은 계속되지만, 그 생각을 수행하는 ‘나’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오히려 질문 그 자체가 되어 간다.



"False doubt doubts everything except itself, While saving doubt doubts itself, with the help of faith." 가짜 의심은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구원하는 의심은 신앙의 도움을 얻어서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Soren Kierkegaard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인용.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비판과 대안



코기토가 무너질 때 드러나는 것


키르케고르는 데카르트를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데카르트보다 더 철저하게 데카르트를 읽는다. 의심을 정말로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그 결과는 단단한 주체의 확보가 아니라, 주체의 해체가 아닐까. 의심은 나를 투명한 사고의 점으로 정제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불안, 결단, 책임,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과제로 밀어 넣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마르틴 하이데거를 떠올리게 된다. 『시간과 존재』에서 하이데거가 문제 삼는 것은 근대 철학이 당연하게 여겨 온 주체의 지위다. 그는 “생각하는 주체”를 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을 비켜서, 인간을 다자인, 곧 이미 세계 안에 던져져 살아가며 존재를 물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다시 그린다. 키르케고르가 의심을 실존의 사건으로 바꾸는 순간, 코기토의 자리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이미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자기 자신이 되는 문제를 짊어진 인간이다.



시간은 배경이 아니라 조건이다

『철학의 부스러기』의 부록이 하이데거를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간이다. 데카르트의 회의는 논리적 현재 안에서 작동한다. 반면 키르케고르의 의심은 삶의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의심은 나의 과거 습관을 흔들고, 현재의 안정을 무너뜨리며, 미래의 결단을 요구한다. 의심을 계속한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일이며, 때로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시간은 단순한 연속적 흐름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지평이다. 인간은 시간을 ‘갖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다. 키르케고르의 텍스트를 읽으며 느끼는 압박감, 곧 의심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나를 앞으로 끌고 가는 경험은, 『시간과 존재』에서 말하는 시간성의 직관적 예고처럼 다가온다. 사유는 시간 위에 놓인 장식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만 가능한 운동임이 분명해진다.



현재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를 인식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은 붙잡는 즉시 이미 지나가 버리며, 인식은 항상 경험보다 늦게 도착한다. 경험은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사유는 그 흐름을 멈추어 대상으로 만들려 하기 때문에, 현재를 생각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된다. 이로써 현재는 살아지는 시간이지만 인식되기 어려운 시간이 된다.


또한 현재를 하나의 순간으로 고정하려는 시도는 시간의 본성을 왜곡한다. 시간은 점의 집합이 아니라 연속적인 흐름이며, 현재를 점처럼 규정하는 순간 살아 있는 시간은 추상으로 바뀐다. 이때 인식된 현재는 실제의 현재가 아니라 이미 정리된 과거에 불과하다.


자기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의 나’를 의식하는 순간, 나는 이미 나 자신을 뒤돌아보는 위치에 서 있다. 현재를 의식하려는 의식은 필연적으로 반성을 동반하며, 이 반성의 거리 때문에 현재는 완전히 현재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는 우리가 살고 있으되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며, 인식은 언제나 그 뒤를 따라갈 뿐이다.



체계가 아니라 실존이 사유한다

키르케고르의 글은 독자를 설명의 안전지대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는 체계를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 속에 남겨 둔다. “당신은 정말로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식을 늘리기보다 삶의 태도를 흔든다. 이 흔들림 속에서 독자는 관찰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된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하이데거와 깊이 공명한다.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열리는 사건이다. 진리는 정답이 아니라 드러남이다. 키르케고르에게서도 진리는 객관적 명제가 아니라, 내가 그것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내는가에 달려 있다. 앎은 충분조건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존하는 것이다.



의심의 끝에서 남는 질문

그래서 『철학의 부스러기』 5장 부록을 읽는 경험은, 단순히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텍스트는 독자를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사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동시에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이 왜 필요했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한다. 의심을 정말로 끝까지 밀어붙일 때, 우리는 더 단단한 주체가 아니라, 더 깊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 질문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코기토에서 다자인으로의 이동은 이 질문이 만들어 낸 필연적인 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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