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평화기념관을 방문하다
2026년 1월 말, 한국키르케고르연구소(소장: 오석환, 대표: 이창우)가 주관하는 키르케고르 인문학 캠프가 제주도에서 열렸다. 제주 애월에 4박 5일 머물면서, 틈틈이 숙소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를 읽었다. 이 책은 강연을 묶은 얇은 책이지만, 그 사유의 밀도는 결코 얇지 않다. 문장은 쉽지 않고 전개는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끝까지 읽게 된다. 이해보다 먼저 방향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왜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현대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불리는지 알게 된다.
근대철학은 주체성의 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철학은 ‘생각하는 나’를 중심에 두고 세계를 구성해 왔다.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 되었고, 타자는 이해의 범주 안에 놓였다. 실존주의는 이 주체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은 더 이상 안정된 이성의 주체가 아니라, 불안과 결단 속에 던져진 존재가 된다. 이 점에서 실존주의를 주체성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보다 정확히는 주체가 여전히 중심에 있으되 그 중심이 고독과 불안으로 바뀐 것이라 보아야 한다. 주체는 무너졌기보다 홀로 남는다.
레비나스는 이 지점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주체가 중심에 서기 이전의 사건을 묻는다. 시간은 내가 계획하고 설계하는 연속이 아니라, 타자가 나를 부르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말한다. 미래는 나의 의지와 프로젝트의 결과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열리는 영역이라 주장한다. 존재는 홀로 성립할 수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 진술은 단순한 관계론이 아니다. 타자는 결코 ‘또 다른 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타자는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절대적 외부이며,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사유에는 쇠렌 키르케고르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키르케고르는 체계에 저항하며 단독자의 실존을 강조했다. 보편적 이성이나 제도적 윤리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대신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레비나스는 이 비체계적 긴장을 계승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키르케고르의 단독자는 하나님 앞에 선 개인이며, 윤리의 긴장은 수직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반면 레비나스의 윤리는 수평적이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는 이미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이 책임은 선택 이전에 주어진다. 신앙의 도약이 아니라, 윤리의 선행성이 강조된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모독이다. 타자는 신비일 뿐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만이 남는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두 스승을 통과하며 형성된다. 후설에게서 그는 현상학의 엄밀한 방법을 배운다. 사태 자체로 돌아가려는 태도, 경험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을 분석하는 노력은 레비나스 철학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 중심적이다. 타자는 나의 의식에 의미로 주어지는 대상이 된다. 레비나스는 이 점을 비판한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순간, 타자는 이미 타자가 아니게 된다고 본다. 그는 현상학을 거부하지 않되, 그 방향을 전환한다. 타자는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나를 중단시키고 흔드는 사건이 된다.
하이데거와의 차이는 더욱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존재 물음을 새롭게 열었고, 인간을 세계-내-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타자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며, 타인은 나의 실존 구조 안에 포함된다. 레비나스는 이 존재론적 우선성을 전복한다. 그는 윤리가 존재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존재를 이해하기 이전에, 나는 이미 타자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방향에 선다.
이 철학적 대립은 역사적 맥락과 깊이 연결된다. 레비나스는 유대인이었고, 전쟁과 수용소의 경험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타자를 말살하는지를 보았다. 존재, 민족, 국가,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타자가 제거되는 현실을 목격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하거나 묵인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 중심 사유가 지닐 수 있는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얼굴은 언제나 “죽이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을 발한다. 이 명령은 침묵 속에서 오며, 어떤 철학적 체계보다 앞선다.
후설의 현상학이 “나는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를 묻는다면, 레비나스는 “나는 왜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가”를 묻는다. 그는 인식보다 응답을, 이해보다 책임을 앞세운다. 이로써 철학의 중심축은 주체에서 타자로 이동한다. 이는 단순한 이론의 변화가 아니라, 사유의 윤리적 전환이다.
레비나스가 현대인에게 기여한 바는 분명하다. 그는 윤리를 철학의 출발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나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가 어떻게 폭력으로 전이되는지를 드러냈다. 그는 미래를 소유와 계획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를 맞이하는 개방성으로 다시 정의했다. 이러한 사유는 오늘의 삶과 신앙을 깊이 흔든다.
미래는 내가 계획하는 것이 아니고, 타자에 내 안에 들어올 때 열리는 세계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며, 자신이 중심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의 얼굴 앞에 서 있는가. 시간은 그 얼굴 앞에서 시작된다. 미래는 그 얼굴을 외면하지 않을 때 열린다. 존재는 혼자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형성된다. 이 전환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니라, 불안과 결단 속에 던져진 존재가 된다. 이 점에서 실존주의를 주체성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보다 정확히는 주체가 여전히 중심에 있으되 그 중심이 고독과 불안으로 바뀐 것이라 보아야 한다. 주체는 무너졌기보다 홀로 남는다.
동일성의 철학이란, 다른 것을 결국 같은 것으로 환원하려는 사유를 말한다. 세계는 이해 가능한 질서로 통합되어야 하고, 낯선 것은 개념 속으로 포섭되어야 하며, 타자는 결국 ‘내가 이해한 범위 안의 타자’로 정리된다. 이 철학에서 차이와 타자성은 잠정적인 장애물일 뿐, 궁극적으로는 동일성 속에서 해소된다. 이때 철학의 임무는 다름을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동일성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근대철학에 이르러 동일성의 철학은 더욱 강력해진다.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에서 ‘생각하는 나’는 확실성의 중심이 된다. 세계는 주체 앞에 놓인 대상으로 구성되며, 타자는 나의 인식 구조 안에서 파악된다. 칸트에게서조차 타자는 선험적 범주를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타자는 나에게 도전하는 절대적 외부가 아니라, 내 인식의 조건 안에서 정리되는 대상이다. 이 점에서 근대철학은 주체와 세계의 동일성을 구축하는 거대한 체계라 할 수 있다.
실존주의 역시 완전히 이 동일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불안과 결단 속에 던져진 존재가 되지만, 여전히 중심에는 ‘나의 실존’이 있다. 세계는 나의 선택과 결단의 장으로 이해되며, 타자는 내 실존을 비추는 거울 혹은 경쟁자로 등장한다. 주체는 흔들리지만, 중심에서 밀려나지는 않는다.
이 흐름 속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론을 통해 동일성의 철학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로 규정하며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해체했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존재의 이해’가 있다. 타인은 나의 존재론적 구조 안에서 이해되는 존재이며, 타자의 고통과 얼굴은 존재 물음에 종속된다. 이때 철학은 여전히 존재의 동일성을 향해 움직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서구 철학 전체를 ‘동일성의 철학’이라 명명하며 비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서구 철학은 타자를 끝내 타자로 남겨 두지 못했다. 이해하려 했고, 개념화하려 했고, 체계 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 결과 타자는 사라지고, 나의 세계만 남는다. 레비나스는 이를 철학적 폭력이라 부른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결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타자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향해 “너는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는 얼굴이다. 이 얼굴은 개념이 아니며, 설명될 수 없고, 소유될 수 없다. 동일성의 철학이 묻는 질문이 “이것은 무엇인가”라면, 레비나스의 질문은 “나는 이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그래서 그는 동일성의 철학을 넘어 타자성의 철학, 더 정확히 말하면 윤리의 철학을 제시한다. 존재보다 윤리가 앞서고, 인식보다 책임이 먼저이며, 자유보다 응답이 선행한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전환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다.
역사 속의 전쟁과 학살, 일상의 다툼과 배제는 대부분 동일성의 논리에서 발생한다.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하고,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제거해도 된다고 여긴다. 레비나스는 이 철학적 뿌리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동일성의 철학이 끝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타자가 살아남고, 그 타자의 얼굴 앞에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목요일(29일) 오후에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제주도 출신 친구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7년 7개월 간의 참상을 그대로 목격하였다.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60세를 바라보는 동안에 이 사건이 나에게 은폐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몸이 찢기는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갈갈이 찢어져서 진실을 직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기념관 안에 있는 서점에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구입했다. 절반가까이 읽는데도 아직 4.3 사건에 대한 내용은 없이 지루하제주에 머무는 동안 낮에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제주도 출신 친구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7년 7개월 간의 참상을 그대로 목격하였다.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60세를 바라보는 동안에 이 사건이 나에게 은폐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몸이 찢기는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갈갈이 찢어져서 진실을 직시하기가 힘들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절반가까이 읽었는데도 아직 4.3 사건에 대한 내용은 없다. 눈내리는 겨울, 제주도 출신의 인선과 서울에 사는 소설가 경하의 만남을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어서 도무지 소설의 줄거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처럼 제주 4.3 사건는 나에게 도무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을 읽으며, 타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내 사상과 내 문제에 함몰되어 살아온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오늘을 타자 중심의 삶의 첫 날로 삼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