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일인가, 아름다운 거리인가?

엠마누엘 레비나스 알아가기

by 오르 Ohr

키르케고르 사상에 심취해 있을 고려대 홍경실 박사로부터 레비나스의 사상을 엿들은 적이 있다. 레비나스를 진지하게 보게 된 것은 강영한 교수님이 번역한 <시간과 타자>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레비나스와의 만남은 나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도 같았다. 신앙적인 회심이 내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닌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수직적인 변화였다면, 레비나스를 통한 나의 변화는 수평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레비나스를 공부하기 위해서 경기대 윤대선 교수의 <레비나스의 타자물음과 현대철학>을 읽기 시작했다. 메를로퐁티, 라캉, 베르그송, 들뢰즈 등의 현대철학자를 다루는데 어설프게 알고 있는 내용을 천천히 소화해 볼까 생각한다.


레비나스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며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로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을 극복하였다. 레비나스는 그들의 동일성의 철학을 극복하고 타자를 철학의 중심으로 두었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을 비윤리적으로 본다. 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와 동일한 부분을 파악하는 것인데 타인을 이해하는 순간, 타인의 신비와 거리감은 사라진다. 마치 연인이 연애할 때는 설렘과 신비가 있지만, 결혼해서는 이미 상대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여 무례하고 긴장감도 설렘도 없어지는 것과 같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처럼 무례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레비나스는 이해나 합일이 아닌 '사이'를 강조한다. 아름다운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 이전에 플로티노스의 에로스의 정신은 형이상학적 상승 운동이었다. 영혼이 일자(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레비나스의 에로스는 타자를 향하며, 합일이 아닌 '사이'를 강조하면서 타인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윤리는 합일이 아니라 책임의 거리이다. 타자를 내 방식대로 이해하는 동일성의 철학에 반대하여, 타자의 신비를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아름다운 거리'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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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거리(사이)는 타자를 바꾸려는 시도를 버리고 타자 앞에서 내가 변화하는 것이다. 결혼해서 부부싸움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변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바꾸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기중심적인 것이 현대의 병, 관계의 병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아름다운 거리는 가까워지되 흡수하지 않으며, 친밀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가 고초를 겪은 것은 물론이고 가족과 지인이 나치에게 희생되었다. 이런 현대의 폭력적인 문화와 지성에 대한 해답을 몸소 제시한다. 오늘날 '공공선'을 주장하는 것은 이런 레비나스의 사상과 일치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대인관계의 중심은 이해가 아니라 응답이다. 우리는 흔히 상대를 이해하려 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이해는 종종 상대를 나의 범주 안에 가두는 방식이 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나와 동일하게 만들려 하지 말고, 타자의 낯섦과 차이를 존중하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사이’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관계가 생성되는 장이다. 그곳은 윤리의 시작점이며, 책임이 흐르는 통로이다. 진정한 가까움은 흡수가 아니라 긴장이다. 친밀하지만 소유하지 않고, 가까우나 동일하지 않은 관계가 바로 윤리적 관계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된다.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타자 앞에서 내가 변화되는 길을 배우게 된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교육의 목적과 방법에도 깊은 변화를 요구한다. 기존 교육이 지식 전달과 경쟁, 개인의 성공과 성취를 중심에 둔다면, ‘사이’의 교육은 관계 형성과 상생, 공동선을 중심에 둔다. 교육은 단순히 정보를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타자에게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을 형성하는 과정이 된다. 이러한 교육은 학생을 경쟁의 주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한다. 교실은 성취를 평가하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책임을 배우는 공간이 된다. 지식은 타자를 지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타자와 더 깊이 관계 맺기 위한 수단이 된다. 결국 레비나스가 제안하는 교육은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이다. 인간은 성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응답하는 존재이다. 존재의 통합이 아니라 책임의 지속이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이라는 그의 통찰은, 오늘 우리의 관계와 교육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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