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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위대한 약속과 환상의 종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by 오르 Ohr

위대한 약속과 환상의 종말


근대 문명은 인류에게 찬란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것은 기술의 진보와 경제 성장, 정치적 자유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약속”이었다.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행복과 자유를 보장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이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약속”, 즉 “환상”에 불과했음을 통찰한다.

“인간은 더 많이 가지게 되었지만, 그만큼 더 비어 있다.”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프롬이 말하는 환상은 단순한 경제적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양식 자체가 ‘소유’로 전락한 근본적 전도(顚倒)이다. 물질적 풍요가 증가했지만, 인간은 내면의 공허, 사회적 고립, 영혼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환상의 종말(The End of an Illusion)”이다. 약속된 자유는 자기 소외로, 약속된 만족은 끊임없는 결핍으로 돌아왔다.



경제적 필요와 인간의 행복: 소외된 번영


프롬은 인간의 경제적 필요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필요가 끝없이 팽창하는 욕망의 기제로 탈바꿈되었을 때 발생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더 많이 가지는 것”을 존재의 기준으로 삼는다.

“현대인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서도, 더 적게 존재한다.” – 에리히 프롬


소유의 확장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는 무한한 성장과 소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한 불만족의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환경은 파괴되고, 인간관계는 거래화되며, 자아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해체된다. 이는 단지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위기다.



존재 중심의 전환과 사유의 회복


이러한 위기 앞에서 프롬은 존재 중심의 삶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존재 중심이란, 사랑하고, 배우고, 나누며, 창조하는 능동적 행위를 통해 삶을 체험하고 살아내는 태도이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을 중시한다. 즉, 타자와의 관계, 공동체적 유대, 자연과의 조화를 포함한 전인적 인간의 회복이다.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악의 본질을 “무사유(thoughtlessness)”로 보았다. 그것은 단지 생각의 결여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세계에 대한 책임 없는 태도이다.

“무사유란, 타인의 입장에 서보려는 상상력의 거부이다.” – 한나 아렌트


소유 중심적 사고는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대를 차단한다. 그 결과는 타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도 파괴한다. 물질만을 소유한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상실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환상의 종말” 이후의 문명을 상상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무한한 소비와 소유가 아닌, 깨어 있는 존재와 사유, 그리고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성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프롬과 아렌트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더 많이 가지는 인간”이 아니라, “더 깊이 존재하는 인간”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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